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데체 몇번을 더 말해야하는지 모르겠네. 의회정치는 단순히 세력투사의 수단이고
(정의당에게 투표한다고 정의당 하고싶은거 다하라는 뜻이 아니듯이)
사회주의의 실현은 오히려 무산계급의 단결로 인한 직접적 행동으로 이루어지는거지. 괜히 '운동이 전부다'라고 말한게 아닌데
그리고 이런 행동은 혁명적인 극단적인 수단이 아닌 무산계급의 점진적인 행동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거고.
"당신들 헬창의 이론을 갤주 책으로만 읽었군요."
"무산계급의 개혁이 정당의 혁명보다 가취있기를"
"『유죄선고』 를 내릴려고 전당대회를 열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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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의 최종 목표가 무엇이든간에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운동이 모든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블랑키주의적 폭력이론이라고 비난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는 여기에서 수백 년 이래 인류 역사의 축이며 추동력인 것을 블랑키주의적인 오산(誤算)으로 여기고 있다. 계급사회가 존재한 이래, 또 이 사회의 역사를 만드는 본질적인 내용이 계급투쟁인 이래,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항상 상승하는 모든 계급의 목표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각역사적 시기의 출발점이면서 종착역이었다." - 갤주,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실로 모든 법률 헌장은 오로지 혁명의 산물이다. 혁명이 계급 역사의 창조 행위라면, 법률 제정은 그 사회의 정치적인 존속을 표현하는 것이다 … 법률 개혁 작업을 단순히 넓은 혁명으로, 또 혁명을 응집된 개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완전히 비역사적인 인식이다. 사회 변혁과 법률 개혁은 시간의 지속이라는 면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계기다" - 갤주, 같은 책.
이러한 제도(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제도)들 없이는 이른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아마도 생산력의 엄청난 황폐화, 무의미한 실험들, 목적 없는 폭력행위 등과 같은 것만을 빚어낼 것이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배는 사실상 혁명가 클럽의 폭력적 독재에 의해 지탱되는 혁명적 중앙권력의 독재 형태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헬창.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
...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이것을 통해 한가지를 더 증명한다. 즉 그는 노동자 계급이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부활할 수 있는 전제인 동시에 조건이라고 규정하면서도, 반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필연적 전제이며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베른슈타인의 추론은 최종결론이
최초의 전제를 '집어삼키는' 잘못된 순환논법으로 끝난다. 이러한 순환논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진보하는 노동운동과 그최종목표에 대한 경악으로 인해 숨이끊어졌다는 사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수 있을 뿐이다.
즉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바로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운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연결되어있는게 아니라, 반대로 민주주의 발전의 운명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결되어있다 -갤주 같은책
최종목표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여전히 최종목표 그대로 남아있다. "노동자 계급은 (원문 생략) 인민의 결정을 통해서 도입할 어떤 형태의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형태의 아상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방과 자신들의 보다 높은 생활형태 -현재의 사회는 고유한 경제적 발전을 통해서 바로 그런 방향으로 불가피하게 흘러가고 있기도 하다.-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들 노동자 계급의 오랜 투쟁, 즉 인간은 물론 사회적 조건들도 완전히 바꾸는 그런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들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실현해야할 어떠한 이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이미 붕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품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요소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최종목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이 문장이었는데, 특히 이 문장의 모든 부분보다는 그것의 근본사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운동, 즉 일련의 과정 그 자체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그에 반해 미리 상세하게 정해진 최종목표라는 것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이미 명제의 형태로 된 최종 목표가, 만일 원칙으로 정형화시킨 노동운동의 일반적 목표를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선언하는 그런 해석을 수용하는 것이라면, 그런 명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얘기한 바 있다. 그러나 운동의 원칙적인 방향과 성격을 결정하는 그런 일반적 목표 이상의 운동목표를 다루는 이론들은 필연
언제나 공상론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사실상 운동의 이론적 실전적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되어버릴 것이다.
베른슈타인과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향한 끊임없는 진보를 인류역사, 최소한 현대사의 위대한 기본 법칙으로 보는데, 좀더 자세히 고찰해보면 민주주의를 향해 끈임없이 진보한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사이에는 절대적인 내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중략) .. 민주주의 발전에 관한 일반적인 역사법칙을 현대사회의 범위에석 아니라, 부르주아 역사의 현재 단계에서만 고찰하더라도, 여기에서조차 베른슈타인이 이야기하는 도식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여 정확히 그반대로 부르주아 사회가 지금 까지 성취해온 것들을 부정하는 요소들이 나타난다. 한편 매우 중요한 사실은 민주주의 제도들이 부르주아가 발전하는데 큰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소국가들이 결합하여 현대적인 대규모 국가를 형성하는데 이들제도가 꼭필요한 것 이었던 한에서. 경제적인 발전은 그사이에 하나의 유기적이고 내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그런 한에서 정치적인 민주주의 동맹이 약화되어도 부르주아 사회의 유기적 조직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정치 행정 통합체로서 전체 국가기구가 반봉건적 또는 철저한 봉건적 메커니즘으로 부터 자본주의 메커니즘으로 전환되는 경우에도 동일 한 것이 적용된다. 역사적으로민주주의와 분리될 수 없는 이러한 전환은, 오늘날 행정,제정,국방등을 1848년 3월혁명 이전시대의 형태로 원상복구하지 않고 국가의 순수 민주적 요소, 즉 보통투표권, 공화주의 국가형태를 아무 위험 없이 제거하면서 실현된다.
이런식으로 자유주의가 부르주아 사회를 위해서 본질적으로 하찮은 것이라면 다른 한편 그것은 중요한 관계들에서는 직접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중요한 관계들에서는 직접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중략) 세계시장이 형성되고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이 첨예해지고 보편적이 됨으로써 군국주의와 해군확장주의가 세계정치의 수단으로 모든 강대국의 국제적, 국재적 생존을 주도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너라 세계정치와 군국주의는{의심의 여지없이 자본주의의 경제적 요구 그리고 그것의 추구와 관련되어 있기에} 현단계에서 상승하는 추세라면 이에따라 당연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분명히 하강한다. 이처럼 대외정책이 부르주아를 반동의 품으로 몰아넣는다면 국내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노동자 계급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베른슈타인은 이를 시인하는데 그는 급진적 부르주아의 이탈이 노동자 계급이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 때문이라고 본다. 이어 베른슈타인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자유주의를 다시 반동의 쥐구멍에서 꾀어내어 자신이 주장하는 사회주의의 최종목표로 이끌어야 한다고 프롤레타리아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가장 결정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은, 그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폐지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생존조건과 사회적 전제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며.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현재 사회의 내적인 발전경향의 직접적 산물인 만큼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이 발전경향에 모순된다는 점이다. -갤주 같은책 이후 내용은 위에 언급한 내용과 이어짐
바로 뒷부분. 투쟁을 위해 노력하는 계급에게 건전한 도덕은 필요로 하지만 나태한 퇴폐주의는 필요하지 않다. 이들이 머리속에 그려진 최종목표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전력을 다해 당면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는 한 결국 부차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당면의 목표가 일정한 원칙에 의해서 달성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으며, 이 원칙이 전체 사회 생활과 경제의 보다 높은 수준을 반영하고 따라서 이들 목표에 문화의 발전에서 하나의 진보를, 즉 보다 높은 도덕과 권리의 개념을 표시해주는 사회적 견해가 관통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노동자는 어떤 이상도 실현할 수 없다."는 명제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이 명제가 만일 필자의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면 자기기만의 산물이라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