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오부의 이름 등에 나타나는 '노(奴)' 또는 '나(那)'라는 글자가 "땅"이라는 뜻의 고대 한국어 *na [나]이고, '평양' 등의 지명에 쓰인 '양(壤)'이라는 글자와 비류국왕 송양의 이름에 쓰인 '양(讓)' 역시 이 *na [나]를 표기한 것이라는 학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고대 한국어 연구의 상식이었습니다.
중국어사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노(奴)'는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이 *nˤa [나]이고, '나(那)'는 전기 중세 중국어 발음이 na [나]이며, '양(壤)'과 '양(讓)'은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이 각각 *naŋʔ [낭], *naŋh [낭]인데, 고대 한국어에 ㅇ 받침과 같은 발음 *ŋ이 없었다는 통설에 따르면 이들 한자는 모두 *na [나]의 표기자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한자가 표기하는 고대 한국어 단어의 발음을 *na [나]로 추정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매우 합리적이고 무난한 결론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저는 이러한 상식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1) 고구려 왕호의 천(川)과 양(襄/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제9·11·12·13·15대 왕인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그리고 미천왕의 시호의 '천(川)'을 '양(襄/壤)'이라고도 한다는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이른 고국천왕과 동천왕은 '양(襄)', 그리고 중천왕, 서천왕, 미천왕은 '양(壤)'이라는 한자를 사용합니다.
故國川王 或云國襄 ('삼국사기' 권16 고국천왕 즉위 기사)
東川王 或云東襄 ('삼국사기' 권17 동천왕 즉위 기사)
中川王 或云中壤 ('삼국사기' 권17 중천왕 즉위 기사)
西川王 或云西壤 ('삼국사기' 권17 서천왕 즉위 기사)
美川王 一云好壤王 ('삼국사기' 권17 미천왕 즉위 기사)
기존설에 따르면 이 '양(襄/壤)' 역시 *na [나]로 읽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경우 '천(川)'이라는 이표기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대 한국어 지명에 들어가는 '천(川)'이라는 글자는 예컨대 '일본서기' 훈본에서 '웅천(熊川)'을 kumanare [구마나레]로 읽는 데서 보듯이 고대 한국어 *nare [나레]를 표기하는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훈본은 본문보다 성립 시기가 늦으므로 훈본에 등장하는 발음은 본문에 기재된 것에 비해 신뢰성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일본서기' 권9 족중언(足仲彦) 천황 9년 10월 기사에서 신라 왕이 일본에 매년 2차례의 조공을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아마도 가공의 사건) 언급하는 '아리나례(阿利那禮)'라는 강 이름도 '나례(那禮)'로 끝나기 때문에, 전기 고대 한국어에서 "강"을 뜻하는 단어가 *nare [나레]로 발음되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양(襄/壤)'을 *na [나]의 발음으로 보고 "땅"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발음이 다른 *nare [나레]를 끌어다 붙여서 '천(川)'이라는 표기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음차 대신 한자의 의미를 담아 표기하고 싶었다면 후대 고구려 왕들의 시호에서 나타나는 '원(原)'과 같이 "땅"을 뜻하기에 적절한 한자를 선택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원음에 가까운 음차를 원했다면 '나(那)'와 같은 다른 음차자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간단한 설명이 있습니다. 기존설에서 고대 한국어 *na [나]를 표기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노(奴)', '나(那)', '양(襄/壤/讓)'은 사실 *nare [나레]의 제2음절을 생략한 표기라는 것입니다.
고대 한국어의 *r [ㄹ] 발음은, 후한 시기 이후의 중국어에는 일치하는 발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의 소리를 한자로 옮겨적고자 한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줄곧 큰 문제였습니다. '벌'에 해당하는 단어를 (당시에는 완전히 동일한 발음이었을 수도 있는) '불'의 발음으로 옮겨적은 '화(火)'와 같이, 한자의 뜻을 활용한 간접적인 표기가 등장한 것도 이러한 문제와 관련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차 표기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본(㶱)', '평(坪)', '벌(伐)'과 같이 중국어의 -n [ㄴ], -ng [ㅇ], -t [ㄷ] 말음으로 *r [ㄹ]의 발음을 대신하기도 했고 (현대 한국 한자음의 ㄹ 받침은 원래 중국어의 -t 발음에 대응합니다), '소부리(所夫里)'를 '사비(泗沘)'로, '이질부례(伊叱夫禮)'를 '이사부(異斯夫)'로 적듯이 *r [ㄹ] 발음이 들어가는 부분을 그냥 생략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강"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 *nare [나레] 역시 뒷부분을 생략하여 '노(奴)', '나(那)', '양(襄/壤/讓)' 등으로 표기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에서는 장지명을 시호로 사용했고, 왕을 강에 묻을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가 '인천(仁川)'과 같이 '천(川)'이 들어가는 지명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게 고대에도 무슨무슨 강이라는 식의 이름이 붙은 지역은 얼마든지 존재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있어서 "강"을 뜻하는 '천(川)'과 같은 한자 대신 '노(奴)', '나(那)', '양(襄/壤/讓)' 등의 음차 표기를 사용한다면, 어떤 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강 근처에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어 편리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반도에서 이러한 표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똑같은 고대 한국어를 한자로 적는 표기법의 차이로, '웅진(熊津)'의 예에서 보듯이 '진(津)'과 같은 다른 한자를 이용해 같은 단어를 표기한 것 같습니다.
기존설에 의해 상정되었던 "땅"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 *na [나]는, 다른 고대 한국어 사용 지역의 지명, 예를 들면 '삼국지'에 기록된 삼한 소국명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마한 54국 중에는 '나'의 발음으로 끝나는 이름이 없고, 그나마 일치하는 것은 변진의 악노국(樂奴國) 단 하나뿐인데, 고대 한국어에 *r로 시작하는 단어가 없었다고 여겨지므로, '악노(樂奴)' 즉 *rˤawk nˤa [라욱나]라는 음차 표기는 와전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r 발음으로 시작하는 소국명은 마한 임소반국과 변진 악노국의 2개가 있습니다). 새로운 설에서는 *na [나]라는 단어가 사실 존재하지 않았고 "강"을 뜻하는 *nare [나레]의 이표기임에 불과하다고 보게 되므로, 삼한 소국명에 *na [나]로 끝나는 이름이 없는 등의 사실은 필연적인 결과가 됩니다. "강"을 뜻하는 *nare [나레] 자체는 아마도 후기 고대 중국어 *na rˤə pe re [나러베레]로 발음되었을 마한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의 이름 앞부분에 해당할 것입니다.
(2) 양(襄/壤/讓) 표기의 원류
'양(襄/壤/讓)' 표기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요? '삼국사기'를 보면 고국천왕을 국양왕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은 있지만 반대로 고국양왕을 국천왕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또한 명확한 근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미천왕(美川王)을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에서 "좋다"라는 단어를 '호(好)'로 적는 점은 광개토왕의 정식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호(好)'와 표기법상 공통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천(川)'이 들어가는 '미천왕'보다 '양(壤)'이 들어가는 '호양왕'의 표기가 후대의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천(川)'이 '양(襄/壤/讓)'보다 오래된 표기이고, '양(襄/壤/讓)' 표기는 고국원왕과 고국양왕의 재위기 사이에 도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동천왕 대의 평양 천도 기사에는 '평양(平壤)'이라는 '양(襄/壤/讓)' 표기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당대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아니라는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멸망 이후 '삼국사기' 또는 '삼국사기'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참고된 어떤 사서의 편찬자가 지명의 다양한 이표기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송양(松讓)'이라는 인명이 등장하는 고구려 건국 설화의 활쏘기 대결에 대해서도 4세기경의 창작일 가능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약간 이야기가 옆으로 빠지는 것 같지만 송양의 이야기는 결말에 '다물(多勿)'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단어는 광개토왕의 이름 '담덕(談德)'의 앞부분과 발음이 같습니다. 만약 담덕(談德)이 다물(多勿)과 유관하다면 영토를 얻는다는 뜻이므로 광개토왕의 시호 일부분인 '광개토경(廣開土境)'에 대응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광개토왕은 이름부터가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왕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진 셈이 됩니다. 광개토왕릉비의 명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태어난 것은 서기 374년이 되므로,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 (371)한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소수림왕 재위기에 고구려가 내부 재정비를 위해 많은 노력을 거쳤음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건국 설화를 정비한 일이나 광개토왕의 이름 또한 그러한 시대상과 연관지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오자면, 저는 '양(襄/壤/讓)'의 표기가 대방군 표기법의 영향 아래 성립했다고 생각합니다.
대방군은 고대 한국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독자적인 표기법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방군의 표기법은 주변국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대방군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3세기 중반에 재위한 신라의 조분(助賁) 이사금과 첨해(沾解) 이사금의 이름이 대방군식 표기법을 사용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과 '첨'은 대방군식 표기법의 표지라고도 할 수 있는 글자들입니다). 신라 표기법의 '탁(啄)'이라는 글자 역시 마한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의 이름 표기에 사용된 '탁(涿)'과의 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삼한 지역과 달리 대방군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므로, 대방군이 존속하던 당시에는 대방군 표기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방군 멸망 이후의 인구 유입을 통한 영향은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방군의 유민을 흔히 백제의 발전과 연결시켜 생각하지만, 대방군을 공격해 점령한 당사자가 고구려라는 사실과, 대방군에서 문자 기록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고구려에게 있어서도 유용한 인적 자원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구려 또한 이들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한 54국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원양국(爰襄國)'의 이름에는 '양(襄)'이라는 글자가 들어갑니다. 이 또한 *na [나] 또는 *nare [나레]의 표기일 수 있고, 특히 '원(爰)'이 -n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양(襄)'이라는 한자는 사실 *saŋ > sjang [상]으로 읽혀야 하는 한자인데 (현대 한국 한자음은 유추에 의한 것입니다), 만약 대방군과 고구려 양쪽에서 이것이 *naŋ > nyang [낭] 발음의 표기자로 취급되었다면 모종의 접점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爰)'으로 시작하는 나머지 하나의 국명인 '원지국(爰池國)'에서 '지(池)' *dre라는 한자가 마한 노람국(怒藍國) *nˤaʔ rˤam과 진한 여담국(如湛國) *na dˤrəmʔ의 대응에서 보듯 고대 한국어 *r을 후기 고대 중국어 *dr-로서 나타낸 것이라면, 원양국(爰襄國) *ɦwan naŋ과 원지국(爰池國) *ɦwan dre이 공통적으로 *wa-nare [와나레]라는 고대 한국어 발음을 표기하고 있을 가능성까지도 생각할 수 있어서, 대방군식 표기에서 이미 '양(襄)'이 *nare [나레]로 읽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낙랑군의 현 이름 중에 *-ŋ [ㅇ]으로 끝나는 것이 많은 점 등을 고려하면 고대 한국어의 *r [ㄹ] 발음을 -ng [ㅇ]로 바꿔 적는 표기 방식은 전한 시대에 이미 성립했을 수 있고, 앞서 언급한 '벌'이라는 단어에 대한 '본(㶱)', '평(坪)', '벌(伐)' 가운데 '평(坪)'이 대방군 표기법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백제의 지명에서만 나타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양(襄/壤/讓)'의 용법이 대방군의 흔적일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壤)'은 압록수 이북의 고구려 지명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고구려 지명 이외에 삼국 시대 초기의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신라의 '구양(狗壤)'이나 백제의 '주양(走壤)'이 있는데, '구(狗)'와 '주(走)'는 모두 '삼국지'의 삼한 소국명 표기에 사용되는 글자라는 점 또한 '양(壤)'을 사용한 고대 한국어 지명 표기의 원류가 대방군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3) 정리
3세기의 고구려인들은 "강"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 *nare [나레]가 강이 아니라 지역의 명칭을 나타내는 경우 후기 고대 중국어에 기반한 음차 표기를 통해 '노(奴)'라는 한자로 적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매장지에 이러한 지명이 들어가는 경우에 차마 왕의 시호에 '노(奴)'라는 글자를 넣을 수는 없으므로 뜻을 이용해 '천(川)'으로 적었을 것입니다.
4세기 초 대방군 점령 이후 대방군식 표기법의 일부로서 *na [나] 또는 *nare [나레]를 '양(襄/壤/讓)'으로 적는 방법이 고구려에도 들어와, 이때까지 '천(川)'으로 표기되었던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미천왕의 시호에 대해 '양(襄/壤)'을 사용하는 다른 표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또한 고국양왕의 경우 처음부터 '천(川)'을 사용하지 않고 '양(壤)'으로만 적었습니다.
(4) 여담
고국천왕과 동천왕은 '양(襄)'을 사용하고 그 이후의 왕은 '양(壤)'을 사용하는 것이 우연이거나 후대의 사서 편찬자의 오기에 의해 빚어진 결과가 아니라면, '양(襄)'이라는 글자의 용례가 백제나 신라 등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양(襄)'이 원래 낙랑군식 표기법이고 '양(壤)'은 낙랑군에서 대방군이 분리된 이후 대방군에서 수정된 표기법이라는 식으로 (즉 3세기 중반에 고구려가 낙랑군을 통해 한 차례 영향을 받고 4세기에 대방군 유민으로부터 다시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설명해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나치게 번거로운 설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가능성으로는 원래 대방군식 표기법이 '양(襄)'이었고, 이 한자의 중국어 원음이 *naŋ > nyang [낭]이 아니라 *saŋ > sjang [상]임을 깨달은 고대 한국어 화자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이를 '양(壤)'으로 수정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고국천왕과 동천왕의 시호 이표기에 쓰인 '양(襄)'은 미처 수정되지 않은 옛 표기의 흔적인 것이 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