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은 모든 한자를 명사와 동사 또는 형용사로 두루 쓴다. 동사로 쓰는 글자를 명사로 쓰면서 물건에도 붙이고 사람에게도 붙여 다양하게 활용한다. 예컨대 '新'은 본래 '새' 또는 '새로운'의 뜻을 기본으로 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나 '새로' '새롭게' 같은 부사로도 쓰고, '처음', '새로움', '새 것', '새로운 일' 등의 뜻을 가진 명사로 쓰기도 하며, '새로워지다', '새롭게 하다', '새롭게 고치다' 등의 뜻을 가진 자동사와 타동사로도 쓴다. 이처럼 한 글자를 품사를 넘나들며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 낱말을 활용하여 다양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이에 비하여 우리말 '새', '새로운'은 관형사, 형용사, 부사로 쓰일 때마다 모양을 바꾸지 않
으면 안된다. 관형사로 쓰일 때에는 '새', 형용사로 승리 때에는 '새롭다'로 바뀌며, 부사로
쓰일 때에는 '새로이'가 된다. 한국어가 교착어라는 성격 때문에 문법적인 기능을 하기 위해
서는 뒤에 그런 역할을 하는 기능이나 형태소가 붙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낱말이 다
른 낱말과 어울려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된다. 한자의 신조어와
한국어의 신조어를 비교해 보자.
한자어 한국어 한자어 한국어
新語 새 말 新進 새로 나옴
新聞 새 소식 新入 새로 듦
新婚 새 혼인 更新 새로 고침
新出 새로 남 最新 가장 새로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자어 '新'은 어디에 붙어도 자연스럽게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
는데, 우리말 '새'는 그 기능에 따라서 형태를 바꾸면서 문법적인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다
른 말과 쉽게 어울려 새 단어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말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말도 접두사나 접미사가 있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고, 두 낱말이 어울리는 경우에도 꼭 문법적인 구조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던 것은 아니
다. 많은 새로운 낱말들이 형태소 간의 결합으로 생산되었다.
<보기 1>
접두사로 만든 새 낱말 접미사로 만든 새 낱말
풋고추 자랑스럽다
햇과일 둥그스름하다
치감다 악착빼기
빗보다 점박이
<보기 2>
돌보다(돌+보), 감돌다(감+돌), 걷잡다(걷+잡), 쓰다듬다(쓸+다듬), 섞사귀다(섞+사귀),
검푸르다(검+푸르), 늦되다(늦+되), 얕보다(얕+보), 노라발갛다(노랗+발갛)
<보기1>에 든 낱말들은 접두사나 접미사를 이용해 새로운 낱말을 만든 경우이다. 한자에서
는 이런 접두사나 접미사를 별도로 두지 않고 모든 낱말을 때로는 접두사적으로 때로는 접
미사적으로 쓰지만 우리말에는 이런 기능을 가진 형태소가 엄연히 있어서 새로운 말을 만
들 때에 유용하게 쓰인다. 따라서 우리말 어휘를 늘리기 위해서는 접두사나 접미사를 다양
하게 확보하여 이를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자어를 접두사나 접미사로 활용하는 경
우가 많은 것도 우리말 조어 능력을 증대시키는 데 매우 좋은 방법이고, 가능하면 그 밖의
언어에서 접두사나 접미사로 활용할 만한 것들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보기2>에 든 낱말들은 모두 동사나 형용사 둘이 어울려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것들은
문법적으로 생각한다면 마땅히 기능어를 동반하게 하여 아래 제시한 형태로 어울려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돌아 보다, 감아 돌다, 걷어 잡다, 쓸고 다듬다, 섞어 사귀다
검고 푸르다, 늦게 되다, 얕게 보다, 노랗고 발갛다
그러나 이렇게 쓴다면 새로운 단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기능어를 생략하고 <보기2>처
럼 형태소와 형태소가 직접 만나도록 하여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국어에도 이런
비문법적인 조어법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가 이런 조어법을 활용하여 폭넓게 새 낱말을 만
들어 내지 못한 무능을 낫할지언정 국어의 조어력을 탓할 일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전에 벌어진 '먹거리' 논쟁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어
떤 분이 '음식(飮食)'은 한자어니 우리말로 '먹거리'를 쓰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
일부 국어학자를 비롯한 상당히 유식한 분들이 '먹거리'는 조어법에 맞지 않으므로 '먹을 거
리'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먹거리'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쓰이는 단어로 한정되
었고 국어사전에는 아직 오르지 못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먹―거리[명사] ‘먹
을거리’의 잘못 /으로 나옴 ) 이 논쟁을 검토하면서 우리가 우리말에 얼마나 불필요하게
엄격한 잣대를 휘두루고 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먹거리'가 틀린 말이고 '먹을 거리'로 써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예를 든
다. '쓸 거리', '마실 거리', '싸울 거리', '볼 거리', '입을 거리' 처럼 동사는 관형사형 어미 '~
ㄹ/~을' 없이 어간이 곧바로 명사에 붙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말은 교착어이기 때문에
동사나 형용사의 어간은 반드시 어미의 활용을 통해서 문법적인 기능을 하게 된다. 따라서
위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이론은 어디까지나 통사론에서 통용되는 이론이지 조어법
에서 통용되어야 하는 이론은 아니다.
일반적인 통사적 이론으로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 예컨대 '막는 것' 이라
는 통사적인 언어로는 어느 특정한 것에만 사용되는 '막는 것'을 가리키기가 어렵다. 물을
막는 것도 '막는 것' 이고 사람을 막는 것도 '막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비통
사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형태의 말을 만들어서 특정한 개념을 대변하게 만드는 것이 조어
법인 것이다. '마개'가 그러하다. 동사의 어간 '막'에 특별한 형태소 '애'를 붙여 엉뚱하게 '마
개'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같은 원리에 의하여 '집는 것' 은 '집게', '베는 것'
은 '베개' 라는 낱말을 새로 형성해 낼 수 있다. 어간에 무언가 새로운 형태소를 붙임으로써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 내는 비통사적인 조어법인 셈이다.
새로 만들어진 낱말이 통사적인 조어법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국
어같이 다음절어이면서 교착어인 언어는 통사적인 조어법만을 고집한다면 새로운 낱말을
거의 만들어 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영어에서 'computer'와 'utopia'를 합성하여
'computopia'라는 말을 만들어내는 것도 비통사적인 조어법이다. 어떤 두 요소를 조합하여
만든 새로운 낱말은 그것이 통사적인 조어법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가지고 시비할 대상이
아니다. 오직 그것을 만든 요소들이 일정한 뜻을 드러내는 형태소인가 아닌가, 그리고 그
낱말이 그런 형태소에서 우러나는 의미를 대변하여 새로운 개념으로 독립할 수 있는가 없
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먹거리'는 하나의 훌륭한 낱말로 인정받을 수 있다. '먹거리'의 '먹'은 '먹다'라
는 의미를 품고 잇고, '거리'는 재료의 뜻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 낱말이 '먹고 마실만한 사
물' 곧 '음식' 의 뜻으로 쓰인다면 한 낱말로서 성립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단순
히 '먹을 거리'의 뜻으로 '먹거리'라고 쓴다면 '먹을 거리'의 준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시도를 통사적이어야 한다는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나의 이런 주장에 대하여 '먹거리'를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입을 거
리'를 '입거리'로 '묶을 거리'는 묶거리로 써도 된다는 말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런
반문을 하는 사람은 낱말의 생성을 규범적으로만 보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낱
말은 결코 일정한 틀에 따라서 규칙적으로만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먹을 거리' 대신에 '먹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인정되었을 때에 '먹거리'가 한 단어로서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입거리', '묶거리', '씻거리' 같은 말은 아직 쓴 일이 없고 그것을
쓰자고 주장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이를 섣불리 예로 드는 것은 잘못이다. 국어학자들은
'먹거리'가 통용되는 과정과 현실을 면밀히 보고 생성이 완료되었다고 판단되면 우리말 어
휘로서 국어사전에 올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직 생성이 끝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조용
히 지켜볼 일이지 섣불리 조어법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낱말의 생성에 개입해서는 안 될 것
이다.
국어 낱말에는 조어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단어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하염없다'는 '하다'
에서 생성된 말이고, '보암직하다'는 '보다'에서, '알음알이'는 '알다'에서, '노름'과 '놀음놀이'
는 모두 '놀다'에서, '무덤'은 '묻다'에서 생성된 말이다. 각 낱말은 그 낱말에 특유한 이유
때문에 보편적인 조어법과 다른 형태로 고정된 것이다. 이런 점을 인식한다면 새로운 낱말
이 등장하였을 때에 이것을 이미 확립된 조어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고 특
히 통사론으로 신조어를 재단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학자들이 우리말에 대하여서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시비를 거는 것에 대해
필자가 강조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자어나 외래어에 대해서는 그런 잣대를 들이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쓰고 있는 엄청난 수의 한자어는 엄격하게 말하면 성립할수 없는 한
자어가 많다. '제자(弟子)'는 '아우의 아들'이거나 '아우와 아들'이어야 하고 '매형(妹兄)'은
'누이의 언니' 이거나 '누이와 언니'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한자어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입회(入會)'는 '서서 모임'이거나 '서는 모임'이어야 하고, '보합(步合)'은
'걸음과 합침'이거나 '걸어서 합침'의 뜻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각 한자어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뜻으로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였다. 왜 이런 단어에는 엄격한 조어법을 적용
하지 않는가? 우리말에만 불필요하게 엄격한 잣대를 만들어 우리말의 발전과 생성에 걸림
돌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지금은 적극적으로 새로
운 말을 생성하는 능력을 북돋아 주는 것이 중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우리말_남영신.2000)
진정한 조어력은 청각성에 의존한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한자보다 수십 배의 발음 수를 자랑하는 한글이 그만큼 조어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마땅하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사람은 비상한 청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주 조금만 다른 발음으로도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어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수십 만이 넘는 어휘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바로 이러한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결합해 각각의 정확한 뜻과 연결시켜 대화를 거뜬히 해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 능력을 얕잡아 보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풋'이라는 접두사를 앞에 붙이면 '풋고추, 풋사과, 풋나물, 풋마늘, 풋대추, 풋콩'은 물론 더 나아가 '풋사랑, 풋바둑, 풋굿, 풋담배, 풋젓, 풋바심, 풋솜씨, 풋윷, 풋잠'이라는 말까지 훌륭히 만들어 낸다. '풋'을 하나 더 겹쳐 '풋풋하다'하면 정말 풋풋한 냄새, 풋풋한 빛깔을 가진 말이 생겨나지 않는가. 동사 어미 '-아'·'-어' 아래에 쓰이어 그 동작이 마침내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구실을 하는 '내다'도 '해 내다, 견디어 내다, 받아 내다, 이겨내다, 알아내다, 찾아내다, 그려내다'와 같이 정말 「끝내 주는」 말들을 만들어 「낸다」. '가맣다, 거멓다, 까맣다, 꺼멓다, 검다, 시커멓다'에서 '까마스름하다, 까마말쑥하다, 까마무트름하다, 까마반드르하다, 까마족족하다, 까무끄름하다, 까무대대하다, 까무댕댕하다, 까무스름하다, 까무잡잡하다, 까무족족하다, 까무칙칙하다, 까무퇴퇴하다'로, 더 나아가 '까마득하다, 까마귀, 까막까치, 까막눈, 까막눈이[문맹자], 까막나라, 까막과부'까지 아주 미묘한 차이까지 낱낱이 실어 낸다. 어찌 우리말의 조어력을 우습게 볼 것인가.
(아람찬님 블로그)
조의력운운이야말로 한문빠들이 가장 과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듯.... 상대적으로 조의력이 떨어지는 영어, 불어등등의 언어가 하등언어인가???????
조어는 하기 마련. 그나저나 이 위 자식은 이제 내 닉을 도용해 쓰네.
전부 맞는 말이 근영
불어가 조어력이 떨어진다는 마씀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어떻게 영어의 조어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는지.....
위의 글 정말 좋네요... 평소 제 생각과 같아요.. ^^ 그런데 한자 조어의 경우 발음 축약면에서 상당히 좋은 것 같습니다. 순수 국어와 한자를 적절히 섞어 조어를 하면 좋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