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벌산군과 이벌지현


'삼국사기' 권35에 실린 지명들 중에는 원래 고구려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던 신라의 급산군(岌山郡)과, 원래 고구려 이벌지현(伊伐支縣)이었던 그 속현 인풍현(鄰豐縣)이 등장합니다. '급벌산군'과 '이벌지현'이라는 이름은 미묘하게 비슷한데, 저는 고등학생이었던 10여 년 전부터 이들 지명에 대해 생각해 왔지만 딱히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저는 보고 말았습니다. '삼국유사'의 진한 6촌에 대한 기록에 있는 '개비산(皆比山)'이라는 글자를요.


무산 대수촌의 촌장 구례마가 내려온 곳을 '이산(伊山)' 또는 '개비산(皆比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산(伊山)'의 다른 이름이 '개비산(皆比山)'이라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개비(皆比)'가 '습비(習比)'를 잘못 적은 것일 수 있지만, 습비부는 해당 전승에서 명활산 고야촌으로부터 유래하므로 무산 대수촌과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산(伊山)'이 '급산(及山)'의 오기가 아닐까요? 제 고대 한국 한자음 추정에서 '급(及)'은 *kep [겝], '개비(皆比)'는 *kepi [게비]인데, 이와 같은 특정한 추정 발음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발음이 비슷함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급(及)'이라는 글자를 '이(伊)'로 잘못 적을 수 있었다면, '이벌지현(伊伐支縣)' 역시 원래 '급벌지현(及伐支縣)'으로서 '급벌산군(及伐山郡)'과 짝이 맞는 이름이었을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벌지현의 이름에 대해 '삼국사기' 권37에는 '자벌지(自伐支)'라고도 한다고 적혀 있는데, 이 또한 발음 대응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자(自)' 또한 '급(及)'의 오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급(及)', '이(伊)', '자(自)'는 흘려썼을 때 그럭저럭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어느 시점에 필사자의 오류로 인해 '급(及)'이 '이(伊)'나 '자(自)' 등으로 잘못 전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안라 걸탁성의 경우


이와 같이 사료에 나타나는 인명이나 지명 등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잘못 전해지는 글자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또다른 예로 '일본서기' 권17에 등장하는 안라국의 '걸탁성(乞乇城)'은 '걸둔성(乞屯城)'의 오기일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해당 기록은 '백제본기(百濟本記)'에서 인용된 것으로, 신해년 (531) 음력 3월에 백제의 군사가 안라로 나아가 걸탁성을 차지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걸탁성의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걸둔성(乞屯城)'의 오기로 볼 경우 이것을 '기전해(旣殿奚)' 또는 '고전해(古殿奚)'로 기록되는 반파국의 인명과 동일한 발음 *keten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파국의 기전해와 함께 등장하는 안라국의 '신이해(辛已奚)'라는 인명이 '사이기국(斯二岐國)'과 통하는 발음이라는 사실에서 보듯, '기전해(旣殿奚)'는 지명 유래의 인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안라국 걸둔성의 이름이 반파국 사람인 기전해의 인명으로 쓰였다면, 타국의 지명을 인명으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해당 지역이 기전해가 태어난 5세기 후반에는 반파국의 영토였다가 6세기에 안라국이 확장하면서 531년 시점에는 안라국의 세력에 편입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걸둔성의 위치는 반파국과 안라국의 중간에 있으면서 백제와도 가까운 지역, 예컨대 현재의 경상남도 의령군 일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