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영화가 대중들에게 최초로 상영된 이후 영화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이제는 보편적인 예술 형식으로 자리 잡았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영화를 예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진기한 발명품으로 간주했다. 영화가 발명되고 시간이 점차 흐르자 영화를 본격적인 예술 양식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몇몇 영화인들의 혁명적인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을 일찍이 간파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영화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행동에 있다. 당시 문맹률이 높았던 러시아에서는 시공간의 제약과 대사의 제약 없는 영화만큼 효율적인 선전수단이 없었다. 레닌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은 영화”라 주창하며 영화의 선동성, 정치성을 간파했고 1919년 8월 ‘영화 산업 국유화 포고’에 서명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영화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다. 이 당시 소비에트의 혁명과 영화의 혁명을 위해서 전장에 뛰어든 사나이들의 면면을 소개하자면,
(느끼)
레프 쿨레쇼프 (Лев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лешов, 1899~1970)
당시 영화계를 선도하던 프랑스 영화인들은 미장센(제한된 한 프레임 안에 표현된 상징들로 시각만을 통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기법)을 영화의 핵심이라 보았다. 이에 대응하는 영화이론을 필요로 했던 볼셰비키 영화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영화감독 D.W. 그리피스(그의 대표작 <국가의 탄생>(1915)은 극심한 인종차별적 메시지를 역설하는 영화로도 유명하다)의 영화를 연구하며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편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에 불과했던 쿨레쇼프는 한 가지 실험을 한다. 당시 유명배우였던 이반 모주힌(Иван Ильич Мозжухин, 1889~1939)의 무표정한 얼굴을 촬영한 컷과 소녀의 시신, 따뜻한 수프, 아름다운 여성을 촬영한 컷을 이어붙인 것이다.
놀랍게도 이를 본 관객들은 무표정한 모주힌의 얼굴에서 각각 슬픔, 배고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읽어냈다. 쿨레쇼프는 이 실험으로 두 개 이상의 컷이 편집으로 연결되었을 경우 각 컷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렇다. 바로 현대 영화기법의 기초라 불리는 몽타주 기법의 발견이었다. 이 발견을 그의 이름을 따 쿨레쇼프 효과 또는 배우 이름을 따 이반 모주힌 효과라 부른다.
(와꾸에서 풍겨나오는 참을 수 없는 너드끼를 보라. 우크라이나 촌구석 어딘가에서 농사나 짓고 있던 청년 이반마저도 영화를 통해 자랑스런 혁명전사로 길러낼 눈빛이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Эйзенштейн, 1898~1948)
예이젠시테인은 스승인 쿨레쇼프나 후술할 동료인 푸도프킨의 다소 도식적이며 비유기적인 편집 기법을 비판하며 한 단계 더 발전한 몽타주 이론을 구축했다. 바로 컷과 컷은 단지 결합되는 것이나 나열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는 관계로 이어져야한다는 것, 즉 컷은 다른 컷과의 유기적인 상관관계에서 의미를 전달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질이 부동의 존재가 아니라 정-반-합의 운동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영화의 표현만으로 대중들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이젠시테인 몽타주 이론의 정수는 그의 대표작 <전함 포템킨>(1925)에 담겨있다. 물론 당시에는 아이러니하게 미국 영화에 밀려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하나 그의 이 혁명적인 기법은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에게 재평가되었고, 이후 현대 영화의 교본과도 같은 작품이 되었다.
여담으로 예이젠시테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영화화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었다. 허나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며 소비에트 영화계에는 경직적인 분위기가 급격히 몰아닥쳤고, 설상가상으로 그의 영화 <이반 뇌제> 2부에서 스탈린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예이젠시테인은 몰락하고 만다. 사실 스탈린은 이 영화의 1부를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2부의 제작을 장려했었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풍자는 미명이었을 뿐이고 사실은 그냥 영화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던 것이다. 이 스탈린의 ‘마음에 안 든’ 결과는 너무도 가혹해서 <이반 뇌제> 3부의 제작과 자본론 영화화 기획은 좌초되고 남은 필름들이 소각되었으며 <이반 뇌제>의 2부는 스탈린 사후 1958년이 되어서야 개봉할 수 있었다.
(썩소)
프세볼로트 푸도프킨 (Всеволод Илларионович Пудовкин, 1893~1953)
푸도프킨은 사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공장에서 화학자로 근무했던 과학도였다. 이후 1919년 레닌에 의해 설립된 국립영화학교에 입학해 레프 쿨레쇼프를 사사하며 영화를 배웠고 1926년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를 영화화한다. 이 영화도 물론 몽타주 기법의 훌륭한 예이지만, 전술했듯 다소 기계적이고 비유기적인 편집과 고전주의 문예영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동료인 예이젠시테인의 비판을 받았다. 이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에서는 누구나 영화에 나올 권리가 있다며 아마추어 배우를 기용했던 예이젠시테인과 달리 푸도프킨은 연기력을 중요시해서 전문 배우를 주로 기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듯 더 ‘혁명적’이었던 예이젠시테인은 스탈린의 눈 밖에 나 몰락하며 쓸쓸한 말년을 보냈지만 푸도프킨은 1935년과 1950년에 레닌 훈장을, 1947년에는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8년에는 소련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60세 생일에 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찬사를 받았을 정도로 영예로운 말년을 보냈다.
(위의 너드새끼들과는 다르게 존잘이다.)
지가 베르토프 (Дзига Вертов, 1893~1954)
훗날 지가 베르토프라 불리게 될 데니스 아르카비디치 카우프만은 본래 폴란드에서 태어나 20대 초에 미래주의 회화에 매혹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선회하는 정상spinning top’이라는 의미의 ‘지가 베르토프’를 가명으로 사용했다. 이후 1918년부터 모스크바 영화 위원회에서 선전 뉴스 영화의 편집을 담당하며 영화계에 몸을 담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해, 그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 사용된 필름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거기서 베르토프는 굳이 선형적인 서사에 상관없이 서로 아무 관계없는 필름 조각들을 이어 붙여도 완전히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영화이론의 핵심은 ‘포착된 삶’이었다. 그는 선형적인 서사를 가진 영화를 거부했다. 영화는 팩트를 담아야하며, 인간의 눈보다 우위에 있는 카메라 렌즈가 이 세상을 총체적이고 과학적으로 파악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의 원칙에 따라 당 기관지의 이름을 딴 <키노 프라우다>라는 선전영화 시리즈를 1922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매달 제작하여 1925년까지 총 23편이 이어졌다. 그의 영화는 단순한 선전영화가 아니었다. 소련 인민들의 생생한 삶을 낱낱이 기록한 그의 영화들은 소련의 현실에 대한 과학적이면서도 감동적인 비전을 강렬하게 제시하였으며, 그의 다수의 논문과 혁신적인 테크닉을 사용한 영화들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대표작인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는 언어가 아닌 순수한 시각 이미지만으로도 자신의 사상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는 패스트 모션, 슬로우 모션, 핸드헬드, 몽타주 등 현대 영화의 대부분의 기법들이 총출동하는 혁신적인 영화였다. 단순히 영화 기법에서만의 혁신이 아니라 그는 이 영화로 영화와 현실, 그리고 영화와 인간 지각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담론에 대중들을 참여시켰다.
허나 이 베르토프 역시도 스탈린의 탄압을 면치 못했다. 카우프만이라는 본명에서 보듯이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는 달리 총살이나 노동교화형은 면했으나, 베르토프는 모든 직위를 박탈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맞선 후방에서의 소련 인민들의 투쟁을 담은 기록영화를 몇 편 제작했지만 그게 전부였고 이후 관습적인 뉴스영화의 편집일과 같은 소일거리나 하며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비루한 말년을 보냈지만 베르토프의 혁명적인 영화이론은 훗날 많은 영화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다. 그는 베르토프 영화이론의 영향을 받아 스타 배우, 대규모 자본, 매끄러운 서사, 세트 촬영으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영화에 반기를 든, 가히 영화혁명이라 불릴 만한 누벨바그 사조를 이끌었으며 1968년에 동료 영화인들과 베르토프의 이름을 딴 ‘지가 베르토프 집단Groupe Dziga Vertov’을 결성해 정치영화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혁명적이었다. 쿨레쇼프는 불과 18살의 나이에 첫 영화를 만들었고 20살의 나이에 국립영화학교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푸도프킨은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린 이 쿨레쇼프의 아래에서 영화를 배웠다. 아무리 서양에서 나이를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지만 실로 예외적인 일이었다. 나이, 계급, 인종, 성별을 모두 뛰어넘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을 이 영화인들이 몸소 보여준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과 영화 혁명에 모두 몸담았던 이들의 작업은 현대 영화에 실로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들의 이름 없이는 영화사를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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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쓰다가 날려먹은 글임. 쓰고 보니까 스탈린한테 '너 숙청'당한 사람들이 꽤 되네ㅋㅋㅋㅋ 로붕이들이 재밌게 읽어줬으면 좋겠음.
대체 숫자들은 뭐임?
수정함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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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함 ㅠㅠㅠ
가독성 혁명각
수정함 ㅠㅠ
베르토프 소개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