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극히 우수한 문자체계이지만, 한국어의 표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발음나는 대로 쓸 수 없다. 그것은 많은 경우 한자(漢字)와의 관련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 이외에도 어형(語形)이 복잡하게 변하는 교착어의 특성상 발생하는 문제로 띄어쓰기도 복잡해진다. 무분별한 한자어의 사용은 수많은 동음이의어를 양산했고, 한글을 표기하면서 초기의 훈민정음 표기법에 있었던 성조(聲調)의 표시를 생략하면서, 그러한 동음이의어는 더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동음이의어를 어느 정도는 줄이고, 어느 정도 발음과 소리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한국어의 발음체계에 맞는 한국어의 고유어를 다시 찾아 쓰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마저 문제이다. 한국어에서 고유어란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민족의 형성기에 지나치게 일찍 외래문화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인 면이 크다. 같은 언어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어가 발음과 표기상의 불일치 문제를 현저히 덜 겪고 있고, 고유어도 한국어에 비해 월등히 많이 남아 쓰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인들이 전반적으로 외래문화의 영향을 덜 받았다는 뜻이다. 전반적으로 지적(知的) 수준이 낮은 무사(武士) 계급이 장악한 역사가 오랜 탓에 오히려 그런 면에서 독립심과 상업과 고유의 문화가 유지되고 발달할 수 있는 요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언어를 기록한 송나라 손목(孫穆)이 쓴 계림유사(鷄林類事)에 나오는 단어들은 현대 한국어와 대단히 유사해, 놀라움마저 안겨 준다. '대야'라는 말도 고려어로 둥글고 넓적한 그릇을 말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거기에서조차 동서남북은 중국어와 같다고 하는 식으로 나온다. 현대의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기록들을 통해, 고유어를 찾아내려 애쓰고는 한다. 이익의 성호사설 등에서 짐작컨대 동쪽을 '새(Sae)'라고 불렀다. 서쪽은 '하늬(Hani)'라고 불렀다. 북쪽은 '되(Doi)'라고 불렀다... 고대어에 대한 연구는 남한의 연구보다 오히려 북한의 연구가 좀 더 힘차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남한의 국어학계라는 것이 일본 학자들의 제자들 위주로 이루어지다 보니, 한민족의 실체를 부정하고 한민족을 내리깎으려는 저의에서 주장되었다고 생각되는 이론들까지 무분별하게 재생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연구에 따르면, 현대 한국어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였다. 즉, 남한 학계의 통설과 반대로 본다. 남한과 북한의 동시적인 기준이 된 서울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연구하다 보면, 신라의 영향은 의외로 미약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는 하지만, 그 지역들에서는 계속해서 부흥운동과 농민들의 란이 일어난다. 200년이 조금 지나 결국 신라는 완전히 이전의 영역으로 지배권도 축소되고, 그나마 결국 옛날 고구려의 영역에서 일어난 고려에게 병합된다. 남한에서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듯한, 고구려의 언어 찾기에도 북한은 적극적인 것 같다. 여기저기 남아 있는 고구려시대의 유물들에 새겨져 있는 한문(그것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다. 우리 말을 풀어 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 좀 더 해석에 적절한 면이 있다)의 연구, 지명(地名), 인명(人名) 등의 연구를 통해, 고구려의 언어가 고려로 이어졌고, 고려의 언어가 현대 한국어로 이어졌다고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들은 그러한 연구를 통해, 고대 한국어에는 'ㄹ(l)' 받침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고, 중국어의 영향을 통해 좀 더 많은 발음이 점차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한민족을 형성한 중요한 갈래 중 하나인 부여족(夫餘族)의 신화에 나오는 '해부루'(Haeburu)란 '해(hae)+불(bul)' 또는 '해(hae)+벌(bul; 京)'일 가능성이 있다. 도대체 고대의 이 민족들은 '형(兄)'을 어떻게 불렀을까? 계림유사에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나온다. 고려인들은 형을 長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북방의 鮮卑(선비)족이 형이나 연장자를 '아간'(Agan)이라고 했다는데, 어쩌면 한국어의 고어에서도 형을 그런 비슷한 발음으로 불렀을지 모른다. 여동생의 경우에는 '나메(Name)'라고 불렀던 것 같다. 친척은 '아ㅿㆍㅁ'(즉, 아즘(Azum) 또는 아짐(Azim) 정도?)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용비어천가를 보면, 용(龍)을 '미르(mir)'라고 말했지만, 고구려의 경우에도 지명을 변경한 것을 볼 때 원래 그렇게 불렀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우산'은 '슈룹(Shurub)'이라고 했었다. '장마비'는 '오란비(Oranbi)'라고 했었다. '부인(婦人)'을 조선시대에는 '안해'(Anhae) 또는 '가시(Gasi)'(각시; Gaksi) 정도로 말했던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부인'과 '여자'를 뜻하는 말이 같았다고 하는데, 계림유사에서는 '漢吟'으로 되어 있어, 중국 송나라 북방 한어(漢語)의 발음이 어떠했을지는 모르지만, '하늠'(Hanum) 정도에 해당하는 말은 조선시대의 기록들에는 나오지 않지만, 남자를 '사나이'(Sanai)라고 한 것에 대비해 볼 때, 여자는 '아나이'(Anai)나 가시나'(Gasina) 또는 '가시내'(Gasinae)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온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농사'는 '녀름'(Nyeorum)이라고 했고, 과일은 '여름(열매)(Yeorum)'라고 했다. 농사꾼은 '재바치'(Jaebachi)라고 했고, 물건 만드는 사람은 '바치(Bachi)', 광대는 '수자이(Sujai)', 좀 더 포괄적으로 기예를 하는 사람은 '고자이(Gojai)'라고 했던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내일을 '하제'(Haje)라고 했었고, 조선시대부터 이미 한자어인 '내일'(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明日'이라고 한다)이라고 쓰게 되었다. 다만, 100을 뜻하는 '온'(On)과 1000을 뜻하는 '즈믄'(Jumun)은 조선시대에도 남아 있었고,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산(山)은 '뫼(Moi)'라고 했고, 강(江)은 '가람'(Garam)이라고 했다. 중국 명나라의 '조선관역어(朝鮮館譯語)'에 보면, 조선에서는 일백(一百)을 '한온'(Hanon)이라고 한다고 했다. 금(金)은 '누른쇠(Nurunsoi)', 은(銀)은 '흰쇠(HInsoi)'라고 했던 것 같다. 성(城)은 '잣(Jat)'이라고 했었다. '누리(Nuri)'란 '세상'이나 '후계자'를 뜻하는 말이었고, 북한에서는 고구려 주몽왕의 아들로서 후계자가 되는 '유리'왕도 고어에서의 발음은 '누리'였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신라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바꾸어 버린 이름들 중에는 아쉬운 이름들도 많다. 차유령(車踰嶺)은 본래 '수레너미재(Sureneomijae)'였고, 석포(石浦)는 '돌개(Dolgae)'였다. 조선초기까지는 '나(Na)'의 겸양어인 '저(Jeo)'가 없었고, 그냥 '나'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조선초기에 쓰였던 '저(Jeo)'란 3인칭으로서의 '자기'의 뜻이었다. 주격조사로는 적어도 문어체(文語體)에서는 'ㅣ'(i)와 '은(eun)'이 주로 쓰였었고, '가(ga)'는 1572년 정철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야(-ya)'나 '~요(-yo)'의 형태는 삼국시대부터 확인된다. http://bbs.enjoyjapan.naver.com/photo/read.php?id=enjoyjapan_13&nid=43368&work=search&st=writer&sw=purunmir&cp=1 http://bbs.enjoyjapan.naver.com/photo/read.php?id=enjoyjapan_13&nid=43369&work=search&st=writer&sw=purunmir&c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