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국은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축축해진 신발과 눅눅한 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날만 되면 괜히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날도 병국은 우산을 안 들고 나왔다. 습관처럼.

“또 이러고 있네.”

낮고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몽이었다.
병국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깜몽은 늘 이렇게 나타났다. 병국이 가장 무방비한 순간에.

“우산 안 들고 나올 거면, 비 오는 날엔 나한테 전화하라니까.”

깜몽은 병국의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숨결이 섞일 만큼.

“괜히 귀찮게 하기 싫어서.”

병국의 말에 깜몽은 작게 웃었다.
“너는 참, 그런 데서만 쓸데없이 착해.”

비는 점점 굵어졌고, 골목은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병국은 문득 깜몽의 손을 보았다. 우산을 쥔 손, 굳은살이 박인 손. 자기를 여러 번 끌어냈던 손.

“깜몽.”

“응.”

“너는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

깜몽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병국을 내려다봤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냄새 속에서, 그의 눈은 유난히 진했다.

“이제 와서 그걸 물어?”

깜몽은 우산을 접었다. 비가 그대로 두 사람 위로 쏟아졌다.
병국이 놀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깜몽이 한 발 다가왔다.

“좋아하니까.”

짧고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병국의 가슴은 그 말 하나로 완전히 무너졌다.

“남자인 거, 신경 쓰이면 지금 도망가도 돼.”

깜몽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병국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안 도망가.”

병국이 우산 대신 깜몽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빗물 사이에서, 그 손은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나도 좋아해. 오래전부터.”

깜몽의 숨이 잠시 멎었다가, 느리게 풀렸다.
그리고 그는 병국을 끌어안았다. 빗속에서,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비는 여전히 내렸지만, 병국은 처음으로 비 오는 날이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