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에게는 죽을 권리 가 있는가?



인간에게는 죽을 권리 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잭 키보키언의 답은 분명히 ‘그렇다’이다. 그는 1990년부터 1998년까지 삶의 중단을 원하는 130명의 환자들의 자살을 약물로 도왔으며, 1998년에는 그가 루게릭 병을 앓는 환자를 안락사시키는 장면이 촬영되어 시사프로그램 을 통해 방영되었다. 그로 인해 그는 1999년 2급 살인죄 혐의로 최소 10년, 최대 25년형을 선고받고 2007년에 가석방되기도 하였다. 


잭 키보키언, 일명 ‘죽음의 의사’ 사건은 ‘죽을 권리’를 옹호하는 측과 ‘살인’에 반대하는 측 사이에 안락사에 대한 팽팽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 쪽은 너무나 큰 고통에 시달리고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끝내고 삶을 중단할 자유가 있음을, 한 쪽은 생명의 존엄성은 어떤 이유로도, 자신이나 가족의 의향으로도 침해될 수 없는 가치임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2016년 국회에서 본인의 사전 동의 혹은 보호자의 동의와 의사의 소견에 따라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연명의료결정법’, 속칭 웰다잉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법 자체는 임종과정, 즉 회복 가능성이 없고 사망이 임박한 환자에게만 연명치료의 중단에 의한 안락사를 허용하는 소극적인 것이지만, 조력 자살에 가까운 적극적 안락사 허용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일견 안락사 옹호 측의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너무나 큰 고통이나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의 치료를 계속 할지, 아니면 그만둘지 선택하는 것과 치료를 그만두고 더 큰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약물 등으로 고통 없는 죽음을 원하는 것은 개인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일견 자신의 의사로 혹은 가족의 의사로 자유롭게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사실은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결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Lori A. Roscoe 등의 2001년 연구에 따르면, 잭 키보키언의 ‘환자’ 130명 중 적어도 69명은 회복할 수 없는 말기 환자가 아니였다. 또한 Solomon LM 등의 2008년 연구에 따르면, 그들 중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현저히 높았으며, 이는 여성이 우울증에 더 취약한 경향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의 자살은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병리적 현상임은 분명하다. 당연히 이런 환자들은 정신질환을 치료받아야 할 일이지 안락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해서 안락사 결정이 완벽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경제적 이유로 인한 안락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생활을 임금에 의존하며, 장기간의 입원치료는 소득 수단을 잃는 것 만으로도 생계를 곤란하게 하는 데다 치료비로 엄청난 추가적 지출까지 부과한다. 이는 보통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경제적 몰락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안락사 외의 선택의 여지는 없다. ‘자유롭게’ 가족 전체의 파멸과 자신의 죽음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안락사 옹호 논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인간에게 ‘죽을 권리’가 주어지더라도,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기존 사회의 안에서라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소득이 임금에 의존하고, 병의 치료를 위해 개인이 지출해야 하는 사회에서 ‘자유롭게 죽을 권리’란 언론이 거의 모두 사회의 일부 개인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에서의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자유’와 같이, 설령 어떤 제한도 가하지 않더라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의료 서비스가 사회적으로 제공되지 않는다면, 병으로 일할 수 없는 사회 구성원을 사회가 부양하지 않는다면, 치료의 중단이나 인위적 죽음의 결정을 환자에게 맞기는 것은 치료기간 동안의 치료비와 생계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 제거를 뜻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안락사에 대한 어떤 법과 제도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