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꼬슬로벤스꼬 초대 대통령을 지냈던 토마시 마사리끄(1850~1937)
오늘날 현대부르주아 사상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현대 부르주아 사상은 노동계급이 역사적 성취로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사상을 제공할 수 없다. 이것이 1988~1969년 일련의 사건들 도중 체스꼬슬로벤스꼬에서 반사회주의 세력과 제국주의 반동세력이 부르주아의 옛 사상적 무기인 마사리끄주의 철학을 재활용하고자 했던 이유였다. 반사회주의 세력은 "마사리끄로 돌아가자", "우리는 마사리끄의 사상을 언제나 계승할 것이다"느니 표어들을 내건다. 이 모든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델"과 "맑스주의의 새로운 변종"에 대한 선전이 수반됐다.
마사리끄주의는 추종자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사회주의 사상으로 기능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프라하 대학교 교수였던 토마시 가리끄 마사리끄(Tomáš Garrigue Masaryk)에 의해 고안된 이 이론은 엄밀히 말해 체스꼬 부르주아지의 사상이었으며, 마사리끄가 1918년 체스꼬슬로벤스꼬 제 1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됐을 때 국가의 공식 철학으로 자리잡았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인 1960년대에 마사리끄의 이름은 체스꼬슬로벤스꼬 정계에서 다시 한 번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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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1969년 일련의 사건들 도중 맑스주의자를 자처했던 일부 지식인들은 오직 마사리끄주의적인 해석이 수반되어야 맑스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여겼으며, 마사리끄의 강좌인 "맑스주의 기초"를 조명했다. 일부 인사들은 마사리끄가 사회주의의, "인류애적 사회주의"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이론가라고 말한다. 수정주의자들은 맑스주의에 반대하는 수작을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현란한 수사로 가렸지만, 실제로는 마사리끄의 사상을 복권시키고 마사리끄주의를 맑스주의에 등치시키고자 했다.
예를 들어 청년전선(Mlada Fronta)지는 1968년 3월에 또마시 마사리끄와 마사리끄의 저작들이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사회주의 사회의 미래를 위한 지침"이라고 말했다.
마사리끄는 누구였으며,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그 자신의 진의는 무엇이었는가?
또마시 게리끄 마사리끄는 1850년 3월 7일 모라비아의 호도닌(Hodonin)에서 태어났다. 1872~1873년에 마사리끄는 비엔나 대학교에서 철학과 언어학을 공부했다. 1876년에는 철학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했다. 1882년에는 프라하에 있는 체스꼬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임명됐으며, 1914년까지 자리에 있었다. 프라하 대학교는 마사리끄가 "맑스주의의 기초"에 대한 자신의 강의를 기획하고 전달했던 장소였다. 마사리끄는 1898년 "맑스주의의 기초"에 대한 강의를 바탕으로 자신의 책인 "사회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철학적, 사회학적 기초"를 출간했다. 마사리끄의 저서는 반맑스주의적 사조들을 여과없이 나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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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사리끄의 책은 플레하노프에 의해 광범위하게 비판받았다. 플레하노프는 자신의 정통맑스주의적 입장에 대한 마사리끄의 비판을 논박하는 데에 충실했다. 1901년에 플레하노프는 자신의 논문인 "마사리끄의 저서에 대하여"에서 마사리끄의 반맑스주의적 개념들을 비판했으며, "진보"를 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개념들이 실제로는 "퇴보"를 일컫는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쏘비에뜨 로씨야에 대해 마사리끄가 일관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설파했다는 사실은 명시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쏘비에뜨 로씨야와 우리(1920)"에서 마사리끄는 이렇게 썼다.
"어떤 선택지도 볼쉐비즘을 거부하는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볼쉐비즘이 우리나라의 조건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는 레닌의 체제가 로시야에서도 바람직한 체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물론, 볼쉐비즘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로씨야 자신과 로씨야인들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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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부르주아 사상에 의해 활용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맑스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으로서, 맑스주의와 수사적으로 체계적인 연계를 맺고 있으나 내부에서 비판과 수정, 왜곡을 통해 맑스주의를 전복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는 부르주아 사상의 한 경향으로서 수정주의를 인식하였다.
1968~1969년 사이 반사회주의 세력에 의한 마사리끄주의의 부활은, 이들이 마사리끄주의를 필요로 했던 이유가 "민주주의"나 "인간애"의 기치가 아니라,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기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마사리끄주의의 수정주의적 성격은 마사리끄를 사상적 지주로 삼은 체스꼬슬로벤스꼬의 반(反)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자진하여 드러났다. 마사리끄 이론의 수정주의적 본질은 현대 수정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역사적 조건을 채택할 수 있게 했던 것에 있었는데, 이는 맑스주의가 마사리끄주의에 의해 보강되거나, 마사리끄주의로 아예 교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우익 기회주의자들이 "마사리끄 사회주의"의 복원을 최종적인 목표로 내걸며, 체스꼬슬로벤스꼬 공산당에게 마사리끄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정세가 고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M.A. Silin, 《A Critique of Masarykism》, 1975, pp. 8~11.
추신: 개인적으로 체스꼬슬로벤스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한 견해에 있어 쏘련의 입장보다는 엔베르 호자의 그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의 계급적 성격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쪽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고 답하고 싶다. 본문에서 보듯 철학에서 맑스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사조들이 풍미하여 맑스주의의 해체로 나아가던 것이 당대의 상황이었으며, 경제의 영역에서도 폐해는 심각했다. 예컨대 오따 시끄(Ota Sik)처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해체와 시장법칙의 전면화를 주장했던 수정주의 경제학자들이 전문경영인의 지지에 힘입어 자본주의로의 추동에 앞장섰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할 필요는 여실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