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할 때 나타나서 묵혀둔 얘기 쏟아놓고 가는 아저씨 재등장. 나는 내일과 월요일 휴가를 내서 4일 연휴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오늘 기분이 매우 좋다. 그래서 오랜만에 갤에 또 두서없이 글을 써보기로 했다. 오늘의 주제는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에 대한 얘기.





여러 사회주의의 조류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독특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가 바로 과학성에 대한 희구이다. 마르크스 본인이 19세기 유행하던 여러 사회주의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명명하고, 그에 대비해 본인의 사상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지칭한 이래,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과학성이란 필수불가결한 속성이 되었다. 물론 부르주아 사회과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유사과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인가? 이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된 고증학적 설명이 하나 있다. 번역 오류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독일인이니까 당연히 거의 대부분의 자기 저술을 1차적으로 독일어로 저술했는데, 독일어 원문으로 볼 때 마르크스가 '과학적'이라고 쓴 부분은 wissenschaft라고 쓴다. 그런데 19세기 당대의 terminology 차원에서 볼 때, 이 wissenschaft는 우리가 흔히 '자연과학'의 약어처럼 받아들이는 '과학'에 해당하는 의미값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논리 체계로 구성된 이론 일반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우리가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하면 마르크스 본인이 의도했던 의미값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학적(學的) 사회주의' 내지는 '이론적 사회주의'라고 해야 맞다는 설명이다.


이 설명이 실제로 맞는지 안 맞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 얘기하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이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보다 잘 강조되고, 전형 문제 같은 수리적 모델의 성립/불성립 문제를 부차화시킬 수 있다는 효과는 있다. 실제로 이러한 설명은 '경제학적 마르크스'보다 '철학적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논자들에 의해 주로 제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고작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이 이에 불과하다고 하면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파워가 심하게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철학적으로 조밀하게 짜여진 체계를 가지면 과학적인 거라고? 그럼 마르크스 말고도 세상엔 과학이 넘쳐날 것이다. 사회주의 중에서는 더욱 그렇다. 19세기의 진짜 웃음거리였던 오웬 같은 사회실험가 외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쓸모없는 얘기가 되어 버린다. 이건 썩 만족스러운 결론이 아니다.





이쯤에서 '과학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밖의 고찰에 대해 정리해 보자. 오늘날 과학성을 규정하는 갈래는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과학자 본인들 2. 과학철학자들 3. 과학사회학자들. 그런데 일단 1은 과학성 그 자체의 개념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좀 심하게는 과학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과학적이지 못하다고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따라서 과학성에 대한 고찰은 주로 2와 3의 얘기들을 갖고 진행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사실 2는 20세기 중반쯤 해서 대충 할 수 있는 얘기가 거의 마무리된 느낌이고, 요즘 과학성에 대한 최신 연구는 주로 3에서 나온다. 하지만 난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최신 연구는 잘 모르니 2의 얘기를 많이 하게 될 것이다.


과학철학자 중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은 포퍼와 쿤이다. 포퍼는 과학의 핵심을 '반증가능성'에 있다고 보았다. 어떤 명제가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 반증될 수 없다면(실험 관측이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실험 관측 결과를 제시해도 다른 얘기로 빠져나간다면), 그 명제는 비과학적이다. 포퍼는 이 기준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유사과학이라고 했다. 왜냐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핵심은 역사에 있는데, 지나간 역사는 실험 관측이 불가능하며, '역사적 설명'은 반례가 튀어나오는 순간 반례를 '설명의 일부'로 삼아버리기 때문이다(반례도 일단 일어난 순간 역사의 일부니까). 쿤의 패러다임론은 뭐 워낙 유명하니까 길게 설명 않겠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사람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의 계보를 이은 다음 세대 철학자 둘이다. 그 중 하나이며 포퍼의 이론을 계수한 임레 라카토쉬는 포퍼의 강경한 반증주의를 현실에 맞춰 연성화시켰다. 라카토쉬에 따르면 과학의 핵심이 반증가능성인 것은 맞지만, 포퍼의 주장대로 단 하나라도 이론과 다른 사례가 나온다고 해서 이론 전체가 버려져야만 과학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과학이론은 '합리적 핵심(rational core)'과 이 핵심의 설명을 보다 구체화하는 주변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하며, 반례가 합리적 핵심과 결정적으로 모순되기 전까지 주변 구조를 부분적으로 수정하며 과학이론은 과학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반례가 일으키는 모순이 합리적 핵심에 가 닿았다는 표지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라카토쉬는 '진보적 프로그램(progressive program)'과 '퇴보적 프로그램(regressive program)'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어떤 이론이 미지의 영역에 대해 생산적인 예측을 계속적으로 제시한다면 진보적 프로그램, 어떤 이론이 자기 자신이 왜 옳은지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변호하고 있으면 퇴보적 프로그램이다. 전자는 과학, 후자는 비과학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스승인 포퍼와 달리 라카토쉬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이라고 규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라카토쉬 생전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이므로, 지금은 글쎄...


또다른 하나인, 쿤의 패러다임론을 계수한 파이어아벤트는 '인식론적 무정부주의자'라고 불린다. 파이어아벤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연구는 갈릴레이에 대한 과학사적 연구인데, 당대 과학 문헌과 관련 서한 등 방대한 사료를 직접 검토함으로써 파이어아벤트는 갈릴레이가 그 당시까지 받아들여지던 신화처럼 과학의 적인 광신에 맞서 합리성을 수호한 영웅이 결코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갈릴레이는 방법론적으로 거의 정당화할 수 없는 야바위를 쳤고, 정치질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비판자들을 입다물게 했으며, 전형적으로 자기가 생각한 결론에 관측결과를 끼워 맞췄다는 것이다. 이후로도 유사한 역사적 연구를 다수 수행한 후 파이어아벤트는 애초에 과학을 과학으로 만들어 주는 내적 속성 따위는 없으며, 그 어떠한 설명일지라도 과학이라는 타이틀을 따낸 것이 과학이라는 매우 급진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위에서 과학철학이 대충 할 얘기를 다 했다고 했는데, 사실 그게 이 파이어아벤트 때문이다. 파이어아벤트의 연구 이후 과학에 대한 철학적/개념적 고찰은 사실상 무의미해지게 되고, 현실 속 실제 과학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한 연구로 무게추가 넘어가면서 과학사회학이 등판한다.


과학사회학에서 보는 과학은 그럼 어떨까? 물론 과학사회학에도 여러 이론적 설명들이 있지만, 가장 간단하게 공통적인 전제를 규정하자면 바로 '과학자가 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이다. 쿤의 정상과학 개념에 기반하여, '과학자 공동체'라는 것이 구성되어 있고, 이 공동체에 실체성을 불어넣는 각종 유무형의 제도(학술지, 학회, 대학의 전공, 같은 방법론을 공유하는 후배를 양성하는 과정 일체 등)가 갖추어져 있으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은 모두 과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를 갖고 있지 못한 이론적 조류들은, 그것이 현실에 얼마나 정합적이든 아니든, 과학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학자 공동체와 그 제도가 갖추어지는 이론과 그렇지 않은 이론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러 설명이 있겠지만 가장 단순한 설명은, 그 이론이 그러한 공동체와 제도를 갖출 수 있을 잉여자원을 사회가 투자해 줄 가치를 느끼는가 그렇지 않은가다. 즉 사회가 가진 '문제'를 공유하고 이에 대해 유력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으면 간택되고, 유력한 해답을 내놓을 능력이 없거나 혹은 아예 처음부터 사회에 있어 '비문제'를 논한다면 버려진다. 그래서 골상학은 19세기엔 과학이었지만, 지금은 과학이 아니다.


여기까지의 논의들을 기반으로 한번 마르크스주의를 검토해 보자. 일단 과학사회학적으로 볼 때,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과학자 공동체라는 것이 없고, 마르크스주의가 맞든 틀리든 지금 사회는 마르크스주의의 문제 제기를 '비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아마 좌파적 문제의식을 갖고 학계에 진출하면 이 부분을 정말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계급, 착취, 변증법, 노동가치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문학비평의 영역을 제외하면, 학계에서는 비판을 가하지조차 않는다. 이런 걸 갖고 논문을 쓰려고 하면 대번에 지도교수가 물어보는 게 "So what?"이다. 네가 그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이유 외에, 너한테 아무 관심이 없는 남들이 봤을 때도 이건 중요해 보인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그 논문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 학계 신참들에 대해 항상 강조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비문제'에 대한 고찰은, 꼭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더라도(즉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모든 과학 영역에서 신속하게 도태당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상황이 라카토쉬의 이론을 통해 어느 정도 설명된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기존의 주류 사회과학이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던 영역에 대해 마르크스 이론으로 훨씬 나은 설명을 할 수 있음을 보인다면 위의 저 "So what?" 소리를 안 들을 수 있다. 물론 그게 가능하다면 당신은 이미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제2의 마르크스 그 자체일 테지만. 즉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든 뭐든 '미지의 영역에 대한 생산적인 예측'을 해낼 수 있다면 과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다만 라카토쉬가 포함하지 않았던 설명은 '미지의 영역'과 '생산적인 예측'이 무엇인지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또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 결정되어 있는 '미지의 영역'과 '생산적인 예측'에 포괄될 수 없는 여러 문제제기들은 그 자체로서 '퇴보적 프로그램'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해답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미래를 잘 예측하느냐를 논하기 이전에, 일단 그 해답을 도출한 최초의 문제가 왜 문제 설정으로서 적절한지에 대해 논해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라카토쉬가 말한 퇴보적 프로그램의 정의 그 자체다.


파이어아벤트는 우리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탈출구를 제공할 수 있을까? 실제로 많은 유사과학자들이 파이어아벤트의 설명에서 위안을 찾고자 한다(물론 그보다 더 많은 유사과학자들은 파이어아벤트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파이어아벤트는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할 수 없다고 옹호해 주겠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주의 아닌 것에 대해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도 할 수 없다고 비판할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현실은 라카토쉬와 과학사회학이 관찰한 대로 움직인다.


여기까지 읽으면 자연스럽게 "결국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긴 놈이 정의라는 말을 복잡하게 꼬아서 하고 있는 거 아냐?"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실제로 현실의 과학적 실천을 놓고 봤을 때 라카토쉬, 파이어아벤트, 과학사회학의 통찰은 모순적이지 않고 오히려 큰 하나의 설명을 구성하고 있다고까지 느껴진다. 사회의 '문제'에 대해 '설명'함으로써(여기까지 라카토쉬) '과학'이라는 인정을 받고(이게 파이어아벤트) 자원을 긁어모아 '과학자 사회'를 만들면(이로써 과학사회학) 그게 과학이다. 즉 이긴 놈이 정의가 맞다. 냉혹한 현실이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마르크스주의가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러 온 보리수 같으니까.... 는 농담이고, 원래 하고 싶었던 얘기인, 그럼 마르크스 본인의 과학성에 대한 견해는 어떠했을까? 에 대해 논해 보자. 사실 마르크스는 애초에 과학철학자도 아니고, 자신의 방법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언급을 꺼렸기 때문에 탁 이것이 마르크스의 과학론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다른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난한 방식과, 변증법적 방법에 대해 단편적으로 남긴 몇몇 서술을 보면 대충의 추정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론에 대해 남긴 가장 유명한 문구는 이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뭐 기본적으로 혁명적 뽕이 차는 문구로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 테제는 좀 곱씹어 볼 여지가 꽤 있는 문장이다. 과연 이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이론과 실천, 해석과 변혁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일까? 이 문장 하나만 놓고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전체를 조망하면 마르크스가 본디 하고 싶었던 얘기가 좀 더 명확해진다.


1. (전략) 그러나 그는 인간활동 자체를 '객관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후략)

2.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즉 그의 사유의 현실성과 위력 및 현세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9. 직관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부르주아 사회 안의 개별적 인간의 관점이다.

10. (전략)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적 인류이다.


이 네 테제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첫째, 마르크스는 과학적 인식(=진리의 포착)이 인간의 실천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보았다(2번 테제). 둘째, 여기서 인간이란 개별 인간이 아닌 종으로서의 인간, 인간 사회를 말한다(9, 10번 테제). 셋째, 이 집합적 행위인 인간활동은 단순히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파악해야 할 진리이다(1번 테제). 이를 기반으로 다시 11번 테제를 보자. 여기서 말하는 '철학자들'은 위에서 실컷 언급한 관념론자와 직관적 유물론자들이다. 이들이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라는 것은, 인간 집단이 실제로 만들어 내 왔고 만들어 내고 있는 현실(=진리)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은 당연히 "진리를 증명"하는 것과 동치이다. 정리하자면,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11번째 테제에서 대립되고 있는 것은 인식과 실천이 아니라, 진리를 포착할 수 없는 '관조'와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 '실천-인식'인 것이다.


여기서 실천-인식의 통합성에 대해 마르크스가 갖고 있었던 아이디어의 편린 한 가지를 더 소개하자.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적 사실조차도 인간 집단의 실천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하나의 사례를 드는데, 바로 아메리카 벚꽃나무의 사례다(읽은 지 오래돼서 어느 저술 어느 부분에 나왔는지는 까먹었다). 아메리카 벚꽃나무는 아메리카 자생종이지만 유럽인들의 지리상의 발견 이후 유럽에도 이식되었는데, 지리상의 발견을 가능케 했던 각종 기술적 발전, 사회 제도의 구성, 체제의 추동력과 그 추동을 뒷받침한 잉여자원의 투여 능력 등이 종합적으로 예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메리카 벚꽃나무의 현존은 자연적으로 비과학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읽고선 마르크스가 무슨 얘길 하고 싶었는지는 알겠는데 사례가 좀 이해하기 어렵고 단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많이 느꼈다. 그래서 같은 맥락에서 내가 생각해 낸 사례는, 바로 연주시차와 지동설이다(파이어아벤트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시대까지 지동설이 비과학이고 천동설이 과학이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같은 천문 관측 데이터를 놓고 천동설로 설명하는 것이 지동설로 설명하는 것보다 어거지 설명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지동설이 깔끔하지 못하고 자꾸 ad hoc 설명을 갖다 붙여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천동설이나 지동설이나 천체의 궤도를 완전한 원형 궤도로 보고 있었기 때문인데, 실제 천체의 궤도가 타원형이라는 것은 훗날 케플러가 밝혀낸다. 문제는 천체의 궤도가 타원형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조차 관측상 반례에 부딪혔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연주시차 문제다. 간단히 말해 천체의 궤도가 타원형이라면 실제 천체가 같은 자리에 돌아오는 시간(혹은 같은 시간에 돌아오는 위치)에 오차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관측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미세한 연주시차를 관측할 수 있을 정도의 정밀성을 가진 망원렌즈가 만들어진 이후에나 해결된다. 즉, 천문학에 있어 영웅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가능하게 한 것은, 과학자가 아니라 유리세공사였다는 뜻이다.


이처럼 대상적 진리라는 것은 개별 인간의 순수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며, 집합적 실천의 큰 흐름 속에서 관측 영역이 넓어지는 것으로 마르크스는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방법을 따르지 않는 '공상가'들을 극히 경멸했는데, 오웬 같은 사회실험적 사업가뿐 아니라 바이틀링 같은 비-지성적 자생 활동가, 바쿠닌 같은 윤리-원칙적 사상가 모두가 이에 포함됐다. 언뜻 보기에도 서로간에 전혀 공통점과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이 모든 부류들을 마르크스가 한데 싸잡아 '공상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인간 집합의 실재하는 행위 과정'에 근거한 실천-인식이 아닌, 자신들의 단순한 상상이나(오웬, 사막 한가운데에 지 마음대로 새로운 규칙을 가진 사회를 만들려고 함), 편협한 개별 경험이나(바이틀링, 프랑스에서 오래 노동운동 좀 했다고 라떼는 시전함), 순수 사유적 윤리 원칙(바쿠닌, 소유가 도둑질인 이유를 대면 소유가 사라질 수 있는 줄 앎)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즉 정리하자면, 마르크스에게 있어 중요했던 '과학적' 방법이란 결국 고전적인 '과학' 개념 그대로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을 뜻하는 것이 맞다. 단 이 대상적 진리를 포착하는 방법에 있어 마르크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비-인간적/물질적 객체와 인간적/집합적 행위과정의 통합적 인식을 촉구했고, 인간이 물질을 대상으로 실천하여 새 지평을 열고 그를 통해 새롭게 실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물질이 떠오르는 나선 상승 구조 속에서 대상적 진리의 포착, 과학적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까지 봤을 때 마르크스가 추구했던 과학적 방법의 모델이 라카토쉬나 쿤, 과학사회학의 모델과 상당 부분 조화된다는 것이다. 사회가 '문제'를 인식하는 것, 그 '해답'의 유효성이 '정상과학'을 구성하는 것, 그것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다른 사회 전반의 잉여가치를 투자받아 '공동체'와 '제도'를 만드는 것 모두 마르크스가 중시했던 '객관적 인간활동'이다. 아무래도 라카토쉬가 본인 시대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으로 인정한 것이 그냥 느낌 좋아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랬던 마르크스주의가 지금에 와서는 바로 그 모델들을 통해 봐도 과학이라 얘기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은, 뭐 재미있다기보단 슬프고.


부르주아 사회과학은 어떨까? 경제학을 놓고 보자. 많은 얼치기들이 주류경제학을 보며 "비현실적인 전제를 깔아서" "인간을 너무 단순한 존재로 보아서" 등의 이유를 들어 진짜 과학이 아니라고 까는데, 이건 과학의 일반적 실천태를 모르고 말하는 순진한 소리인데다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선 그냥 제 발등 찍기다. 자연과학을 포함해 거의 모든 과학 이론은 현실에 존재하는 여러 복잡한 조건들을 일정한 상태로 가정하여 단순화함으로써 의미 있는 설명을 만들어낸다. 그러고 나서 그 설명을 다시 현실에 적용해야 아까 생략됐던 그 '복잡한 조건들'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체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마르크스는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라는 말로 표현했다. 현실 그 자체, 인간 그 자체를 그리는 것은 설명(explanation)이 아니라 기술(description)로, 가장 비과학적인 서술 방식이다.


과학사회학적 기준에서 보면 주류경제학은 정진정명 '진정한 과학'이다. 과학자 공동체도 있고, 재생산 제도도 있으니까. 라카토쉬 입장에서 봐도 과학이 맞다. 매년 GDP 증가율도 예측할 수 있고, 특정 정책 시행 시 부동산 가격이 오를지 내릴지도 주류경제학이 제일 잘 예측한다. 쿤 입장에서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한 가지 도발적인 주장을 하자면, 마르크스의 기준에 따라 봐도 주류경제학은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서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인간 집단의 객관적 행위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국가예산/중앙은행/중앙통계기관/기업지배구조 등 각종 물적 조건이 이론적 인식의 지평이 되고, 그 이론적 인식을 통해 다시 그 물적 조건을 확대 재생산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실천을 통해 진리를, 즉 그의 사유의 현실성과 위력 및 현세성을 증명"하는 것 그 자체 아닌가?


이에 대비하여 보면 현재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이 사실상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연주시차를 관측할 수 있는 렌즈'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핵심기관들이 만들어내는 데이터는 그 자체로서 과학적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관측도구이자 실험도구이며, 이를 통해 과학적 자본주의는 일상적으로 자신의 과학성을 검증해 낸다. 그런데 현시대 노동계급에게는 이에 해당하는 도구가 없다. 자본주의가 과학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일상적으로 드러내 검증하고 관측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마르크스주의 과학자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들에게 필요한 잉여가치를 할당하는, 나아가 노동계급의 세상이 과학적으로 관측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만드는 그 도구가 없기 때문에, 현재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성을 박탈당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소련의 붕괴가 아쉽다. 나도 어렸을 때는 '아 거 소련 사회주의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이름에 먹물만 제대로 뿌리고 갔네, 더 뿌리기 전에 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현실 국제정치적 긴장이나 민족적 감정이 객관적인 사회주의 이론 발전을 방해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판을 하든 거리를 두든, 한순간에 '문제'였던 것이 '비문제'가 되고 관측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으로 빨려들어가 버린 것보단, 그래도 뭔가 남아 있었던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은 한다.


아마 앞으로도 자본주의의 모순은 깊어갈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자본주의 위기는 해결될 때마다 더 큰 위기를 예비할 뿐이며, 과학적 자본주의의 합리적 핵심이 파괴되는 순간도 분명 오긴 올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사회주의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과학적 자본주의의 합리적 핵심이 파괴된 바로 그 현상이 계급모순에 의한 것이며 이를 건설적으로 변혁하는 길이 있다는 "사유의 현실성과 위력 및 현세성"은 결코 증명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변혁의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인류는 서로 잡아먹을 운명이었다는 것이 "대상적 진리"로 증명되어 버릴 수도 있다. 건설이 수반되지 않는 붕괴, 생산을 예비하지 않는 파괴가 스스로를 증명하기 전에 다시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초가 복원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