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회적 · 정치적 담화에서 사람들은 말이 사고를 결정한다고 쉽게 가정한다. 오웰의 에세이 <정치와 영어>에서 영감을 얻은 소위 전문가들은 정부가 평화공작(폭격), 세수확대(증세), 비고용(해고) 같은 완곡어법을 사용하여 우리의 사고를 조작한다고 비난한다. 철학자들은 동물에게는 언어가 없으므로 의식도 없고, ─ 비트겐슈타인은 "개는 '아마 내일 비가 올 거야.'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다."고 썼다 ─ 따라서 의식 있는 존재가 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부 여권 운동가들은 가령 인간을 총칭하는 데 he를 사용하는 것처럼 성차별주의자들이 성차별적 언어에 입각해 사고한다고 비난한다. 당연히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몇 년에 걸쳐 he의 대안으로 E, hesh, po, tey, co, jhe, ve, xe, he'er, thon, na 등 수많은 새로운 단어들이 제시되었다. 이런 운동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것으로는 1933년에 공학자 앨프레드 코집스키 백작에 의해 시작되고 그의 제자였던 스튜어트 체이스와 하야카와(후에 반대를 묵살하는 대학총장이자 졸기만 하는 미국 상원의원이라는 별명이 붙은 바로 그 하야카와다)에 의해 일약 장기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끈 '일반의미론'을 꼽을 수 있다. 일반의미론은 인간의 어리석음의 이유를 언어구조가 인간의 사고에 저지른 교활한 '의미 손상' 탓으로 돌린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십대에 저지른 도둑질을 이유로 이제 마흔이 된 사람을 구속하는 것은 40세의 존과 18세의 존을 '동일인'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인데, 만약 이들을 '존'이라 통칭하지 않고 각각 '존1972'와 '존1994'로 지칭한다면 이런 황당한 오류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be동사는 Mary is a woman에서처럼 개인을 추상적인 개념과 동일시하고, 로널드 레이건의 유명한 발뺌인 Mistakes were made에서처럼 책임회피를 가능하게 하므로 비논리성의 한 근원이라고 한다. 한 분파에서는 아예 be동사를 없애 버리자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어쩌면 저 유명한 사피어-워프의 언어결정론이나 그보다 조금 완화된 형태인 언어상대성 같은 가정들에도 일말의 과학적 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언어결정론자들은 인간의 사고가 그들의 언어에 의해 사용 가능해진 범주들에 의해 그 형태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며, 언어상대론자들은 언어의 차이가 화자들의 생각의 차이를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시절 배운 것들을 죄다 잊어 먹은 사람들이 의사 사실(擬似事實)을 떠들어댄다. 지역마다 광스펙트럼을 분할하는 방법이 다르고, 그로 인해 언어마다 색깔 이름이 다르다는 점, 근본적으로 다른 호피족의 시간 개념, 눈(雪)을 표현하는 수십 개의 어휘를 가진 에스키모의 언어 따위가 그것들이다.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묵직하다. 그것은 실재의 근본적 범주는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부여된다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 이 가설이 학부생들의 감수성에 오랫동안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것은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사고가 언어와 동일한 것이라는 개념은 "관습적 부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한 예다. 모든 상식과 대립하지만 어디선가 희미하게나마 들어 본 기억이 있고, 또 그 속에 어떤 묵직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누구나 믿고 있는 것. 그것이 관습적 부조리다(우리가 두뇌의 5%만 사용한다는 '사실', 나그네쥐들이 집단 자살한다는 '사실', 해마다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보이스카우트 편람이라는 '사실', 우리가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광고의 영향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물건을 구입한다는 '사실' 등이 그 예들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누구나 어떤 문장을 말하거나 쓰다가 문득 그것이 정확히 우리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경험이 있다. 그런 느낌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한 것과는 다른 '말하고자 했던 바'가 있어야 한다. 가끔 생각을 전달할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려울 때가 있다. 무엇인가를 듣거나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정확한 단어가 아니라 그 골자를 기억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무더기의 단어들과 동일하지 않은 어떤 골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고가 단어들에 의존한다면 어떻게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어린아이가 최초의 단어를 학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겠는가?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고 가정하는 논의들은 불신의 집단적 유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버트런드 러셀이 말했듯이, 개는 그의 부모가 가난하지만 정직했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그 개가 '의식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는가? (완전히 뻗었는가? 멍청이 좀비인가?) 일전에 한 대학원생이 재미있는 역순의 논리를 이용해 나와 토론한 적이 있다. 그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차별적인 언어사용법과 싸워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고 주장했다(명백히 그런 언어사용이 불쾌하다는 사실은 싸움의 충분한 이유가 못 된다). 정부의 완곡어법이 경멸스러운 까닭은 그것이 사고통제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오웰은 자신의 뛰어난 수필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예를 들어 '세수확대'는 '증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녔고, 따라서 청자들은 정치가가 '증세'를 의도했다면 '증세'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완곡어법을 꼬집어서 이야기할 때는 사람들은 대개 그 속뜻을 어렵지 않게 간파한다. 그 정도로 깊이 세뇌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영어교사협의회는 매년 넓은 지역에 배포된 인쇄물들에 등장한 정부의 중의적 표현들을 풍자하고 있다. 완곡어법은 코미디 형태로 인기를 끌기도 하는데, <몬티 파이돈의 공중곡예>에서 애완동물센터의 분개한 고객이 이렇게 말한다.

이 앵무새는 더 이상 없어요. 존재하기를 중단한 겁니다. 그의 생은 만료되어 조물주를 만나러 갔지요. 이것은 고(故) 앵무새예요. 하나의 물체입니다. 생명을 빼앗겨서 평화롭게 쉬고 있어요. 새가 발톱으로 횃대를 붙잡을 수 없다면 데이지꽃 아래 묻혀야겠지요. 이제 막이 내렸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새들의 성가대에 합류했습니다. 이것은 전(前) 앵무새지요.

이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언어가 사고방식을 극적으로 조형한다는 어떤 과학적 증거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증명하려 했던 시도들의 의도하지 않은 코미디 같은 역사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과학자들이 사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연구해야 할지 잘 몰랐던 시절에는 언어가 사고를 조형한다는 생각이 그럴싸해 보였다. 현재는 인지과학자들이 사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알고 있으므로, 단지 단어가 사고보다 파악하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사고를 언어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유혹은 많이 줄어들었다. 언어결정론이 잘못된 이유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 장에서 만나게 될 언어 자체가 작동하는 방법을 이해하기 위한 좀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책 존나 어렵다 시발 좆됐어요 읽기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하는데 존나 어려워서 울면서 읽는 중 지금 1/3 정도 읽었는데 '언어결정론이니 언어상대론이니 하는 것들 다 좆까 언어는 본능이야! (language of thought)' 하면서 존나 존나 많은 사례들을 논증하며 mentalese에 대해 말하고 있음 근데 '언어가 사고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고가 언어를 만든다'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직 정리를 안해서 잘 모르겠다 ㄷㄷ
그나저나 도대체 뭘 얼마만큼 공부해야 이렇게 개쩌는 글을 쓸 수 있는 거냐 내가 이런 책 쓰려면 자살하고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르겠지 시발

*책에서 '1984'나 '거울나라의 앨리스' '헨리 6세' 같은 문학부터 시작해서 우디 앨런 영화나 snl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왔던 대화의 한 부분까지 존나 다양하게 인용하는데 언급된 책은 다행히 읽은 거지만 내가 안 읽은 책 나오면 다 찾아서 읽어봐야 할까? 대학생 형님들 어떻게 하시나요? 가르쳐주세여 난 언급된 것들을 (구할 수 있는 거면) 다 찾아보는 편인데 이 책은 그렇게 했다가는 완독하는 데 1년은 걸릴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