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존 F. 케네디)
196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한 인물이 당선됐다. 그는 1917년 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PT-보트 부대의 해군으로 참전했고, 이후에는 미국 정치계에 입문하여 1950년대부터 민주당 정치인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라는 논문으로 하버드 대학은 물론 미국 내에서 명성을 떨쳤고, 그 논문은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196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43세의 나이에 대통령이 된 미국 최연소 대통령이었다. 그가 바로 존 F. 케네디다.
존 F. 케네디는 미국 민주당에게 있어 진보주의 대통령의 상징적인 인물로 비춰지기도 한다. 잘생긴 외모와 더불어 최고의 학력 그리고 뉴프런티어를 주장했던 그는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젊은 시절 케네디를 보았던 미국인들 중에는 그를 신처럼 생각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존 F. 케네디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그의 전임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못지않게 반소 반공주의적인 인물이었다. 1959년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 아이젠 하워 정부는 사회주의 쿠바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바 망명자를 포함한 반공 군대를 양성했다. 그러나 이들을 실질적으로 침투시켜 쿠바를 침공한 주체는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존 F.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쿠바에서의 반공주의적 침략을 자행하며, 아시아에서도 반공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면서 제1공화국 시대가 막을 내렸던 한국은 허정 과도정부를 통한 장면 내각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포함한 일부 군인 출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서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박정희가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게 지원을 해준 주체가 바로 존 F. 케네디였다. 한국에서 반공주의 정권을 세우는데 열정적이었던 케네디는 아시아의 또 다른 국가에서 반공주의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그렇게 해서 개입한 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사실 케네디는 1951년 당시 동생과 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지원하는 데 반대했고, 나중에 범위를 더욱 넓혀서 “피를 흘리게 하고, 때리고, 착취하고, 지배하는 백인들을 증오하는 아랍, 아프리카, 아시아인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4년 하원의원 시절 그가 했던 연설은 프랑스가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였다.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과 프랑스에 맞서 싸우던 호치민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같은 시기 도미노 이론에 입각하여 프랑스의 식민주의 정책을 옹호했던 린든 B. 존슨이나 리처드 닉슨과는 분명 달랐다. 당시 상원의원이던 케네디가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호치민 휘하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할 만하고, 프랑스는 식민 지배를 유지하려고 싸우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저는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을 하기 전에 독립은 독립투쟁을 응원하는 국민들에게 당연히 주어져야만 합니다.”
이거는 어디까지나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시점까지의 케네디가 가졌던 베트남에 대한 입장이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에게 참패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전개되던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이 열렸고, 제네바 회담은 베트남의 남북분단을 결정했다. 이러한 남북분단은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을 한다는 전제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다. 물론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총선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시 분단된 남베트남에는 프랑스가 세워놓은 바오다이 정부의 베트남국이 있었는데, 바오다이에 의해서 베트남국의 총리로 임명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응오딘지엠이었다.
(존 F. 케네디와 월트 로스토, 소위 최고의 인재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지는 치명적인 선택을 했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55년 부정선거를 통해 득표율 98.2%를 얻고 바오다이를 축출함으로써 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아 친미 반공국가를 건설했다. 이렇게 되자 케네디는 미국과 디엠 정부의 총선거 거부를 옹호하고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촉구했다. 당시 정치인이었던 케네디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자유세계의 주춧돌이고, 아치의 쐐기돌이며, 무너지는 제방을 막아주는 손가락이다. 베트남에 공산주의의 붉은 파도가 밀려들면 버마, 태국, 인도, 일본, 필리핀의 안보도 위태로워진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케네디가 가지고 있던 입장이 응오딘지엠 정권 등장 이후에는 급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말에 들어 응오딘지엠의 잔혹하고 살인적인 반공 독재정권은 억압받던 이들의 무장투쟁을 촉발했다. 당시 응오딘지엠 정권은 남베트남의 모든 문제를 단순히 ‘멸공·반공’으로만 해결하려 했다. 대한민국의 부패하고 독재자적인 대학살자 이승만과 완전 똑같은 노선을 걸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정권의 살인적인 학살로 그의 집권기간 동안 거의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었다. 이것은 베트민에 대한 토벌작전과 그 이후 베트콩에 대한 토벌 작전에서 죽은 공산주의자와 일반 민간인을 합친 숫자다.
응오딘지엠의 독재적인 통치에 맞서 1960년 남베트남에서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그러니까 베트콩이 창설됐다. 베트콩은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와 10개조로 된 강령(미국 군사고문단 추방, 남북 베트남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단계적 조치 시행, 급진적인 사회개혁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에 대한 응오딘지엠 정부의 대응은 민주화 조치를 시행하라는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집회, 공공장소에서의 가무행위 정당 결성 등을 금지했고, 가톨릭 세력에 대한 제한 없는 우대와 불교도에 대한 가혹한 억압조치만 시행했다. 한마디로 남베트남 민중 전체를 적으로 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존 F. 케네디가 선택한 정책이 바로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하는 방식이었다.
(미군사고문단과 남베트남의 소수민족 민병대. 미군사고문단이 지원했던 산악부족 대원이 사격훈련을 하고 있다.)
사실 남베트남에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시점부터 소수의 미군사고문단이 존재했다. 이들은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부터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하는 것으로 목적이 수정됐다. 케네디가 있던 1961년 당시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900명 정도였다. 그러나 로버트 맥나마라, 맥스웰 테일러, 월트 로스토, 맥조지 번디 등의 ‘최고의 인재들’을 모은 케네디는 남베트남에 고문단 병력을 증강했다. 당시 케네디의 고문단 역할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를 강화하고, 베트콩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농민군대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케네디 정부가 동원한 방법은 잔혹했다. 이들은 APC와 같은 최신식 수륙양용장갑차를 배치했고, 최신식 수송헬기와 기관총을 장착한 전투 헬기를 지원했다. 또한 그린베레와 같은 특수부대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침투하여, 현지 주민을 민병대로 양성했다. 베트남 중부고원에서는 몽타냐르로 불리는 산악부족들을 민병대로 길렀고, 라오스 내전에도 개입하여 정부군 및 반공성향의 몽족들을 지원했다.
케네디 정부가 베트남에서 사용한 방식은 주민들에게 총을 들이대어 철조망에 둘러싸인 정부군 감시구역 즉 전략촌에 강제 수용하고, 게릴라가 이들과 함께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이는 말레이시아 내전 당시 영국군과 말레이 친영정부가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할 때, 사용했던 방식이며, 그리스 내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친나치파가 사용했던 방식이고, 제주 4.3사건 때도 이승만 정부가 사용했던 방식이며, 1930년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팔로군을 대상으로 했던 삼광작전과 비슷한 유형의 방식이었다. 또한 케네디는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맹독성 고엽제의 살포를 1961년부터 허용하여 베트남의 밀림을 초토화시켰다. 고엽제 살포 10년 기간 동안 남베트남 정부 발표만으로 따져도 최소 40~50만 명이 사망했다. 물론 기간을 더 길게 잡으면 그 피해는 사망자 부상자까지 합쳐 400만을 넘기게 된다. 그리고 전략촌 방식으로 1963년 기준으로 100만 명 이상이 강제로 수용됐고, 네이팜폭탄 사용도 허가되어 남베트남군과 고문단은 베트콩 출몰로 의심되는 마을을 네이팜 폭탄으로 파괴했다.
(미군사고문단과 남베트남 정규군, 미군사고문단은 남베트남 정규군에게 군사훈련과 베트콩 소탕작전을 지원했다. 또한 APC 수륙양용장갑차와 수송 헬기 및 전투 헬기를 제공했으며, 적어도 1963년 압박 전투 이전까지 남베트남군이 베트콩을 소탕하는 것 처럼 보였다.)
이런 살인적인 학살극을 벌였던 케네디 정부는 아이러니 하게도 전투 병력 파병을 거부했다. 그들은 독재자 응오딘지엠을 ‘동남아시아의 윈스턴 처칠’이라며 치켜세웠지만, 정작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도 생각했었다. 대통령 군사문제 보좌관이었던 맥스웰 테일러와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전투병 파병만이 공산주의의 승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며, 더 많은 병력을 보내야 한다 주장했다. 그러나 존 F. 케네디의 생각은 달랐다. 케네디는 반공주의자로써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하고자 했지만, 과거 프랑스가 밟았던 똑같은 절차를 밟고 싶지 않았다. 1951년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케네디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62년 말부터 케네디는 베트남 문제에 대해 희의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이 전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대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시각이 더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제작된 맥나마라 인터뷰 다큐멘터리인 ‘전쟁의 안개’에 따르면, 케네디는 1960년대 초중반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식으로 하면서 미군사고문단을 완벽히 철수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상군을 보내 수렁에 빠지는 것 보다 고문단 형식으로 지원하며 베트남 문제에 빠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로버트 케네디와 인터뷰를 했을 때 로버트 케네디는 “지상군 파병은 안 한다는 형의 결심은 확고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는 거기 있어봤으니까요! 거기 있었단 말입니다. 1951년에, 우리는 프랑스군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똑똑히 봤습니다. 분명히 봤다고요. 형님은 단호했습니다. 단호했어요. 절대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케네디가 남베트남에서의 철군 및 고문단 지원 형식으로 베트남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재임 시절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900명에서 16,000명으로 상승했다. 고문단의 숫자는 그가 암살당한 이후 린든 B. 존슨 대통령에 의해 더 증강하여 3만 명으로 늘어났다. 즉 케네디의 고문단 파병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는 그 중간단계의 역할을 했으며, 1964년 통킹만 사건 조작을 통하여 미국은 1965년에 지상병력을 보내면서 1968년에 이르러 54만 9,000명이라는 대부대가 주둔하게 됐다. 거기다 네이팜 폭탄 투하와 고엽제 살포 전략촌 계획 등을 통해 인권이라는 측면에 위배되는 정책을 실행했고, 무엇보다 1954년에 맺은 제네바 협정을 완벽히 위반했다.
(마을에 네이팜 폭탄을 투하한 미군 전투기, 이러한 네이팜 공습은 응오딘지엠 정부 초기부터 있었다.)
더 나아가 그의 정책이 남베트남을 제대로 지킨 것도 아니었으며, 남베트남군이 강해진 것도 아니었다. 1963년에 벌어진 압박 전투에서 1,700명의 남베트남군이 300명의 베트콩에게 최신식 장갑차와 전투 헬기를 동원했음에도 참패했다는 사실에서 케네디의 고문단 정책은 완벽히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케네디의 대베트남 정책은 완벽히 실패했으며, 이것은 결국 베트남 전쟁의 지상병력 파병을 통한 전쟁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다.
인도의 ML(호자) 이론지에서 제네바 협상을 두고 서방에 대한 사실상의 항복이라고, 쓰딸린 이후 흐루쇼프 및 쏘련 지도부의 대표적인 실책이라고 언급한 게 생각이 다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