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 (세종281446년 간행) 간송본은 안동의 진성이씨 대종택인 주촌(두루)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씨가 종택의 작은집인 이한걸(李漢杰)로부터 아들인 이용준(李容準)을 통하여 구입하였으며,

일부 긍구당 지인들이 긍구당이 원 소유주라고 하는 주장은 소장의 근거도 증거도 없는 추측 및 왜곡일 뿐이고 주장한 내용도 근거 없는 추론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해례본을 긍구당에서 소장한 기록과 입수한 근거가 전혀 없고 이에 대한 설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명도 없습니다. 즉 긍구당 지인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쓴 허구이지요.

또한 긍구당의 역사는 유일재 김언기(金彦璣 1520~1588)로부터 시작되며 世宗임금(1397~1450) 사후 70여년 지나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즉 두 문중의 역사를 보면 긍구당의 설명은 허구라는 사실을 바로 알수 있습니다

더구나 긍구당은 65여년동안 일체의 언급이 없다가 관련자들이 다 돌아가시고 마지막에 남은 가장 중요한 당사자 이용준이 작고한 다음해 이런 억지 주장을 하는 건 진실을 은폐하고 회피하기 위한 고의적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양 가문을 비교

원소장처인 진성이씨 대종가: 진성이씨 대종가인 안동 주촌 종가는 고려 말에 시작된 600년 전통의 대종가로 세종 조에 4대 조 이정(李禎: 주촌 종가 不遷位 退溪 李滉선생님의 증조부)공이 영변판관을 거쳐 최윤덕 장군을 따라 북쪽 여진족을 토벌한 공이 있어 한산부사선산 도호부사를 역임하셨던 분으로 영변에서 낙향하면서 가지고 와서 심은 향나무가 지금은 천연기념물314호로 지정되어 잘 자라고 있는 안동에서도 유서 깊은 종가입니다.

불천위(不遷位)란 국가공신 혹은 덕망이 높은 자를 나라에서 정하여 대대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것으로서, 조선초기 개국공신부터 후기까지의 덕망 높은 자들이 선정되었다. 

발견 당시 보관처인 이한걸 가(李漢杰 ): 이한걸(李漢杰)은 호가 율재(慄齋) 영남의 대유학자이자 교육자로 1921년에는 사비로 민족고유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덕전강사(德田講社)를 설립 동릉학술강습소을 열어서 서울에서 조재건을 교사로 초빙하여 운영하였고 1927女子小學을 편찬하여 우리문화와 한글을 가르치시던 분으로 진성이씨 안동 周村(두루) 대종가의 작은집이 바로 이한걸 가 입니다.

양가의 관계: 이한걸의 고조부께서 주촌 종가로 양자를 가셨고 증조부는 종가에서 양자를 오셨으며 다시 백부가 종가로 양자를 가셨습니다. 특히 백부 이긍연(李兢淵)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으로 주촌(두루) 대종가 종손이셨습니다. (사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따라서 소장 당시에 양가는 작은집과 큰집 사이였기에 서고의 책은 물론 재산의 개념도 분리되지 않았고 주촌 종가 집 서고는 진성이씨 지손들 에게는 언제나 열려있었으며 이한걸이 주촌 종가로부터 한글교육을 위하여 해례본(解例本)과 동국정운(東國正韻)을 가지고 와서 교육을 하였고 아들인 이용준을 통하여 解例本(국보70)東國正韻(국보71)과 함께 간송에게 넘긴 것입니다.

 

* 유일재 김언기(金彦璣): 김언기는 (1520~1588) ()가 중온(仲溫), 호는 유일재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7(명종 22)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평생 후진양성에만 힘썼다. 불천위(不遷位) 종가 아님

 

문화제청의 해례본에 발견경위에 대한 공식 내용

1) 문화재청에서는 1962 12 20일 간송미술관 소장의 훈민정음해례를 국보제70호로 결정하고, 발굴과정과 구입과정을 이렇게 밝혔다.

 -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정(李楨)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에는 김태준(金台俊)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 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 낙장 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 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2016 11 23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앞 두 장의 낙장 복원과 관련한 문화재청 자문회의에서는 박종덕의 논문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학계에서 검증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훈민정음의 보존상태를 보았을 때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 아니라 표지 등 앞 두 장이 없는 채로 오랜 기간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해례본 간행과 발견에 대한 년도별 요약

1443 (세종25) 1230: 훈민정음 발표

1446 (세종28): 훈민정음 간행 (해례본)

1448 (세종29) 929: 동국정운(한자음의 훈민정음 표기법) 완성

144811: 동국정운 발표

진성이씨 선조 이정(李禎: 생몰 미상 (세종~세조), 진성이씨 주촌 종택 不遷位이며 退溪 李滉선생님의 증조부 임) 공이 세종 때 여진족을 물리친 공으로 해례본과 동국정운을 하사 받은 것으로 추정

1520: 긍구당 유일재 김언기(1520~1588) 선생 탄생, 세종대왕(1397~1450) 사후 70년 지남 (퇴계 이황 선생님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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