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요법"의 시작: 25년 전, 보리스 옐친은 "가격 자유화"를 시행했다
1991년 12월 3일 러시아 대통령이 서명한 "가격 자유화 조치법"에 서명한 뒤, 다음 해 말 인플레이션은 2600%에 달했다. 타스 통신이 어떻게, 그리고 왜 "자유화"를 실시했는가를 되새기기로 했다.
내가 참석했던 러시아 정부의 첫 회의가 기억난다. 1991년 11월 말,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은 인도주의적 원조를 받은 배가 독일에서 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5일 동안 칼리닌그라드에서 정박했는데 이는 허용되지 않은 일정이었다! 믈론 명목상으로만! - 90년대 초 예고르 가이다르의 고문으로 일했던 경제학자 블라디미르 마우의 회상
-왜인가?
- 물자는 5일치인데 칼리닌그라드에서 정박한다면 페테르부르크엔 오지도 않을 것이다.
계획과 시장의 간극
1991년은 상점 진열대가 텅 빈 시기였다. 소련에서는 이전에도, 특히 지방에서는 식료품과 소비재가 부족했지만, 인민의 장바구니는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옐친이 포고령을 내렸을 때쯤 되면 진열대엔 아무것도 없었다.
- "대도시의 가게까지 빈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소련 시절엔 도시에서 이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러시아 과학원 경제연구소 소장 루슬란 그린베르크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고르바초프와 옐친 사이의 권력 다툼을 포함하여, 서로가 "자신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는 등의 소모적 논쟁만 일삼았고 경제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정말 심각했다. 이 시기에 소련은 대대적 유가 하락을 겪었다. 이 나라의 탄화수소에 의존도는 극도로 높았다. 그래서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산하 복합연료에너지문제연구소(VNIIKTEP)에 따르면 에너지자원 판매 수익 비율은 전체 수출액의 55%에 달했다. 결국 예산과 알코올 방지 회사를 축소했다. 1990년까지 예산 적자는 GDP의 10%를 넘어섰다.
결국 자기금융으로의 전환을 구상했던 1987년 국영기업법도 연방정부와 잔인한 농담이었다. 이론상으론 계획경제에 시장요소와 민간주도 성장 도입이 적자 문제를 해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실제로 많은 기업 이사들은 제품을 즉시 국영 상점에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합의한 가격에 팔 수 있는 안을 선호했다.
1987년 이론상 원가회계의 전환에 관한 법률은 적자 문제를 해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기업 이사들은 즉시 국영 상점에 상품을 공급하지 않고 나중에 협동 가격에 팔기 위해 물건을 쌓아놨다.
- 이 법은 기업의 소득에 대한 통제를 없애고 이사 선거를 도입했으며 도매가가 생겨났다고 러시아 경제장관(1992-1993) 안드레이 네차예프가 언급했다. - 제품의 가격이 10루블이면 소매가 8루블론 아무도 팔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생산자에게 보조금을 지불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리고 정부는 보조금을 지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적립금이 없기 때문이다.
"상품수지 적자는 인플레이션의 반전이다. 가격이 국가에 의해 통제될 때, 시장은 가격 상승이 아닌, 상점에서 물건이 사라지는 것으로 답한다."고 국가경제행정원장 블라디미르 마우가 덧의붙였다. - 소련 행정 체제 하에서, 이 문제는 강력한 압력에 의해 해결되었다 - 큰 개선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만약 계획대로 공급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당에서 쫓겨나거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80년대 말에 그런 위협은 없었다. 행정 체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고, 시장도 아직 작동하지 않았다. 민영화가 이루어지기 훨씬 전에, 국영기업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권한이 없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보리스 옐친의 도박
가격 자유화는 어떤 식으로든 이뤄져야 하고 결과적으로 식량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은 일반적인 합의였다. 1989년 11월, 니콜라이 리츠코프 장관은 정치국 회의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1991년까지 현재의 이념적 접근을 고집하고 가격 자유화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내각은 가격 자유화의 필요성을 이해했다. 더욱이 이러한 이해는 인민들도 공유하는 요소였다. 사람들은 조만간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차후를 대비해 상품을 조달했고, 적자를 해소시켰다.
-루슬란 그린베르크, RAS 경제 연구소 소장
다른 한편으로,“가격 자유화”는 자연적으로 가계 수입 감소를 동반하고, 잠재적 불안, 파업 및 시위로 이어졌다. 물가를 자유화한 정치인이나 관료는 이전에 지지를 얻었다 해도 지지율이 폭락할 위험성이 있었다.
여기서 연방 지도부의 의사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1991년 3월 소련 정부는 물가를 올렸다. 중앙위원회와 장관 회의는 물가를 1.9배 상승시킨 공동 결의안을 채택했다. 가격은 그 수치보다 더 상승했지만 적자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보리스 옐친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옐친은 12월 3일에 가격 자유화 법령에 서명했으며, 1992년 1월 2일에 발효되었다. 시행 첫 달에 인플레이션은 346%였고, 그 해 말에는 2600%였다.
쇠고기의 1킬로그램당 가격은 80루블까지, 보드카 한 병의 경우 최대 180루블까지 상승했다. 동시에 평균 급여는 약 300-400루블에 지나지 않았다. 시장에 물건이 풀렸지만 대다수는 살 돈이 없었다. 곧 평균 급여가 높아졌지만 치솟은 물가를 따라가진 못했다.
대안이 있었는가
“대안은 전면적 기아와 혼란을 야기할 위험이 있었다."고 안드레이 네챠예프가 말했다. 주요 문제는 수입 중단을 포함하여 항상 중앙 집중식 보안을 유지하는 대도시에 대한 물자 공급이었다. 당시에는 충분한 통화가 없었다.
"이 조건에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잔인한 폭력을 포함한 소비에트 모델의 복원(후기 소비에트가 아니라 초기 소비에트), 계획 위반에 강력한 처벌을 가하늦 준군사적 독재. 또는 가격 자유화"라고 블라디미르 마우가 말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여론은 자유화를 지지했다. 독재를 확립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쿠데타를 이끈 사람들이 행정적 체계를 복원할 자질이 있는지 심히 의심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제학자들이 굶주림의 위협이 현실적이고 불가피하다는 데 동의하지는 않는다.
"대안이 없다는 논리는 정치적 정당화의 수단으로 쓰였다. 물론 기아가 있었고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는 데에 큰 책임이 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상점에 물건이 있었고 기아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대량의 소비재를 판매하는 대안이 등장한 것이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고 인민위원회 휘하 운영 관리위원회 부의장이었던 그레고리 야블린스키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야블린스키 자신도 물론 자유화를 옹호했지만 보다 점진적인 정책을 지향했다.
간접적으로,이 견해는 그 결과 국가가 적자 상태이지만 심각한 사회적 불안 없이 2달 동안 겨울을 보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실제로,이 법령이 12월 초에 서명되었고 1월 초에 발효 되었음에도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친 시기는 2월 초부터였다. 당시 많은 제품들이 비싸긴 했어도 실제로 진열대에 나타났으며 개혁의 효과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가격 자유화는 보리스 옐친과 예고르 가이다르가 시행한 주요 개혁안 중 하나일 뿐이다. 동시에 대규모 민영화와 1992년에 시행된 여러 개혁에 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안드레이 베셀로프
일단 정보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