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라순이는 느지막이 눈을 떴다. 

그녀의 하루는 언제나 남들보다 늦게 시작된다. 

벌써 5년 넘게 이어져 온 일상이다. 

올해 서른이 된 라순이는, 

여느 때처럼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익명: (엘리 팔리셨나요?)

라순: (네, 팔렸습니다.)





어제 거래방에서 쌀을 팔고 체크 표시를 깜빡했던 게 떠올랐다. 

라순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로 나왔다. 

부모님은 이미 출근하신 뒤였고, 집안은 적막했다. 

이 고요한 시간이야말로 라순이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틈이었다.

어머니가 차려놓고 간 밥으로 늦은 아침을 해결한 뒤, 

그녀는 빈 그릇을 대수롭지 않게 싱크대에 던져 넣었다. 

어차피 저녁이면 어머니가 설거지할 테니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이윽고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는 순간, 

비로소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담배 한 개비는 그녀의 도파민을 자극하고 

아드레날린을 깨워, 본격적인 하루에 들어서기 전 

몸을 풀어주는 준비운동 같은 역할을 했다.

라순이에게 이 현실은 진짜 세상이 아니었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겠지만, 

그녀의 진짜 현실은 따로 존재했다. 

담배를 다 피운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전원을 눌렀다. 

이제 진짜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라테일 접속)




모니터 속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 벨로스야말로 그녀의 고향이었다. 

언제 와도 마음이 편안했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채팅창에는 반갑게 인사하는 친구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익명1: 라하
익명2: ㅎㅇㅎㅇ
익명3: 반갑고





현실과 달리, 이 세계에서의 라순이는 인기 있는 ‘인싸’였다. 

타고난 친화력에 더해 현실에서 번 돈 대부분을 

이곳으로 이체해왔으니, 

비록 랭커는 아니어도  꽤 강한 전사 축에 속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이 세계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일명 ‘쌀먹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친목, 전투, 노동)




라순이는 이제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지엔디아의 전사가 된 것이다.

간단한 숙제를 마친 뒤 본격적인 노동에 나서려 했지만, 

그녀의 던전 파트너는 아직 접속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아침까지 함께 모험을 했으니 

아직 자고 있을 만했다. 그때였다.



(익명4가 접속했습니다)



라순: 오, 4야 ㅎㅇ

익명4: ㅎㅇㅎㅇ

라순: 오늘 야가다 일찍 끝났어?

익명4: 응, 일 없어서 오전 근무만 했어

라순: 그럼 이카 2캐릭 같이 돌래?

익명4: 지금?

라순: 응, 디코 들어와!




익명4는 제법 강한 전사였기에, 

라순이가 눈여겨보던 J 후보 중 하나였다. 

혹시 지금의 파트너와 이별할지도 모르니, 

어항 속 물고기처럼 여러 후보를 두는 건 그녀의 루틴이었다.

방법은 단순했다. 

먼저 디스코드로 유인해 둘만의 대화를 나누고, 

이후 오픈채팅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며, 

마지막엔 전화번호까지 받아내는 식이다. 

이미 프로필 사진은 포토샵으로 가꾼 그녀의 얼굴이었다.



라순: 그럼 나 담타 좀 준비 하고 있어!



그녀는 상대가 자신의 테토미에 반할것이라 확신하고 

흐뭇하게 웃었다. 

담배 한 개비를 더 태우고, 

후보와 은밀히 디스코드를 오가며 인던을 마쳤다. 

잠시 후, 드디어 J가 접속했고, 지금이야말로 

그녀의 본격적인 노동이 시작되었다.

현실 세계에서 그녀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 없었다.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물류 알바를 전전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번 돈은 대부분 지엔디아로 흘려보냈지만, 

후회는 없었다. 지엔디아 전사의 자존심과 자아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으니까.

덕분에 쌀먹충도 됐으니 후회는 절대로 없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모든 캐릭터들을 던전에 몰아넣었다. 

땀나는 노동이었지만, 기꺼이 즐겁게 몰입했다. 

어느새 저세계의 직장인들이 퇴근할 시간이 훨씬 넘었는지,

길드 채팅창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리고 이 시간은, 라순이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차례였다. 






[길드] 라순: 롤 하실 분?

[길드] 익명6: 저요!

[길드] 익명5: 나!

[길드] 익명4: 하고 스팀도 하실?


지엔디아에서의 임무는 끝났지만, 

새로운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떠날 시간, 새로운 차원으로 발걸음을 옮길 순간이 온 것이다.

그녀는 벨로스의 푸른 언덕과 나무집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지엔디아 전사의 자아를 로그아웃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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