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예전에 '거칠부(居柒夫)'라는 이름의 '칠(柒)'이 ㅈ 계열 (편의상 Ts, Tsr-을 통칭)의 파찰음인 반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구지포례(久遲布禮)'의 '지(遲)'는 ㄷ 계열 (편의상 T-, Tr-을 통칭)의 파열음이므로 구지포례는 거칠부와 같은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고대 한국어의 한자음이 당시 그 한자의 중국어 발음을 규칙적으로 반영한다는 전제 하에는 굉장히 유효한 주장입니다만,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 안타까운 실패를 저는 몇 가지 새로운 발견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1) 거칠부는 어떻게 구지포례와 대응하는가?
원래 '칠(柒)'은 ㅈ 계열이므로 ㄷ 계열의 '지(遲)'와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칠(柒)'이 ㄷ 계열이었다고 보면, 백제의 상칠현(上柒縣)이 경덕왕에 의해 ㄷ 계열의 '질(質)'을 가진 상질현(尙質縣)으로 개명된 기록 ('삼국사기' 권36 古阜郡)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오늘날의 경상북도 의성군인 '칠파화현(柒巴火縣)' 위치에 고려 시대에 존재한 역의 이름이 왜 '철파역(鐵波驛)'인지도 ('고려사' 권82) 알 수 있습니다. '철(鐵)' 역시 ㄷ 계열입니다.
제가 상칠현(上柒縣)의 경우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칠(柒)'이 ㄷ 계열의 특수한 용법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못한 이유는 경덕왕이 칠파화현을 '진보현(真寶縣)'으로 개칭했다는 사실에 속았기 (?) 때문입니다. '진(真)'은 ㅈ 계열이므로 자연스럽게 '칠(柒)' 또한 (원래 중국어 발음에서 그렇듯이) ㅈ 계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제의 진현현(真峴縣)이 진령현(鎮嶺縣)으로 개칭되었다는 점 ('삼국사기' 권36 黃山郡)을 참고하면 당시에 '진(鎮)'과 '진(真)'이 같은 발음으로 인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진(真)'과는 달리 '진(鎮)'은 ㄷ 계열입니다. 이와 같이 '진(鎮)'과 '진(真)'의 공통된 발음을 ㄷ 계열로 간주한다면, 진현현(真峴縣)을 정현현(貞峴縣)이라고도 한다는 것이 단순히 글자 모양의 유사함에서 비롯된 오류가 아닐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정(貞)'은 ㄷ 계열이고, -ng [ㅇ]가 *r [ㄹ] 표기에 쓰였다면 '진(鎮)'과 같은 발음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상칠현(上柒縣)'을 '상질현(尙質縣)'으로 개칭한 것은 '칠(柒)'을 당시 한자음으로 동음이었던 '질(質)'로 교체한 것이고, '칠파화현(柒巴火縣)'을 '진보현(真寶縣)'으로 개칭한 것은 '칠(柒)'을 동음의 '진(真/鎮)'으로 교체하고 두 번째 글자 '파(巴)' 또는 세 번째 글자 '화(火)' ("불"이라는 뜻으로 읽는) 중 하나를 선택해 그 발음을 '보(寶)'로 새롭게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규칙 하에서 거칠부의 이름에 들어가는 '칠(柒)' 또한 '지(遲)'와 통하는 발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칠(柒)'을 ㄷ 계열로 읽는 것은 원래의 한자음과는 다른 백제와 신라의 독자적인 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황양현(荒壤縣)이 원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었다는 기록 ('삼국사기' 권35 漢陽郡)을 보더라도, 거칠부의 이름 이표기 '황종(荒宗)'에 나타나는 '황(荒)'이라는 글자는 고대 한국어에서 '골의(骨衣)' 즉 *kote [고데]로 읽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kote [고데]는 제 재구에 따른 예시 발음이지만, 굳이 제 재구가 아니라 그 어떤 재구 체계를 적용하더라도 '골의(骨衣)'에서 ㄷ이나 ㄹ 발음이 나오면 나왔지 ㅈ이 나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칠부'의 '칠(柒)'을 ㅈ 계열로 보는 관점에서는 고대 한국어에서 ㄷ과 ㅈ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식으로밖에 주장할 수 없지만, 우리는 '칠(柒)'이 ㄷ 계열로 읽히는 한자음을 상정하여 '거칠(居柒)'과 '골의(骨衣)'를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후기 중세 한국어 (15세기)의 '거츨다'나 현대 한국어의 '거칠다'에 거칠부의 이름과 비슷한 ㅊ 발음이 들어가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세기 초 고려의 언어를 기록한 '계림유사'에서도 격음 ㅆ, ㅊ, ㅋ, ㅌ, ㅍ의 발음은 아직 형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신라 시대에는 ㅊ 발음이 존재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계림유사'를 보면 '(크기가) 큰'은 黑根 ?[흐근], '(글을) 쓸'은 核薩 ?[흐설]과 같이 ㅋ = ㅎ + ㄱ, 그리고 ㅆ = ㅎ + ㅅ의 기원적 형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보면 '거츨다'라는 단어는 고대 한국어의 *kote [고데] 뒤에 무언가가 더 붙어서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고대 한국어 시기 이후의 ㄷ 계열에서 ㅈ 계열로의 변화와 관련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치성화현(雉省火縣)이 해안현(解顔縣)으로 개칭된 것 ('삼국사기' 권34 獐山郡)에서 '해안(解顔)'을 "얼굴을 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치성(雉省)'을 후기 중세 한국어의 cuz "모습"에 대응하는 단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치(雉)' 역시 ㄷ 계열이므로 ㄷ 계열에서 ㅈ으로의 변화 사례인 셈인데, 이러한 추정이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어느 정도 참고가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2) 음즙벌국의 경우
거칠부의 이름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에서는 '칠(柒)' 대신 '칠(⿰木七)'이라는 글자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柒을 구성하는 삼수변(氵)과 성부 '칠(七)', 그리고 아래쪽의 '목(木)'이라는 세 요소 중 삼수변을 버리고 나머지 둘을 재조합해서 만든 약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칠(柒)'이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긴 한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굳이 약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시 고대 한국어 한자음에서 '칠(柒)'의 발음이 원래 중국어 발음과 다르다는 점을 당시 신라 사람들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약자의 가능성은 신라가 초창기에 합병한 소국 '음즙벌국(音汁伐國)'의 이름을 생각하면 더욱 재미있어집니다. 음즙벌국의 이름은 '삼국유사'에는 '음질국(音質國)'으로 적혀 있는데, 딱 봐도 '즙(汁)'과 '질(質)'은 대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즙(汁)'이 사실 '칠(⿰氵七)'이라는 약자라면 이러한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백제 '상칠현(上柒縣)'을 경덕왕이 '상질현(尙質縣)'으로 개칭한 예에서 '칠(柒)'과 '질(質)'이 통한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의 유일한 문제점은 '칠(⿰氵七)'이라는 약자가 다른 고대 한국어 문헌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겠습니다만, '칠(⿰木七)'의 존재는 마운령비를 통해 확인되고 있고, '칠(柒)'을 마운령비의 '칠(⿰木七)'로 축약하는 과정이 복잡한 분해와 재조립을 필요로 하는 데 반해 제가 상정하는 '칠(⿰氵七)'은 '칠(柒)'의 아래쪽 부분을 생략하기만 하면 뚝딱 나오는 형태이기 때문에, '칠(⿰木七)'이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 이상 '칠(⿰氵七)'이 존재하지 않았을 이유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삼국사기'에 전하는 '음즙벌국(音汁伐國)'이라는 이름이 '음칠벌국(音柒伐國)'의 오기라고 추정합니다. '칠(⿰氵七)'이라는 약자의 존재를 몰랐던 필사자가 이것을 '즙(汁)'으로 고쳐 적었을 것입니다.
저거 칠 괄호 뒤에 있는 거 왜 지원이 안 되냐. 무슨 폰트 다운로드해야 됨?
점선이 표시된다면 정상임. IDS (ideographic description sequence)라고 하는데 그냥 저거 보고 점선 모양대로 머릿속에서 그 뒤에 있는 글자를 합쳐서 글자 모양을 상상하면 됨.
ㅇ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