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차 대전 이후 폴란드 동부를 소련이 가져가고, 독일 동부를 폴란드가 가져가는등의 영토 조정이 있었던 이유가 뭐임? 민족이랑 영토가 일치하지 않아서? 그리고 동유럽국가들이 소련에 가입하지 않았던 이유는 뭐임?
2. 조선인 강제이주의 원인은 뭐임? 일본인 첩자가 섞여있을 걸 우려해서 그랬다는데, 다른 이유도 있나? 그리고 강제이주된 조선인의 실제 처우는 어떠했음?
3. 몰로토프리벤드로프 조약은 왜 체결한 거?, 발트 3국과 핀란드, 베라사리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함?
4. 대숙청 때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등이 처형된 이유는 뭐임? 그냥 한직으로 내쫓으면 되는거 아닌가?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를 암살한 이유는 머임? 스탈린이 지시한게 아니란 말도 있던데
5. 바르바로사 작전때 소련이 속수무책으로 밀린 이유는 뭐임? 후퇴금지명령 때문에 포위당하고 전멸당해서 그렇다는데 이렇게 보는게 맞아? 스탈린이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거나 당황해서 제대로된 판단을 못한거임? 아니면 그렇게라도 해야했던 이유가 있던거임?
2. 조선인 강제이주의 원인은 뭐임? 일본인 첩자가 섞여있을 걸 우려해서 그랬다는데, 다른 이유도 있나? 그리고 강제이주된 조선인의 실제 처우는 어떠했음?
3. 몰로토프리벤드로프 조약은 왜 체결한 거?, 발트 3국과 핀란드, 베라사리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함?
4. 대숙청 때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등이 처형된 이유는 뭐임? 그냥 한직으로 내쫓으면 되는거 아닌가?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를 암살한 이유는 머임? 스탈린이 지시한게 아니란 말도 있던데
5. 바르바로사 작전때 소련이 속수무책으로 밀린 이유는 뭐임? 후퇴금지명령 때문에 포위당하고 전멸당해서 그렇다는데 이렇게 보는게 맞아? 스탈린이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거나 당황해서 제대로된 판단을 못한거임? 아니면 그렇게라도 해야했던 이유가 있던거임?
1. 폴란드 동부는 커즌 선 동쪽으로 원래 폴란드의 영토로 합의가 이뤄진 것이 아니었음. 내전 말기 폴란드의 기습으로 인해 합의가 유야무야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 민족적 구성에서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인이 섞여있었고, 이들은 사나치아 체제 전체에 걸쳐 제대로 된 학교와 언어를 갖추지 못한 2등 국민이었기 때문에 폴란드가 1945년 종전 이후에도 줄곧 영유권을 주장한다고 해도 하자가 많은 지역.
1-1. 동유럽 국가들은 각국에서 전개된 전민항쟁의 결과로 인민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사회주의로 성장전화하였음. 소위 '위성국'이라는 관점은 반파시스트 투쟁에서 현지 공산당-노동자당의 주도적인 역할을 고려할 때 부당한 것. 그러나 국가와 국가를 통합시키는 과제는 엄연히 다른 범위. 정치적, 경제적 국제연대가 발전하는 것이 전제될 때에야 가능한 일.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는 예를 들어, 코소보에서 파르티잔 인원들끼리 서로 협력했는데 티토가 '남슬라브 연방'을 내거니 알바니아측에서 반발한 경위는 자명한 것임. 높은 수준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뒷받침될 때 행정적 명령으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 성취될 수 있게 되는 것임.
2. 당대에 쓰인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이 고려인들과 연계하려는 정황들이 없지 않게 나타났다고 지적됨.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요인들로는 먼저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개량주의자들(식민지 자치론자들)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었다는 점이고, 그와 유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당국자들 내부에 잠재하여 있었음. 더욱이 당대 연해주와 동북아의 정세는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연해주의 군사적 긴장이 심해져가고 있던 형국. 노경덕 선생께서 말하신 대로 '민족차별'의 동기로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세적인 변화가 주된 원인임.
2-1. 이주 이후 고려인들은 연해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1950년대와 같은 경우 대다수가 중앙아시아에서 생활에 만족하며 지속적으로 영위하였음. 민족체로서 성격은 재미교포보다 더 잘 보존된 편인데, 민족어에 대한 교육이 이주 직후에도 지속됐다는 점에서, 민족어로 된 언론과 매체가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고 고려극장과 같은 문화시설이 고려인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러함. 애시당초 '제노사이드'나 특정 민족에 대한 혐오의 발로가 아니었음. 비슷한 시기 미국(혹은 캐나다)에서 재미 일본인에게 어떠한 대우가 가해졌는지 상기하면 '민족억압'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함.
3. 30년대 초중반부터 소련은 구미권 국가들(영/프)에게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집단안보를 제의하였고, 폴란드에게도 이와 관련한 요청을 제기하였음. 이걸 묵살한 건 제국주의 열강들이었고 소련에 대한 뿌리깊은 혐오로 인해 추동된 것임. 1939년 3월 레닌그라드에서 영국과 프랑스, 소련측 대표단이 회동했을 때 영프는 3-4개 사단밖에 동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폴란드는 그 당시면 이미 치에쉰 합병 등으로 나치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던 상태. 영국과 프랑스의 미온적인 태도는 소련보고 혼자서 독일군과 맞서라는 주장이었으니 소련을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술책. 거기에 넘어가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일.
3-1. 다만, 소련은 폴란드를 주권국으로 판단하는 제스쳐를 취하였음. 몰로토프-리펜트로프 조약 이후에도 서방 연합국에게 제의하여 늦기 전에 집단안보 방침의 취지를 되살리자는 쪽이었고. 여기서 폴란드의 역할은 집단안보의 중심 축에 해당됐고, 소련측의 제의도 있었음. 모든 제휴의 시도들이 허사가 된 뒤에는 완층지대로서 폴란드의 입지를 존중하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책이 된 것. 9월 17일 폴란드 정부가 루마니아를 거쳐 런던에 망명하기 전까지 소련군은 폴란드 영내로 진입하지 않았기도 함. 그 이후에야 무주공산이 된 폴란드로 질서회복의 차원에서 진입하게 된 것. 이후의 일들은 전에 숱하게 논쟁해본 주제인데 공지에 있는 "반공주의 비판 가이드라인"에 수록된 자료들을 참고하시길.
3-2. 핀란드 문제는 소련이 레닌그라드 인근 국경선을 잠시 옮기는 대신(라도가 호와 인근 핀란드 회랑 일대) 영토의 2배를 맞바꾸는 역제안을 하여 핀란드에 불리한 요건을 강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목되어야 할 것임.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이 소련-핀란드 전쟁(겨울전쟁)의 성격이자 본질. 스웨덴과 미국, 영국, 프랑스는 핀란드를 지원하여 전쟁을 지속하며 이윤을 창출하길 원했고 그곳 근로대중의 생활고를 가속화하는 역할을 맡음. 핀란드와 폴란드 등의 사례는 '패권주의', '확장주의'가 아니라 레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결의했을 때처럼 일보 후퇴하는 엄연한 방어의 맥락임.
4.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를 대상으로 한 재판은 절차가 공정한 재판. 어떤 사람들은 부르주아가 '스딸린주의 관료집단'의 퇴보를 조장하기 위해 재판과정이 '공정'했다고 말하는데, 정작 조셉 데이비스와 같은 사람들은 당대에도 신문지면에 나돌던(특히 허스트 계열) 선전에 대해 반론을 내놓던 사람. 즉, 그들의 '가정' 자체는 성립이 되지 않는 도식적인 가정에 해당됨. 트로츠키와 같은 경우는 디에스 위원회와 접선하여 북미권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의 개인적 정보들을 넘기려 한 전적이 있고 '비운의 혁명가'라는 이미지 자체가 애시당초 과장된 것에 지나지 않음. 이러한 사실이 소련측에 의해 주장된 것이냐? 그렇지 않음. 미국측 문서들을 통해서도 입증이 충분히 이루어진 사실들에 해당됨.
모 뜨로츠끼주의 조직에서 내놓는 "스딸린주의 Q / A"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이지, 별 웃기지도 않는 '가정'을 '반박'이랍시고 내놓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함. 그걸 신줏단지처럼 인용씩이나 하고 재탕하는 것도 웃픔.
4-1. 1940년 5월 트로츠키의 별장에 대한 습격도 이러한 맥락에서 소련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것으로 되지 않음. 디에스 위원회(비미활동위원회)와 트로츠키의 접선이 탄로났고, 멕시코 공산당도 당원들의 명부와 개인적 정보가 누출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분노를 감추지 못할 충분한 동기가 존재하였음. 트로츠키가 소련측과 연관이 되어있다고 문제제기한 현지의 언론사(좌익 혹은 진보계열이건)들은 실제로 소련과 연관이 없던 곳이 다수였음. 따라서 시케이로스같은 경우는 자발적인 동기에서 기인한 것. 시케이로스의 습격 이후 트로츠키는 맥시코 주재 미국 총영사였던 로버트 맥그래거와 회동하는데(1940.6), 거기서도 멕시코 공산당과 연계되어 있다고 보여지는 노동운동가, 정치인, 출판사 등의 명단을 제시한 바 있음.
호이에선 스탈린이 죽이던데 아니였네...ㄷㄷ
4-2. 1940년 5월의 사건과 8월의 사건은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발생적인 필연적인 귀결로 되지, 인위적으로 조장되거나 권력욕, 사리사욕의 관점에서 일어난 것으로 안 됨.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사활이 걸려있던 문제이고 가볍게 판단할 문제가 되지 않았음.
4-3. 부하린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입각하여 부하린은 스딸린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었으며, 개인적 테러리즘을 사용할 것을 주장함. 이렇게 된 경위는 그들이 노동운동에서 유의미한 조류를 더 이상 점하지 못하기 때문. 쥘레스 움베르-드로즈는 코뮌테른의 인사들 중에서 부하린의 노선에 끝까지 찬동했던 인사였데, 그조차도 스딸린의 측근이었던 라자르 까가노비치와 똑같은 문구 -개인적 테러- 와 일치하게 언급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음.
https://revolutionarydemocracy.org/rdv8n1/bukharin.htm
5. 바르바로사 작전 당일과 그 이후 전황에서 스딸린이 '당황'했다는 이야기는 사실무근에 해당되는 이야기. 1941년 5월 5일 붉은 군대 사관학교 연설에서 스딸린은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같은 해 5월과 6월 사이로 80만명의 예비병력이(28개 사단 규모) 독일과의 접경지대로 이동하였음. 총동원령에 대해 주저한 것은 히틀러에게 빌미를 줄 위험이 있어서인데, 후일 수보로프 테제와 같은 발상들을 염두할 때 합당한 조치로 여겨짐. 독일의 침공 당일 스딸린의 대응에 대해서는 디미트로프의 1941년 6월 22일 일기와 당시의 일정을 참고하면 될 것. 나무위키의 낭설과 달리 '칩거'하지도, 당황하지 않았고 새벽 일찍부터 당, 정, 군의 주요 인사들과 회의를 나눈 바 됐음.
5-1. 독일과의 전쟁에서 후퇴금지명령은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 아니었음. 전쟁의 초기 국면인 바르바로사 작전 때도 이는 마찬가지. 41년 9월경에 있었던 스몰렌스크 전투와 같은 경우는 지연전을 통해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고, 포위망에서 탈출한 병력은 이후 발생하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시베리아로부터 당도한 예비병력과 함께 독일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함. 즉, 위기국면에서는 현지의 사정이 중시됐다는 것. '후퇴금지명령' 하면 보통 명령 227호를 떠올릴 것이 자명한데, 이는 스딸린그라드 전투 도중에 도입된 개념. 그러나 그마저도 '에네미 엣 더 게이트'같은 매체에서 묘사되는 양상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
5-2.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밀렸던 것은 장비체계의 미비 등이 주요한 원인이고, '군부 숙군'을 운운하는 경우는 숙군조차 안 했으면 바르바로사 이상보다 더한 파국이 초래됐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 명령 227호에 대해 추가적으로 보론하자면, 적용 대상은 일반 병사보다 일선 지휘관 혹은 정치장교들이 위주로 됐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하겠음. 에네미 엣 더 게이트를 관람하고 난 뒤 항독전쟁에서 참전했던 사람들이 '우리는 저렇게 싸우지 않았다'고 말한 배경에는 그만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음.
5-3. 조헨 헬벡(Jochen Hellback)이 스딸린그라드 전투에 관해 쓴 저서에서 명령 227호(적용 범위는 허가받지 않는 후퇴에 한함)에 따라 소위 '형벌부대'에 투입된 사람들은 재교육을 목적으로 했지, 아군 병사를 총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음. 쏘련 공산당의 정치적 사업, 다시 말해 병사들의 사기를 추동하는 역할이 붉은 군대 병사들로 하여금 독일군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동기를 제공한 것. 예컨대 45사단 소속 정치위원이었던 니꼴라이 글라마자(Nikolai Glamazda)는 '우리가 했던 일은 병사들에게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앞장서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음. 독일과의 전쟁이 진행될수록, 저항할 동기가 장려됐던 것.
5-3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관련 링크를 참조.
https://mltoday.com/book-review-stalingrad/
와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ㄱㅅㄱㅅ. 앞으로도 궁금한거 생기면 질문하러 올게
1950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회의 주최로 폴란드 인민공화국, 독일 민주공화국이 확실히 합의한 바 있음. 그래서 7월 22일은 양국 우정의 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