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원소장처 시비에 대해


작금에 기자회견까지 하며『훈민정음 해례본』(국보70호)의 원소장처가 ‘광산김씨 긍구당(肯構堂)이냐, 진성이씨 회양당(晦養堂)이냐.’ 에 대한 시비의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논란의 중심은 2005년에「한글새소식. 395호」에 ‘『훈민정음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란 글을 게재하고, 2017년 1월 24일에 ㈔유교문화보존회가 주최한 학술발표회에서 ‘肯構堂『訓民正音』과 그 이야기’를 발표하였기 때문입니다.


위 두 발표의 요점은 이『훈민정음 해례본』은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의 광산김씨 긍구당이 원소장처임을 밝힌 것입니다.


먼저 훈민정음의 출처에 대한 논란의 주된 핵심은 이렇습니다.

 광산김씨 긍구당에서는 1938년 말에서 1940년 초에 긍구당 종손 김응수(金應洙)의 사위 이용준(李容準:1916~2004 ?, 월북)이 긍구당 서고에서 훈민정음을 유출하여 앞 2장을 새로 깁은 뒤에 간송 전형필에게 매도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이용준의 집안인 진성이씨 회양당에서는 이한걸(李漢杰, 이용준의 부친)의 조상인 선산부사 이정(李禎)공이 군공(軍功)이 있어 훈민정음을 세종임금에게서 직접 하사 받았고, 또 연산군의 언문탄압 때 앞 2장을 찢어서 없앤 뒤에 1940년까지 집안에 보관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위의 발표는 진성이씨 회양당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첫째, 훈민정음을 세종임금에게서 직접 하사 받았다.
퇴계 이황선생이 증조부 이정(李禎)공에 대해 쓴「증조고비묘갈지(曾祖考妣墓碣識)」에 최윤덕 장군의 북정(北征)에 따라가 군공으로 관작을 받은 사실은 기록하였지만, 내사본(內賜本)을 받은 것과 원종공신에 책록 된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임금이 군공이 있는 사람에게 서책을 하사했다. 무언가 생뚱맞지 않나요!
(진성이씨족보와「曾祖兵曹參議公事蹟」에는 이정(李禎)공은 세조(世祖)때에 원종공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임금 때가 아니니 하사 받은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둘째는 연산군의 언문탄압 때 앞 2장을 찢어서 없앤 뒤에 1940년까지 집안에 보관했다.
훈민정음의 앞 2장은 세종대왕의 어제(御製) 서문이 있고, 또 정음의 발음 풀이 몇 자 외에는 모두가 한자(漢字)로 쓰여 있습니다.

언문탄압에 한자가 쓰인 책장을 뜯었다는 이야긴데 이것도 생뚱맞지 않나요!
(긍구당 집안에서는 첫째 장에 장서인(藏書印)과 둘째 장에 ‘天下太平春’ 입춘첩이 쓰여 있어서 증거를 업애려고 훼손했다고 한다. 또 김주원 교수에 따르면 훈민정음 뒷면 글씨는 十九史略諺解이며 18세기의 서체라고 하니 연산군 때 찢은 것은 아니죠!)


더욱이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용준이 처가에 보낸 편지 12통이 긍구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용준이 서책을 유출하는 시기인 1939년과 1940년, 1941년에 장인 김응수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이용준은 서책을 가지고 온 일에 대해 ‘범행자부대죄(犯行自負大罪)’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범행(犯行)이 대죄(大罪)이며 저지른 행위는 범죄(犯罪)였음을 시인하였고, 또 자신이 책을 가져간 일에 대해 ‘고속이서지례(古俗貽書之例:옛 풍속에 책을 주는 사례)’라는 표현을 쓰며 자신에게 책을 그냥 준 것인 양 하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위 내용이 있는데 다른 무슨 증거가 필요 할까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1. 퇴계 후손인 연민 이가원(李家源) 선생도 『훈민정음』은 이용준의 처가(妻家)의 서책임을 말하였습니다. (김계곤(전 한글학회 회장)이 1964년에 교지「보성」에 쓴 ‘訓民正音 원본 발견 경위에 대하여’ 라는 글 참조.)

2. 1996년 겨울에 퇴계종택을 방문하여 종손인 이동은(李東恩)옹께 『훈민정음』 관계를 말씀드렸더니 “그런 일이 있었긴한데, 잘 모른다.” 고 하며, 언급을 회피하셨다.

 

이상에서 보듯,『훈민정음해례본』의 원소장처가 진정 어느 집안일까요?


부산예술고등학교 박영진 씀.


(이용준 편지는 용량이 커서 첨부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