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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 Personal Computer


새로운 시간을 입력하세요

그는 점잖게 말한다


노련한 공화국처럼

품안의 계집처럼

그는 부드럽게 명령한다

준비가 됐으면 아무 키나 누르세요

그는 관대하기까지 하다


연습을 계속할까요 아니면

메뉴로 돌아갈까요?

그는 물어볼 줄도 안다

잘못되었거나 없습니다


그는 항상 빠져나갈 키를 갖고 있다

능란한 외교관처럼 모든 걸 알고 있고

아무 것도 모른다


이 파일엔 접근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그는 정중히 거절한다


그렇게 그는 길들인다

자기 앞에 무릎 꿇은, 오른손 왼손

빨간 매니큐어 14K 다이아 살찐 손

기름때 꾀죄죄 핏발선 소온,

솔솔 꺾어

길들인다


민감한 그는 가끔 바이러스에 걸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쿠테타를 꿈꾼다


돌아가십시오! 화면의 초기상태로

그대가 비롯된 곳, 그대의 뿌리, 그대의 고향으로

낚시터로 강단으로 공장으로

모오두 돌아가십시오


이 기록을 삭제해도 될까요?

친절하게도 그는 유감스런 과거를 지워준다

깨끗이, 없었던 듯, 없애준다


우리의 시간과 정열을, 그대에게


어쨌든 그는 매우 인간적이다

필요할 때 늘 곁에서 깜박거리는

친구보다도 낫다

애인보다도 낫다

말은 없어도 알아서 챙겨주는

그 앞에서 한없이 착해지고픈

이게 사랑이라면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


김이듬 - 시골창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 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 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 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춘다



잠복 - 유진목


그 방에 오래 있다 왔다 거기서 목침을 베고 누운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는 것 같았고 그저 숨을 쉬는 건지도 몰랐다


부엌에 나가 금방 무친 나물과 함께 상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방에 있자니 오래된 아내처럼 굴고 싶어진 것이다 일으켜 밥을 먹이고 상을 물리고 나란히 누워 각자 먼 곳으로 갔다가 같은 이부자리에서 깨어나는 일


비가 온다 여보


당신도 이제 늙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나 등이 아름답네요


검고 습한 두 개의 겨드랑이


이건 당신의 뼈


그리고 이건 당신의 고환


기록할 것이 많았던 연필처럼


여기는 매끄럽고 뭉둑한 끝


어떻게 적을까요


이불 한 채

방 한 칸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새들의 역사 / 최금진

우리 집안 남자들은 난생설화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배꼽이 없다
그러니 탯줄 없는 남자들을 무슨 수로 잡아매나
밤하늘엔 연줄 끊어진 연들처럼 별들이 떠돌고
우리집 나그네,라는 우리 친척 여자들의 말 속에는
모계사회의 전통가옥과 거미줄과 삐걱거리는 툇마루뿐
멀리 강원도 탄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우리 당숙도 죽어가는 새가 되어
가지 않고 날마다 숙모의 꿈속에 내려와 운다
티베트에선 죽은 사람을 독수리 먹이로 던져준다는데
누가 우리 집안 여자들을 부려 새를 키우나
배꼽이 없는,
그래서 세상에 아무 인연도 까닭도 없이
엄마는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피똥 싸듯 나를 낳았다
어서어서 자라서 훨훨 날아가라고 서둘러
날개옷 같은 하얀 배냇옷 한 벌을 지어놓았다
서른일곱에 정착도 못하고 나는 지금도 어딜 싸돌아다닌다

영어회화 - 박노해

우리 오매 일찍이 홀몸으로
논 서 마지기 농약 뿌리다
허연 두 눈 치뜨고 돌아가시고
두견이 피 토하는 울음을 뒤로
서울로 캄캄하게 떠나올 제에
누나 따라간다며 숙모 손을 뿌리치고
치맛자락 매달리던 코흘리개 영석이가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
영어회화 듣기평가 시험에
카세트 테이프가 없어서
잘사는 집 애들보다 점수가 뒤진다며
자정이 넘도록 영어책을 읽다가
잠꼬대로까지 중얼거린다

누나는 미국 전자회사
공순이가 되었어도
세컨라인 리더가 되어
QC 활동에 목이 붓도록
칼처럼 곤두세워 오버타임을 더 해도
다음 달엔 우리 영석이
카세트랑 테이프는 꼭 사서 주마
잔업 끝난 자정거리 휘청거려 오면
하지 말라 화를 내고 다짐을 해도
영석이는 서툰 솜씨르 밥을 지어 차려 놓고
낭랑하게 꼬부라진
영어회화 공부를 한다

누나는 못 배워서
무식한 공순이지만
영석이 너만은 공부 잘해서
꼭 꼭 훌륭한 사람 되거라
하지만 영석아
남 위에 올라서서
피눈물 흘리게 하지는 말아라
네가 영어공부에 열중할 때마다
누나는 노조에서 배운
우리나라 역사가 생각난다
부유층 아들딸들이 유치원서부터
영어회화 교육에다
외국인 학교 나가고
중학생인 네가 잠꼬대로까지
영어회화 중얼거리고
거리 간판이나 상표까지
꼬부랑 글씨 천지인데
테레비나 라디오에서도
영어회화쯤 매끈하게 굴릴 수 있어야
세련되고 교양 있는 현대인이라는데
무식한 공순이 누나는
미국 전자회사 세컨라인 리더 누나는
자꾸만 자꾸만 노조에서 배운
우리나라 역사가 생각난다

말도 글도, 성도, 혼도 빼앗아 가고
논도, 밭도, 식량도, 생산물까지
마침내 노동자의 생명까지도
차근차근 침략하던 일제하
조선어 말살
생각이 난다
미국 전자회사 세컨라인 리더 누나는
컨베이어 벨트에 밀려드는 부품에
QC활동에 칼처럼 곤두설수록
조선어 말살
생각이 난다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받아쓰기-이민휘

아버지 제가 어젯밤 혀를 도둑 맞았어요
입이 비었으니 그 말조차 할 수가 없고
창문을 열어두었다

밤 동안 혀가 돌아오길
기원하면서

아버님 따님의 혀를 가져왔습니다
당신은 누군가
우리 딸은 혀가 있는데

이제야 나는 입 벌리고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아
커다란 목소리로 고백해본다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에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