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지명 자료에서 특정한 일본어계 단어를 연상시키는 형태가 등장한다고 해서 일본어계와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된 태도임

저 아래 글을 보니 刀良縣을 일본어 tora와 연결하는 댓글이 있던데,
刀良縣이 등장하는 지명 자료 (道安縣 本刀良縣 景德王改名 今中牟縣)에는 刀良의 의미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설령 刀良를 *toLa로 읽는 것이 맞다고 해도 단순한 CVCV 음절 구조의 2음절어는 어떤 언어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발음만 가지고 어떻게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애초에 비교언어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특정한 의미를 우연히 똑같이 특정한 발음으로 나타낼 확률이 희박하기 때문에
의미가 통하는 단어들의 형태를 비교하면서 과거의 원형을 찾아나간다는 발상이 가능한 거고
여기서 '특정한 의미'로 한정하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뭐 아무 거나 다 비교할 수 있겠지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의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정도는 딱 형태만으로도 일본어계인 걸 인정해 볼 수 있다
같은 기록에서 실제 일본 열도의 일본어 *jama (> yama)도 같은 한자 邪馬로 적었기 때문에 같은 단어일 가능성이 높고
다만 彌烏는 고대 일본어 2음절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1음절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건 彌烏가 CVV이고 (烏가 影母니까), 고대 일본어 이전의 CVV를 고대 일본어는 CV로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임

彌烏邪馬 자체에 대한 논의는 별로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고대 일본의 인명 卑彌呼가 이거랑 비슷하게 CV-CVV여서
뒷부분 彌呼를 고대 일본어 1음절에 대응시켜 卑 + (彌呼)의 총 2음절로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고
일본어의 역사적 (고대부터 중세까지) 표기 연구의 권위자인 Sven Osterkamp 교수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https://twitter.com/cppig1995/status/1306664593410850816 글타래 참조).

그런데 彌呼를 해독하는 데 있어서 呼의 성모(initial)를 무시해도 된다면, 烏와 동음이기 때문에 彌呼 = 彌烏일 수도 있음
사실상 이게 현재로서 彌烏邪馬를 해독하는 데 있어 최선의 선택이고, 이 경우 고대 일본어 mê-yama "여자(인) 산"이 되겠다

이게 일본어적으로 그렇게까지 일반적인 지명은 아니라서 烏를 鳥의 오기로 보고 싶을 수도 있겠다만
뭐 표기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아무튼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와서

지명 자료는 사실 언어의 교체가 일어나도 지명은 그대로일 수 있기 때문에
해당 자료가 기록된 시대의 언어적 상황을 알기 위해 가장 좋은 자료는 아님

진짜 좋은 자료는 사료에 정말 가끔 우연히 등장하는 의미 대응을 포함해서 어떤 명칭이 나타나는 자료지
고대 한반도에 대해서는 신라 초기에 '시림(始林)'의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데
여기서 적어도 고대 신라 지배층의 언어에 있어서는 "시작하다"와 "닭"의 발음이 비슷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일본어계에서는 이런 관계가 성립하지 않지만 고대 한국어에 대해서는 성립했을 가능성이 있지
"병아리"가 후기 중세 한국어로 piywuk인데, 후기 중세 한국어의 y 중 일부는 고대 한국어 *l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고
"시작하다"는 후기 중세 한국어로 pilus-이기 때문에, piywuk의 고대 한국어 형태를 *pil(VC)-Vk로 본다면
'시림(始林)'의 이름 표기를 '계림(鷄林)'으로 바꾸는 기록을 이해하기가 매우 용이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신라는 일본어계 언어가 일정 부분 사용되는 이중 언어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일단 역사 기록에 '왜인'으로 묘사되는 호공(瓠公)의 존재가 일본어계 언어를 사용하는 토착민의 존재를 상징하고 있고
나 개인적으로는 신라 초기의 왕호인 '거서간(居西干)'과 '이사금(尼師今)'을 일본어계 단어로 파악하고 있기도 함


삼한의 고대 지명 자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마한, 진한, 변한을 구성하는 각 국가의 이름도 물론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이지만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이름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있어

우선 '진한'의 '진(辰)'은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국가인 '진국(辰國)'의 이름이나,
마한 목지국의 왕이 가졌다는 삼한 전체를 통솔하는 지배자의 호칭인 '진왕(辰王)'과 같은 글자를 쓸 뿐만 아니라
사실 辰의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이 *(d)źɨr이기 때문에 훗날 신라가 되는 '사로국(斯盧國)'의 *sela와 통하는 부분이 있지

'변한'의 '변(弁)'은 알기 어렵지만 같은 시대 일본의 관명에 많이 나타나는 卑奴 *p{i, e}na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겠다
이 단어는 흔히 "변방"을 의미하는 고대 일본어 pîna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국경의 한(韓)"이라는 의미일 수 있지

'마한'의 '마(馬)'는 가장 까다로운데, 나머지 둘은 CVC이기 때문에 2음절에 대응시킬 수 있는 반면
馬는 상성자라 후기 고대 중국어에서 성문 폐쇄음을 가지고 있기는 했겠지만 그걸로 고대 한국어 2음절에 대응시킬 수는 없으니
오히려 역발상으로 '마한'의 '한(韓)'이 실제로는 다른 둘과 같은 '한(韓)'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이 경우 '마한'은 두 글자를 합쳐서 훗날 고구려의 관명 '막리지' 등에 보이는 '막리(莫離)'와 대응할 가능성이 있지
고대 일본 기록과 종합해서 생각하면 莫離의 고구려어 발음은 *makVL{i, e}였기 때문에
후기 고대 중국어 시점의 발음 전사로는 충분히 馬韓이라는 표기가 나올 수가 있고 그렇다면 '마한'은 "큰 나라"를 의미함

조금 더 후대의 중국 기록에는 마한을 '개마한(蓋馬韓)'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게 믿을 수 있는 표기라면 '마한'도 '진한', '변한'과 마찬가지로 '한(韓)'이라는 명칭 앞에 2음절이 붙은 것이겠으나
蓋馬라는 명칭은 蓋馬大山이라는 한반도 북부의 산악 지대와 연관이 있는 것이고 이는 마한의 영역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후대의 사가들이 한반도 북부의 '개마국(蓋馬國)'과 '마한'을 혼동해 이름을 섞어서 개마한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겠다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면

'조선'과 '소서노'의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은 거의 똑같음 (朝鮮 *ɖau sen, 召西奴 *ɖau se(n) na)
이건 '조선'이 당시의 한국어계 언어의 음차 표기라는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고
음차 표기라는 건 다시 말해 한자 朝의 다른 뜻인 "아침"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얘기가 되지

이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朝에는 두 가지 발음이 있고 ("아침", "조정")
'조선' 할 때의 朝는 "아침"이 아니라 "조정"이라서 심지어 현대 중국어에서도 뻔히 발음을 구분해서 다르게 쓰고 있는데
'조선'이라는 국명이 아침 어쩌고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임


이 글을 쓰다 보니 뭔가 재미있는 떡밥이 하나 더 떠올랐는데 SNS를 통해 선공개하고 여기에는 나중에 쓰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