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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돔 원정 버스가 갑자기 조용해졌을 때였다.
서현은 이어폰을 빼고 창밖을 보며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오늘 마무리 예정 투수는 바로 그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가장 긴장한 사람은 오히려 뒤쪽 자리의 우익수 현민이었다.

서현은 눈치챘다.
늘 시끄럽고 장난치던 남자가 오늘따라 말이 없다.

버스가 숙소 앞에 멈추자, 서현이 먼저 내려 현민 쪽으로 돌아봤다.

“왜 이렇게 말이 없어?”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말투였지만, 현민은 어깨를 움찔했다.

“아니… 그냥. 오늘 네가 마무리라서.”
“그게 왜 네가 긴장해?”
“너 잘 던져야 내가 편하니까.”

대답은 가볍게 했지만, 장난기가 섞여 있던 눈이 서현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서현은 그 시선이 익숙하면서도, 오늘따라 조금 다른 느낌임을 느꼈다.

둘은 같이 호텔 복도를 걸었다.
현민은 갑자기 서서,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건넸다.

“뭐야 이건.”
“너 투구 루틴 분석한 거. 일본 타자들한테 제일 안 맞는 타이밍.”
“너가 이런 걸 왜…?”
“너 오늘 던지는데, 괜히 흔들리는 거 싫어서.”

서현은 말없이 종이를 접어 쥐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현민아, 너 왜 이렇게 나 챙겨?”
“어?”
“요즘… 유난히.”

현민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현아. 너 마운드에 서면… 진짜 눈을 못 떼겠어.”
“왜.”
“멋있어서. 그리고… 위험해 보여서.”
“…너 지금 그거 작업 멘트냐?”
“맞아. 원한다면 더 직접적으로 말해줘?”

서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도쿄 호텔 복도, 아무도 없고, 둘만 서 있었다.

“하지 마.”
서현은 말했지만, 그 표정은 멈추라는 뜻이 아니었다.

현민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숨이 가까워졌다.
긴장감 때문에 손끝이 떨리는 건 서현 쪽이었다.

“서현아.”
“…”
“오늘 이기면…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 있어.”

그 말에 서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기면이 아니라, 던지기 전에 말해.”
“왜?”
“그 말… 들으면 힘날 것 같으니까.”

현민은 미소도 없이, 진짜 감정만 실린 얼굴로 말했다.

“…나, 너 좋아해.”

순간, 복도 공기가 멈춘 듯했다.
서현은 숨을 삼켰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그 말… 오늘 꼭 듣고 싶었어.”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방으로 걸어갔다.
문을 닫기 직전, 서현이 다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현민아.”
“응?”
“오늘… 네가 옆에 있어줘서 좋다.”

문이 닫히는 순간, 현민은 방 안에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본 원정, 한일전, 냉정하고 살벌한 경기.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지금 더 강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둘 사이에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시작이 생겼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고 도쿄돔의 공기는 경기 전부터 이미 뜨거웠다.
한국이 일본을 3–2로 간신히 앞서는 상황.
그리고 9회 말, 두 아웃.
마지막 아웃만 잡으면 승리였다.

마운드 뒤 불펜에서 서현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도쿄돔의 조명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마무리투수 특유의 압박이 있는 순간.
일본 응원석에서 야유가 쏟아지자, 현민은 우익수 자리에서 이를 악물었다.

서현은 포수에게 사인 한 번을 보내고, 천천히 마운드를 밟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외야를 바라봤다.

딱 그 순간—현민과 눈이 마주쳤다.

현민은 말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말했다.

‘괜찮아. 너라면 할수있다.’

서현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경기장에서 보이는 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표정.
하지만 현민은 그걸 분명히 봤다.


일본의 4번 타자.
전날 인터뷰에서 “한국 마무리는 새가슴에 경험이 부족하다”며 서현을 무시하던 그 선수였다.

포수의 사인이 들어온다.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공, 157km 직구 — 스트라이크.
관중석에서 웅성거림이 올라왔다.

두 번째, 변화구.
흔들리지 않고 헛스윙.

그리고 경기장 전체를 삼킨 정적.

“투 스트라이크.”

서현은 숨을 한번 내쉬고, 공을 받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시선은 한 번 더 외야 오른쪽을 향했다.

현민이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던져. 난 네 공 믿어.”

서현은 마지막 공을 던졌다.

바깥쪽 꽉 찬 직구.

스윙— 헛스윙.

삼진. 경기 종료.

도쿄돔이 잠시 얼어붙었다가, 한국 응원석에서 폭발하듯 함성이 터졌다!



선수들은 뛰어나와 서현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축하, 환호, 소리, 카메라…
하지만 서현의 시선은 한 곳만 찾고 있었다.

현민.

우익수에서 전력질주로 뛰어오던 그의 얼굴은 흥분과 안도감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현아!!”

현민이 멈춰 서자마자, 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주변의 소란이 순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숨이 가쁘게 오르는 현민이 말했다.

“진짜… 미쳤다. 너.”

서현은 헬멧을 벗으며 가볍게 웃었다.
“너 때문에 스트라이크를 던진 거야.”

현민은 한 걸음 다가왔다.
경기 종료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둘 사이만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아까 그 말… 기억나?”
“어떤 말.”
“너 좋아한다고 한 거.”

서현은 눈을 내리깔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기억하지.”

현민은 숨을 고르고, 조금 더 가까이 말했다.

“오늘 너 마운드에 서는 거 보는데… 더 확신했어.”
“뭘.”
“나, 진짜로 너한테 빠졌어.”

서현은 말없이 현민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나도 그래.”

현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서현은 장난기 없는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오늘 너 시선 없었으면 나 던지기 힘들었어.”
“진짜?”
“응. 너 바라보는 거… 그게 힘 됐어.”

현민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서현아.”
“왜.”
“우리… 경기 끝났으니까 이제 숨기지 말자.”

서현은 잠시 조용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숨길게. 그리고 사람들이 나 새가슴이라고 말하잖아?“
”아니! 너 새가슴 절대 아니야. 오늘 너가 증명 했잖아!“
”아니야…나 새 가슴 맞아. 내 가슴은 아무도 만진적 없는 새거 맞다고…그러니 너에게 처음을 줄게. 너가 만지면 이제 새 가슴 아니고 헌 가슴이야 이제…“

그 순간, 현민의 신체에 커다란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순간 허벅지에 뭔가가 닿는걸 느낀 서현이 놀라 몸을 떨어트렸지만, 서로의 얼굴엔 같은 표정이 있었다.

이제 둘은 서로를 완전히 인정해버렸다.
한일전보다 더 강렬한 로맨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