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고르바초프가 밀어부친 개혁정책의 결과로 영원할 것 같았던 소비에트 체제도 종말을 고했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있던 12개 공화국은 독립되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자유화가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과 소련 내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은 한편으로 소련체제를 그리워 하는 수많은 대중들에게는 분노와 실망을 안겨주었다.
고르바초프가 사임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자유주의자 옐친이 권좌에 올랐지만, 정치적 혼란은 사그라들기는 커녕 더욱 증폭될 뿐이었다.
사회의 전반적인 자유화는 소련 시대 억압받던 자유주의자들에게 정치참여의 길을 열어주었던 한편으로 좌익 공산주의자들과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 두마(의회)에는 겐다니 쥬가노프를 당수로 하는 러시아 공산당이 대중들의 소련시대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약진하고 있었다.
슬라브 민족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를 결합한 정책으로 이들은 1993년 총선에서는 원내 2당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소련은 단지 '노동자-농민의 천국'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슬라브 민족이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었기 때문에 부활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였다.
이렇게 러시아 공산당이 약진하는 한 편으로는 거친 언행으로 연일 화제가 되었던 블라지미르 지리노프스키를 당수로 하는 '자유민주당'이 세력을 얻고 있었다.
'자유'와 '민주'를 결합시킨 당명으로 겉보기에는 자유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는 중도우파 정당으로 비칠 가능성이 크지만, 사실 이들은 강경한 민족주의자들이요,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꿈꾸는 국수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공산당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거나 사회주의 복원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제국 러시아의 부활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는 러시아 공산당과 비슷했다.
이렇게 자유주의와 대자본가의 지지를 받는 옐친과 포퓰리즘에 기반한 러시아 공산당, 자유민주당의 대립으로 정치판이 연일 시끄럽던 차에 재야세력의 한구석에서는 '민족볼셰비키당'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정당이 조용히 출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족 볼셰비키당>의 창립
작가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는 하루 아침에 조국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는 20대 후반에 미국으로의 이민길에 오른 그는 억만장자의 집사부터 거리의 노숙자까지 안해본 것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런 그에게 가장 큰 명성과 부를 안겨주었던 직업은 작가였다. 그는 <러시아 시인은 덩치 큰 검둥이를 좋아해>라는 제목의 도발적인 소설로 데뷔하여 <인생낙오자의 일기>, <나야, 에디>라는 작품을 연이어 출판하며 일약 문단의 스타가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삶의 밑바닥에 내던져진 '루저'의 애환과 고통,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들이 많았다. 그는 거칠고 도발적인 언동으로 많은 이들의 호감과 경멸을 동시에 얻었으며, 소련 출신이라는 이유로 스파이로 몰려 한때 FBI의 추적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위의 이야기만 들으면 (FBI의 추적을 받았다는 이야기만 빼고) 그의 행보는 미국에 망명한 러시아 반체제 인사의 전형적인 행보로 보인다. 소련의 답답함이 싫어 미국으로 떠난 청년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거칠고 도발적인 소설로 인기를 얻는다니, 그는 분명 자유주의자, 그도 아니면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이런 해석은 모두 빗나간 것이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방탕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항상 소련을 자신의 정신적인 고향으로 삼았다.
그는 스탈린을 숭배했으며,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해체시켰을 때는 그를 총살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비록 몸은 이국에 있었으나, 조국이 망가지는 모습을 동네 불 구경하듯 지켜만 보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그는 곧장 모스크바로 돌아와 강한 러시아를 재건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리모노프는 자유민주당의 지리노프스키 아래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의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무엇이 불만족 스러웠는지는 몰라도 그는 이듬해 지리노프스키를 떠나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데, 그것이 바로 민족 볼셰비키당이다.
비록 당원은 몇 명 되지 않았는데, 그 중에는 '20세기 후반 러시아 최고의 사상가'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두긴이라는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리모노프의 젊은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청년 알렉산드르 두긴의 젊은 시절도 파란만장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리모노프와 같은 행동가는 아니었지만, 소련 시기 르네 게농, 율리우스 에볼라 등의 주장한 전통주의 철학을 연구하는 서클에 몸 담았다 학회에서 추방되기도 했고, 소련이 몰락한 후에는 스스로를 '파시스트'라고 선언하며 극우 민족주의자 단체 팜야트(Pamyat)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강대한 제국 러시아를 동경했던 그가 소련 해체 후 들어선 옐친 정부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리 없었다. 그는 러시아가 하루 빨리 현재의 자유주의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국가의 권위와 공동체의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그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혁명사상으로 역사의 무덤으로 부터 호출했던 것이 바로 '민족 볼셰비즘'이다.
'민족 볼셰비즘'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초반 유행했던 독일의 '보수혁명' 담론의 하나로 나타난 것으로,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결합을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려 했던 사상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민족 볼셰비즘의 전통은 러시아에서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적백내전 당시 적군에게 투항한 백군의 일부, 또는 망명한 러시아 파시스트들이 소련을 재평가하려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러시아의 민족 볼셰비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니콜라이 우스트리얄로프라는 사람이 있다.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망명 파시스트였던 그는, 초기엔 열렬한 반공주의자, 반소비에트주의자였으나, 레닌이 분열된 러시아제국을 재통일하고 국제 자본주의에 맞서는 모습을 보고 소련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자기가 지향하던 슬라브 민족주의에 볼셰비즘을 융합하려는 노력을 계속 하던 그는 1935년 스탈린 치하의 소련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결국 반(反)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강제수용소에 갇히고, 결국은 총살형에 처해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두긴은 바로 이러한 선배들의 뜻을 계승해, 민족주의와 볼셰비즘을 결합시킨 '러시아적 파시즘'을 구상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그가 리모노프의 새로운 동지가 되는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긴은 망설임 없이 새로운 정당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기로 결심했으며, 민족 볼셰비키당의 초기 몇년간 리모노프의 가장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민족 볼셰비키당의 대중화
러시아 민족주의와 볼셰비즘을 결합한 민족 볼셰비키당은 초기에는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에 대한 강한 향수를 가진 민족주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급속히 확대해 나가기 시작한다.
NBP(민족 볼셰비키당)은 비록,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지리노프스키가 이끄는 자유민주당이나, 쥬가노프를 당수로 하는 러시아 공산당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NBP가 청년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바로 '스타일'에 있었다.
민족 볼셰비키들은 러시아 공산당의 나이든 틀딱들은 물론, 소위 파시스트로 분류되는 고루한 정교회 신자들과도 달랐다.
서유럽 체류 경험이 있었던 리모노프는, 당기와 당보, 선전포스터를 제작하는데 있어 나치와 파시스트, 펑크의 매력적인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것들은 서유럽에서는 어느 정도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제 막 '자유화'가 시작된 러시아의 사회에서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더불어 리모노프의 카리스마, 두긴의 뛰어난 연설 능력과 해박한 지식, 소비에트 시절의 전설적인 록스타였던 이고르 레토브의 입당 역시도 당의 입지를 확대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리모노프와 두긴의 대립과 결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리모노프와 두긴 사이에서는 일종의 파벌이 형성되게 되는데, 이 세력 간의 갈등과 긴장은 어떤 면에서는 NBP가 잡고자 했던 두마리 토끼인 '파시즘'과 '볼셰비즘' 사이의 분열을 함축한다.
리모노프의 지도 하에 있던 노동계급 청년들은 일반적으로, 파시즘에 대항한 전쟁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던 반면, 두긴의 진영은 주로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정교회 신자와 보수주의자, 파시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리모노프 진영의 청년들은, 두긴과 동료들이 자신의 조상을 도륙한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옹호하는 모습이 보기 불편했고, 두긴 진영의 이들은 파시즘의 세계사적 성취를 부정하고 깎아내리는 프롤레타리아 건달들의 행태에 심기가 불편한 상황이었다.
이 두 계파의 갈등은 전면전으로는 번지지 않고, 결국 1998년, 두긴 계파의 탈당으로 종결되었다.
일단락 되었던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은 99년 푸틴 집권 이후로 또다시 불이 붙게 되는데, NBP가 푸틴에 반대하며 반체제의 길을 지속했던 반면, 두긴은 푸틴정부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국립 지정학 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푸틴 집권 이후의 NBP
푸틴이 집권 이후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를 강화해 나감에 따라, 한때 <러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반체제 세력>을 자임할 정도로 성장했던 NBP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2001년 4월,테러 혐의와 헌법 질서의 전복, 불법적인 무기구입 등의 혐의로 인해 리모노프와 민족 볼셰비키 일부가 투옥되었다. 2년 뒤 리모노프는 석방되었으며, 석방 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노예의 전통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이에 더해 러시아 법원은 2005년 6월 NBP의 공식적인 정당의 지위를 박탈, NBP는 졸지에 불법적인 지하조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2010년 NBP는 분열되어, 리모노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다른 러시아(Другая Россия)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 한편으로, 다른 이들은 '민족 볼셰비키 전선'을 결성, 리모노프의 노선과 대립하는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NBP의 주목할만한 활동 목록
* 2002년 프라하 정상회담 중 내셔널 볼셰비키의 일부가 NATO와 미제국주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NATO의 사무총장인 조지 로버트슨의 얼굴에 토마토를 던졌다.
* 2004년 3월 3일, 민족 볼셰비키가 모스크바의 "유나이티드 러시아 "본부를 점령 하면서 정부 정책에 항의했다.
* 2004년 6월 22일, 민족 볼셰비키들은 대조국 전쟁의 기념일에 모스크바의 독일무역대사관을 점령했다. 그들은 "절대로 잊지 마라! 절대 용서하지 마라!"라고 쓰여진 깃발을 달았다.
* 2006년 9월 25일, 민족 볼셰비키들은 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여 모스크바에 건설하는 재무부를 점령했다.
기타 참고 자료
-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국내에 번역 출간된 엠마누엘 카레르의 소설 <리모노프>를 읽어보기 바란다.
- 알렉산드르 두긴에 대한 정보는 한글로 번역된 다음 링크를 참고하라.
"북조선에 핵무기를 나눠주자"
- http://blog.ohmynews.com/mrbusy/266856
"진짜 악마에 관해"
- http://blog.ohmynews.com/mrbusy/292462
"재벌에 관해"
- http://www.kpug.kr/kpugfreeboard/1439763
한국의 역사학자 이병한과 두긴의 인터뷰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79779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79871
아래는 90년대 NBP의 당대회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
위에 서서 연설 중인 인물이 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 오른쪽에 안경을 쓰고 있는 인물이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다.
현실적으로 한국에는 “소련에 대한 강한 향수를 가진 민족주의 청년”이 없다 소련처럼 향수를 느낄만한 위대한 과거도 없고, 민족주의 청년도 없다
이 글은 민족볼셰비즘을 옹호하는 글이 아닌, 두긴에 대한 정보 차원에서 올린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