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기획원에는 한국은행 출신들이 많아 금융안정성에 상대적으로 예민했고, 또 미국 대외원조처(USOM)의 주요한 교섭창구로서 미국의 자유주의적 경제정책 이념을 더 빠르게 수용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경제기획원이 주로 거시지표를 다루고 전문적 경제이론에 특화되어 있었다면, 이와 달리 고등고시를 통과한 정통관료이거나 군부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상공부와 재무부 관료들은 주로 산업현장의 성과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성장주의적 전망하에서 실용적이고 미시적인 방식으로 수출확대목표를 달성하는 데 주력했다.
경제기획원은 1960년대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을 바탕으로 경제정책 전반을 주도했고, 재무부·상공부와도 상호보완적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두 관료집단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금융통제를 더욱 극단화했던 1972년의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8·3 조치’)과 1973년의「중화학공업화 계획」 발표가 결정적 계기였다(윤홍근, 2013; 양재진, 2014; 박찬종, 2018).
1970년대에도 박정희 자신은 금융통제에 기반한 성장주의적 열망을 고수에, 그 결과 1960년대까지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강력한 핵심부처였던 경제기획원은 정부 내에서 점차 주변화되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로의 권력 교체는 상황을 반전시켰다. 사실상 권력의지를 제외하고는 경제정책에 관해서 백지상태에 가까웠던 신군부가 자신의 정책파트너로서 1970년대에 정책주도권을 행사했던 성장론자들이 아니라, 경제기획원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기술적 정책판단에따른 결과라기보다는 신군부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생존을 위한 선택에 가까웠다.
갓 손에 넣었을 뿐인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감행한 쿠데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정치적 외피를 확보해야 했고, 따라서 무엇보다 불법적 권력장악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지지를 획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위 파트너로서 경제기획원을 선택한 것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우선 쿠데타를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정부의 실정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고 1970년대식 경제정책으로부터 탈피하겠다는 분명한 신호를 국민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성장론자들의 통제경제가 아니라 명시적으로 경제자유화를 내세웠던 기획원의 ‘개혁성’에 주목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동시에 중화학공업화 이후 1970년대 내내 미국 정부와 크고 작은 갈등을 빚었던 상공부·재무부의 성장론자들에 비해 미국 정부기관과 비교적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정책 방향에 공감을 형성해 왔던 경제기획원 인사들을 새로운 정부의 핵심 요직에 등용할 경우 얻을 수 있는 대외적 이점을 간파했던 것이기도 했다.
(중략)
신자유주의의 최초의 실험장, 혹은 ‘쇼케이스(show case)’였던 1970년대 후반의 칠레는 물론이거니와, 전통적 케인스주의자와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신자유주의자 또는 신보수주의자들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영국과 미국에서도,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언제나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통한 ‘정책개혁’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정부에 의해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의 전환’ 혹은 ‘자유시장질서의 확립’으로 명명된 이 신자유주의 개혁은 과거의 정부 내에서 소수 관점에 머물렀던 경제기획원의 안정론 혹은 신자유주의적 관점이, 권력교체기라는 정세 속에서 신군부와의 동맹을 통해서 비로소 실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국면은 ‘한국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박찬종, 2018).
그러나 한국에서는 가용한 자원을 재벌부문에 집중시키며 높은 성장률을 달성해 왔던 과거의 성장주의적 열망과 개발주의적인 관성이 새로운 엘리트들의 신자유주의적 신념보다 더 강했기에, 개혁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신자유주의적 엘리트와 보다 광범위한 대중 사이의 결합이 이루어져야 했다. 바로 이러한 결합을 가능케 했던 요인, 즉 ‘한국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기원’이 해명될 필요가 있다.
요약
1. 박정희 시절 미국 유학파가 주도했던 경제기획원은 미국을 추종했기 때문에 미국가 각을 세우며 중공업과 국가주도 금융과 경제가 주를 이뤘던 70년대 주목 받지 못함.
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안보와 핵무장을 완전히 포기하고 경제와 금융을 전면 개방하여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얻었는데, 이때 경제기획원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됨.
3. 전두환은 신자유주의 세력을 필두로 금융자유화와 같은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을 추진.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원이 되었음. 금융자유화는 훗날 외국자본에 의한 란국 결제의 종속과 IMF의 씨앗이 됨.
전두환은 박정희가 평생을 투쟁한 우리 민족의 자주주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국에게 완전히 팔아넘김.
경제기획원이 주로 거시지표를 다루고 전문적 경제이론에 특화되어 있었다면, 이와 달리 고등고시를 통과한 정통관료이거나 군부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상공부와 재무부 관료들은 주로 산업현장의 성과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성장주의적 전망하에서 실용적이고 미시적인 방식으로 수출확대목표를 달성하는 데 주력했다.
경제기획원은 1960년대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을 바탕으로 경제정책 전반을 주도했고, 재무부·상공부와도 상호보완적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두 관료집단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금융통제를 더욱 극단화했던 1972년의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8·3 조치’)과 1973년의「중화학공업화 계획」 발표가 결정적 계기였다(윤홍근, 2013; 양재진, 2014; 박찬종, 2018).
1970년대에도 박정희 자신은 금융통제에 기반한 성장주의적 열망을 고수에, 그 결과 1960년대까지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강력한 핵심부처였던 경제기획원은 정부 내에서 점차 주변화되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로의 권력 교체는 상황을 반전시켰다. 사실상 권력의지를 제외하고는 경제정책에 관해서 백지상태에 가까웠던 신군부가 자신의 정책파트너로서 1970년대에 정책주도권을 행사했던 성장론자들이 아니라, 경제기획원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기술적 정책판단에따른 결과라기보다는 신군부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생존을 위한 선택에 가까웠다.
갓 손에 넣었을 뿐인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감행한 쿠데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정치적 외피를 확보해야 했고, 따라서 무엇보다 불법적 권력장악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지지를 획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위 파트너로서 경제기획원을 선택한 것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우선 쿠데타를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정부의 실정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고 1970년대식 경제정책으로부터 탈피하겠다는 분명한 신호를 국민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성장론자들의 통제경제가 아니라 명시적으로 경제자유화를 내세웠던 기획원의 ‘개혁성’에 주목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동시에 중화학공업화 이후 1970년대 내내 미국 정부와 크고 작은 갈등을 빚었던 상공부·재무부의 성장론자들에 비해 미국 정부기관과 비교적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정책 방향에 공감을 형성해 왔던 경제기획원 인사들을 새로운 정부의 핵심 요직에 등용할 경우 얻을 수 있는 대외적 이점을 간파했던 것이기도 했다.
(중략)
신자유주의의 최초의 실험장, 혹은 ‘쇼케이스(show case)’였던 1970년대 후반의 칠레는 물론이거니와, 전통적 케인스주의자와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신자유주의자 또는 신보수주의자들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영국과 미국에서도,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언제나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통한 ‘정책개혁’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정부에 의해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의 전환’ 혹은 ‘자유시장질서의 확립’으로 명명된 이 신자유주의 개혁은 과거의 정부 내에서 소수 관점에 머물렀던 경제기획원의 안정론 혹은 신자유주의적 관점이, 권력교체기라는 정세 속에서 신군부와의 동맹을 통해서 비로소 실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국면은 ‘한국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박찬종, 2018).
그러나 한국에서는 가용한 자원을 재벌부문에 집중시키며 높은 성장률을 달성해 왔던 과거의 성장주의적 열망과 개발주의적인 관성이 새로운 엘리트들의 신자유주의적 신념보다 더 강했기에, 개혁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신자유주의적 엘리트와 보다 광범위한 대중 사이의 결합이 이루어져야 했다. 바로 이러한 결합을 가능케 했던 요인, 즉 ‘한국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기원’이 해명될 필요가 있다.
요약
1. 박정희 시절 미국 유학파가 주도했던 경제기획원은 미국을 추종했기 때문에 미국가 각을 세우며 중공업과 국가주도 금융과 경제가 주를 이뤘던 70년대 주목 받지 못함.
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안보와 핵무장을 완전히 포기하고 경제와 금융을 전면 개방하여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얻었는데, 이때 경제기획원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됨.
3. 전두환은 신자유주의 세력을 필두로 금융자유화와 같은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을 추진.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원이 되었음. 금융자유화는 훗날 외국자본에 의한 란국 결제의 종속과 IMF의 씨앗이 됨.
전두환은 박정희가 평생을 투쟁한 우리 민족의 자주주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국에게 완전히 팔아넘김.
Intj냐 커뮤에 많다던데 나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