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야인들은 (...) 자깝까즈 연방의 폐지를 요구하며 모스끄바에 항의했다. 이에 대해 쓰딸린은(1922년 - 주) 10월 16일 중앙위원회의 명의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의 요구는 만장일치로 거부되었소." - R. Pipes, 《The Formation of the Soviet Union, Cambridge(USA)》, 1964, p. 274
"그루지야 공산당의 다수를 이뤘던 므자바니와 그 추종자들은 자깝까즈 공화국들의 정치적, 경제적 연방을 저지하며, 그루지야를 고립된 상태로 두는 데에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 V.I. Lenin: 《전집》 45권, Moscow, 1970, p. 750
"그루지야인들은(직접적으로는 므자바니 일당을 지칭 - 주) 3개 공화국들의 경제적 통합을 이끌고자 하는 조치에 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동원하여 사보타주를 전개했다. 이들은 그루지야 공화국 국경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행인들에게 거주허가증을 요구했다. - M. Lewin: 《Lenin's Last Struggle》, London, 1969, p.45
"지난번 친차제 등이 수신한 직통 전보의 무례한 어조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모든 간극은 저와 므자바니가 각자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개입했던 문제였기 때문에 해소될 줄 확신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저는 오조르니끼제에 대한 므자바니의 권한 남용을 규탄한 것입니다. 분쟁은 조정되어야 하며, 로씨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차원에서 한 치의 오류 없이 엄중하게 논의에 부쳐져야 할 것입니다." - V.I. Lenin, 《Telegram to K. M. Tsintsadze and S. I. Kavtaradze》, 21 Oct. 1922, in "Collected Works", Volume 45, Moscow, 1970, p. 582
이상의 내용에서 나올 수 있는 요점들을 열거하자면:
1. 자깝까즈 자치공화국 연방은 1922년 12월 쏘련의 초기 구성 공화국들 중 하나로 존재했다.
2. 연방의 성립 목적은 수많은 민족이 거부하는 깝까즈 지역에서 일상처럼 발생하던 민족분규를 저지하고자 하기 위함으로, 어떠한 '쇼비니즘'적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레닌도, 쓰딸린도 민족분규가 가라앉고 제민족간 화합이 바로 서기까지 자깝까즈 연방을 일시적인 방편으로 인식하였다.
3. '레닌의 반쓰딸린 투쟁'같은 좌익주의자들의 문건에서 므자바니는 '대로씨야 쇼비니스트'라던 쓰딸린의 대립항으로서 묘사됐고, 그루지야 볼쉐비끼의 대변자로서 종종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아제르바이잔과 하야스딴(아르메니야)에 대한 그루지야 민족의 우위를 주장하는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므자바니 일당과 다쉬나끄, 무싸바뜨, 멘쉐비끼가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4. 깝까즈의 민족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레닌과 쓰딸린의 견해는 오히려 쇼비니즘을 배제하여 민족화합을 도모하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
5.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지지 않는가? 누가 사회배외주의자였고, 누가 민족화합을 도모했는지!
자깝까즈 민족들의 친선우호를 위하여!
추신: 그루지야 인민들이 1956년 반수정주의 인민혁명에 앞장서서 레닌-쓰딸린의 노선과 쏘련 사회주의의 성취를 방어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경위는, 국제주의의 기조 하에서 봉건적 굴레로부터 해방된 쏘비에뜨에서 민족정책이 현지에 호혜로 다가왔기 때문. 트빌리시에서 궐기가 좌절되지 않았다면, 이후 감사후르디아와 같은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쇼비니스트들이 득세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트빌리시에서 봉기가 있었나보네
https://revolutionarydemocracy.org/rdv22n1/georgia.htm
쓰딸린의 기일인 1956년 3월 5일을 맞아 1만 명의 청년학생들이 트빌리시에서 행진한 것을 시작으로 그 다음 날에는 5만 명으로 늘어남. 3월 8일 주더가 방문했을 때는 국제주의 연대에 호소하며 흐루쇼프의 “격하”를 저지하고자 하는 운동을 보인 바 있음. 하지만 3월 9일에 일어난 비극은 가슴을 미어지게 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