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사전의 네임밸류 - 고야왕의 옥편
孤藍居士(221.146)
2004-12-1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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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일본에서 발견된 원본 <옥편>의 사본 잔권, '平'자조.
하: 송대에 진팽년 등에 의해 개수된 <대광익회옥편> '平'자조.
한국에서는 한자 자전을 '옥편(玉篇)'이라 부르오. 중국의 '자전(字典)'이나, 근대 일본의 '한화사전(漢和辭典)'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한국만의 독특한 명칭이외다. 그러면 한국만이 유달리 왜 이렇게 한자 사전을 특이하게 부르는 것이겠소? 여기에는 이유가 있소이다. 본래 <옥편>이란, 남조 양나라의 고야왕(顧野王)이 만든 자전이었던 것이오.
동진 이후 남조에 세 번째로 들어선 왕조인 양나라의 개국군주 무제(武帝) 때는 학문과 문화가 대단히 번성한 시기이오. 그 유명한 주흥사의 <천자문>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 무제 치하에서였고, 또한 무제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인도에서 막 도착한 보리달마와 대화를 했다고도 하오. 그리고 심약(沈約)과 같은 대문인들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소. 이러한 시기적 상황하에서 또 하나의 대 학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고야왕이오.
고야왕은 특히 문자에 능통하여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의 저서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30권으로 이루어진 자서, <옥편(玉篇)>이었소. <옥편>은 <설문해자>의 부수체계를 따라 540개의 부수로 이루어졌으며, 글자 밑에 주음과 함께 방대한 용례와 주석을 병기한 것이 특징이었소. 오늘날로 치면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의 <대한화사전>에 필적할만한 대작이었소이다. <옥편>은 얼마 안 가서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자전이 되었으며,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 그리고 일본에까지 널리 퍼져 그 유명세를 떨쳤소. 현재 한국에서 자전을 <옥편>이라 칭하는 것은 당시의 이 책이 가졌던 네임밸류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소이다.
그러나, <옥편>의 그 방대한 주석은 이것이 실용적인 자전으로 계속 사용되기에 걸림돌이 되었소. 그래서 당대 말부터는 <옥편>을 고쳐서 쓰는 사람이 등장하였으며, 송대에 이르러서는 진팽년(陳彭年) 등이 칙명을 받아 <옥편>의 수록 자수를 늘리고 주석을 축소하여 대대적으로 뜯어고쳤소이다. 이것은 소위 <대광익회옥편(大廣益會玉篇)>이라 하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옥편은 이것이오. 그러나 이 일은 정말이지 개악(改惡)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소.
진팽년 등은 <옥편>을 개정하면서 그 풍부한 주석을 깡그리 없애버렸소. 바로 이 글의 짤방이 그러한 것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소이다. 위에 있는 것은 견당사로 갔던 일본사람들이 <옥편>의 일부를 필사하여 일본에 들여온 것이오. 반면 아래에 있는 것은 진팽년이 손을 댄 후의 <옥편>이외다. 대단히 풍부했던 주석이 거의 대부분 사라졌음을 알 수 있소. 그 뿐만이 아니라, 송대의 발음에 맞지 않는 고야왕의 발음 표기를 송대 발음에 맞도록 마구 개정하여 오늘날의 <대광익회옥편>에서는 옛날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소. 다만 20세기 초에 중국 학자 뤄전위(羅振玉)가 일본에서 옛 원본 <옥편>의 사본 일부를 발견하여 그 때의 모습을 일부나마 볼 수 있소이다.
배고파서 글이 안들어오오.. ㅜ.ㅜ
어찌하여... 저녁 좀 드시지.
이 무제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고구려 승려 이름이 갑자기 기억 안나는구료.. 뭐였더라
승랑. 승랑이오. 이에대해 아는바 있으시오?
들은 바가 없소.
가르침은 아니고 승랑의 영향을 받아 삼보를 믿으며 성실론을 공부했던 무제가 대승으로 개종하여 대품반야경의 소를 지었다고 하는구료
요즘 한국에서 나온 옥편은 죄다 강희자전을 참고로 했다고 나와 있더구려....
고려대부터 조선 중기 무렵까지는 '대광익회옥편'이 주류였고, 청대 강희자전이 성립되자 그 쪽으로 옮겨간 것으로 아오. 옥편의 540개 부수체계는 검자에 애로사항이 많았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