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잠깐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 건데요. 다시 한 번 그때의 기억을 이곳에 불러오기 해 봅니다.
\'X-없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X-없다\'의 형태가 어떤 경우에는 한 단어이고 어떤 경우에는 구(phrase)더군요.^^
ㄱ) 보잘것없다, 물샐틈없다: 한 단어.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
ㄴ) 부끄럼 없다, 거리낌 없다: 구. 띄어써야 한다.
왜 (ㄱ)은 한 단어로 보고 붙여쓰고, (ㄴ)은 구로 보고 띄어써야 할까요.
그 기준이 뭘까요?^^
제 생각에 어떤 뚜렷한 기준이나 이유가 있다기보다도 그냥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한 단어처럼 인식되는 경우
한 단어로 인정한 것 같은데요. 음... 근데 그렇다면 그 기준이 좀 모호하다는 생각, 자의적이라는 생각,
따라서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부끄럼없이\'나 \'거리낌없이\'가
더 자연스러울 수 있을 테니까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저의 추측 #1
\'보잘것없다\'와 \'물샐틈없다\'는 한 단어이다. 이는 \'없다\'를 떼어놓고 봤을 때 \'보잘것\'이나 \'물샐틈\'이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즉 \'보잘것+없다\', \'물샐틈+없다\'의 파생어가 아니다. \'보잘것\'과 \'물샐틈\'은 사전에 없으므로
이들만을 따로 독립해서 떼어놓을 수 없다. 반면 구이므로 띄어써야 하는 \'부끄럼 없다\'와 \'거리낌 없다\'에서
\'부끄럼\'과 \'거리낌\'은 사전에 올라와 있다. 단어로 인정한다는 얘기다. 이것이 단어로 보는가 구로 보는가,
즉 붙여 쓰는가 띄어쓰는가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저의 추측 #2
더욱이 \'~보잘것\'이나 \'~물샐틈\'으로 끝나는 구, 절, 문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걔 참 보잘것.
*저 욕조 구멍난 데 물샐틈.
이럴 수 없다는 얘기다. \'보잘것\'과 \'물샐틈\'은 반드시! 어떠한 경우라도! 그 뒤에 \'없다\'라는 말이 와야한다.
\'있다\'도 올 수 없고 반드시 \'없다\'만 올 수 있는 것 같다. 즉 \'없다\'라는 성분을 반드시 요구한다.
만약 뒤에 \'없다\'가 오지 않으면, 그 형태는 쓰이지 않으며 상당히 불완전하다.
어떤 성분을 반드시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긴밀한 결속력이 있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없다\'가 결합된 형태로 굳어진 것이 아닐까.
반면 \'부끄럼\'과 \'거리낌\'은 아래와 같이 사용이 가능하다.
*그것 때문에 진짜 부끄럼(본딧말: 부끄러움).
*이상하게 자꾸 거리낌.
저의 추측 #3
\'부끄럼\'과 \'거리낌\'은 원형이 있다. \'부끄럽다\'와 \'거리끼다\'
그러나 \'보잘것\'과 \'물샐틈\'은 원형이 없다. *보잘거다? *물샐트다?
결론.
예가 적어서 반례가 발견될지 모르겠으나, 일단은 분명한 차이가 발견된다.
일단 어원에서 본다면 \'보잘 것\'은 \'보자고 할 만한 것\'의 준말이겠지요. 사례를 확보해야겠지만, 가설적으로 국어 발달사에서 \'보자고 할 만한 것이 있다\'는 표현은 충분히 개연성 있어 보입니다. \'물샐틈\' 역시 \'덩어리 진 큰 물체가 새어나갈 구멍이 있다\'의 반대 개념으로 \'덩어리도 안 진 유체인 물조차도 새어나갈 틈이 없다\' 같은 개념적 대립 쌍으로 존재하였을 국어사적 발달 단계를 가정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보다는 몇 가지 생각거리를 드리고 싶습니다. 띄어쓰기가 자의적이라는 윤슬님의 인상은 옳다고 봅니다. 그것이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처음 개인적으로 절감하는 순간은 깨달음 내지 눈뜨기의 체험으로서 역시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나 독일어의 예를 찾아보면 제약 없는 자유로운 단어의 조합구 (freely combined phrase; 혹은 단순히 free combination) 단계와 그것이 비교적 패턴성을 띄고 특정 순열이 기타 순열에 비하여 선호되는 어휘적 연어 (lexical colloca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강한 결합으로서 고정된 관용구를 형성하는 연어로 (idiomatic-phrasal collocation) 발전하지요.
첫 단계에서는 띄어쓰기가 철저하게 지켜지고, 중간 단계에서는 띄어쓰기가 점차 불안정해지지요. 그래서 점차 높아지는 빈도로 연철(띄어쓰기 안 하고 붙여 쓰기)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요(영어/독일어). 때로는 이 단계에서 합성어/복합어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러나 아직은 한 단어로 연철하기는 불편함을 인정하기 위하여, 띄어쓰기 대신에 하이픈을 삽입하는 관행을 쓰기도 합니다 (제한적 위치에 영어 합성 형용사가 나올 때). 마지막 단계에서는 영어는 붙여 쓰기로 고정시키기도 하지만, 끝까지 분철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특히 구성 단어가 다른 조합에서도 쓰일 경우 분철을 유지하는 명분이 성립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요. 독일어의 관행은 비교적 연철을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하는 모습을 흔히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자의적이라 함은 개인의 자의성보다는 (언제나 이 요소가 개입하여 언어를 생산적, 창조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적 공약-합의라는 수준에서의 자의성 역시 고려한다면 (소쉬르적 의미에서의 언어 어휘의 자의성) 거부하거나 그것이 다른 추론의 근거가 돼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구체적 사례를 이용한 논증 방식에서 비평을 한다면, 명사형의 비교로서 동사형 어휘~어구의 문법적 타당성을 논하는 것은 (1) 문법적/논리적으로 비약 내지는 어그러짐이 있다고 보고, (2) 동사에서 파생하여 조어한 명사형은 나름대로 분리시켜서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하고 싶군요.
정정 : 비교로서 > 비교로써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숙독 완료했스므니당 :)
보잘 것, 물 샐 틈, 이건 원래부터 관형어+명사 꼴인데 부끄럼, 거리낌은 동사의 명사형이라는 차이가 있고요. 제 생각엔 저 단어들이, 쓰이는 상황과 직접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한 단어인지 아니면 구인지가 나뉘는 게 아닌가 싶네요. 보잘것없다는 것은 흔히 하찮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실제 누가 그 대상을 보자고 청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보잘것의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생기고, 마찬가지로 물샐틈 역시 실제로 물이 새는 상황에서만 쓰지는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본래 의미와 차이가 나니까 관용적인 의미로써 간주하는 게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쳐도 띄어쓰기 규정 자체가 너무 복잡한 건 사실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