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생각하시나요들 .....이성에 바탕을 둔 토론이나 설득도 기득권 세력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토론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보일 때조차 그것은 부자유스럽고 불평등하다. 토론과 설득을 구성하는 말 자체가 반대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공정한 조건을 바로잡겠다는 생각 자체도 이미 길든 것일 수 있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시인을 예로 들며 언어 자체의 불평등을 지적한다. 시인이 기존 사회의 규칙(작품의 조재나 서술 방식, 문법)을 따라야 한다면 그는 자신은 자유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규칙을 깨고 자유를 찾으려는 시인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들은 법의 처벌을 받거나 정신병원에 수감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될 것이다. 이미 한국 사회도 마광수, 장정일, 이현세 같은 작가들을 재판정에 세운 바 있고, 토론과 설득 이전에 기성 사회의 규칙을 개입시켜 검열과 억압으로 대응하곤 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지배자의, 아버지의, 광고주의 언어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도 그런 문제를 지적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언어의 장 속에서 움직인다. 그 장의 ‘구조’는 사회적 차이의 체계와 관련되어 있고, 행위자는 구조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구조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행위자는 전략을 고려하고 성찰하지만 구조화된 언어의 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부르디외는 “모든 언어 실천은 정당한 실천, 곧 지배자의 실천을 척도로 해서 측정된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상징 권력’이리고 불렀다. 상징 권력은 긴 시간과 느린 습득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작동한다. 체제의 규칙은 우리 속에 내면화되어 있다. 그런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저항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숨겨진 규칙을 드러내고 극복할 때 사회를 바꿀 수 있다. 변화의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혁명에는 육법전서가 없다. 출처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 하승우 (P.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