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선정된 인물 10명 중 5위(3위는 나치 부역자인 스테판 반데라다.)를 차지한 인물 한 명이 있다. 그가 바로 보그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다. 흐멜니츠키는 드니프로 강과 인접한 치히린 인근에 위치한 수보티우 마을에서 코사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 지배하에 있었으며, 어린시절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의 학교에서 폴란드의 역사,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크림 타타르어 등을 교육 받았다. 


0f9ed82becd734a867bcddbc58db343a1a48f5cbc475a683d51573


젊은 시절 흐멜니츠키는 폴란드군을 위해 싸웠고 폴란드의 전방 방위에 충성스럽게 봉사했다. 1620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터키와 싸워 패배한 체초라 전투에서 흐멜니츠키는 터키군에 포로로 잡혀 이스탄불 감옥에서 2년간 수감되기도 했었다. 터키에서 석방된 흐멜니츠키는 드니프로 강변의 체르카시 인근의 고향마을 치기린에서 다른 코사크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영지를 관리하며 안락하게 살았는데, 1647년 현지의 폴란드 장교들과 재정과 개인 문제로 충돌하면서 생애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흐멜니츠키는 폴란드 사법기관에 자신의 피해와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체포당했다. 체포당한 흐멜니츠키는 탈출했으며 자포로지아 코사크 진영에 가서 합류했다. 흐멜니츠키는 단기간에 헤트만(Hetman은 국왕 다음의 지위를 지닌 군 사령관직의 호칭이다.)으로 선출됐다. 흐멜니츠키는 크림타타르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를 안 폴란드가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코사크와 크림타타르 연합군은 1648년 조브티 보디 전투와 코르순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했다. 이게 바로 1648년 흐멜니츠키가 주도한 대규모 봉기의 시작이었다. 


7de48073b1866ef251bddefb01d4262d465b2e907927cf4f132b9e


폴란드는 코르순 전투를 치르는 도중 왕이 사망하여 정치적 혼란에 빠졌으며,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군대가 폴란드 주력군을 대패시키자 키예프를 중심으로 농민 봉기가 촉발됐다. 폴란드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다시 한 번 선제공격을 시도했지만, 필럅찌 전투에서 패했다. 승리에 고무된 흐멜니츠키는 10월 갈리치아 지방의 중심지인 르비프를 포위한 다음 항복을 받아냈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향해 진격했다.


흐멜니츠키 군대에 포위당한 폴란드왕은 그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줬으며, 흐멜니츠키는 정교회 지도부와 당시 키예프를 방문하고 있던 예루살렘 총주교의 환영을 받았다. 정교회 지도자들은 흐멜니츠키를 루스인들을 폴란드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당대의 모세로 칭송했다고 한다. 따라서 흐멜니츠키는 해방자이며 루스의 독립적 지도자로 떠받들어졌다. 이에 따라 흐멜니츠키는 정교회 지도자들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와도 협상을 했고, 정교회 공국인 몰다비아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1db4d319cced0e9947a9d7a61fc42f0290d3b771f46d3605517813274c8d8cd5249d485af64a5cf119eb4d7c3476b5fb53cc37623f5bcceb3b1d60e60699c80b8b9f4a80f15ec2cc


1649년 8월 흐멜니츠키가 다시 폴란드를 향해 진격하여 갈리시아의 폴란드군을 포위하자, 폴란드는 흐멜니츠키와 즈보리프 강화조약을 맺었다. 코사크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보그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주변의 거의 모든 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흐멜니츠키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앞서 얘기한 모스크바와의 접촉은 그들과의 동맹을 추진한 것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폴란드 관할이던 코사크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1654년에 이르러서였다. 


18b6c227ecdc3de641b196931fc3217dea744e6de7f7bc426ca2f275506389a00e4c634cf6784b62497c901338bebba5eb77a767974cc775


1654년 페레야슬라브 조약을 통해,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국가는 모스크바 차르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이를 통해 흐멜니츠키는 차르의 지원을 받으면서 우크라이나를 수복했다. 또한 흐멜니츠키는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전쟁이 터지자, 폴란드에 맞서 러시아 편에 써서 싸웠다. 그 전쟁에서 스웨덴과 손을 잡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1657년 8월에 급사했다. 분명한 사실은 흐멜니츠키가 폴란드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된 것은 분명하다. 이를 두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복속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2016년 영화 감독 올리버 스톤이 만든 다큐멘터리인 ‘Ukraine On Fire’는 흐멜니츠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항산 자신들보다 강한 세력들에 둘려싸인 우크라이나는 살아남기 위한 영리함이 필요했다. 우크라이나가 세월을 겪으면서 배운 최고의 기술은 강한 편에 붙는 것이었다.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의 지도자 보그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와 맺은 휴전협정을 깨고, 폴란드 보다 더 강한 러시아 편으로 돌아섰다.”


흥미롭게도 우크라이나는 그로부터 50년 뒤 또 다시 러시아 편에 섰다. 보그단 흐멜니츠키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던 헤트만인 이반 마제파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를 도와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에 맞서 싸웠다.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선 흐멜니츠키에 대해 폴란드에 맞서 독립한 지도자라 높게 평가한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형제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흐멜니츠키의 존재를 띄우는것으로 보인다. 


a65614aa1f06b3679234254958db343a2c50ae84a41f94f61e8268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여성 저격수로 우크라이나 출신인 류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Pavlichenko, 309명의 독일군을 사살한 여성 저격수)는 젊은 시절 키예프 대학에서 역사학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그녀의 석사논문 주제가 바로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생애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