뽈쓰까(폴란드)의 흐루쇼프였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까 (위)
고무우까 일파는 농업에서 사적소유의 부활을 위해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1955년 뽈쓰까(폴란드)에서 협동농장의 비중은 10,000개로 전체 중에서 1~2% 남짓이었던 반면, 사적소유에 기반한 농토는 약 85%를 차지했다. 따라서 고무우까는 사적소유의 비중을 심화시키는 데에 있어 "미미한"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농촌에서 사적 부문은 1956년에 전체 농토 중에서 86%를 차지했다. 이는 협동농장의 해체로 1% 정도가(최대치로 칠 때 기존에서 반수가 남은 비율 및 수치에 해당된다 -주) "남은" 협동농장의 수치와 대조를 이뤘다. 협동농장들은 전부 해체되는 대신 고무우까의 지시로 단지 수천 개가 해체되는 정도에 그쳤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반혁명이 공개적으로 탄로나는 것은 지극히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1955년 말부터 고무우까의 임기 말기인 1970년까지 뽈쓰까에 존재했던 협동농장은 9800개에서 1100개로 줄어들었으며, 남은 곳들도 부농층과 기존 지주계급의 주도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 출처: Spiro Dede, 《The Counter Revolution within the Counter Revolution》, Tirana, 1983, p. 125
볼레스와프 비에루뜨는 통일노동자당에서 고무우까가 주장했던 수정주의적 입장에 맞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제반 원칙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으로서 사회당과 합당하던 도중 검증 절차를 철저히 하지 못하여 기회주의적 인자들의 유입을 사전에 방지하지 못했고, 농촌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은 미진하였다. 고무우까에 대한 반대만으로 충분치 않았던 것은, 토대의 문제가 중차대한 문제로 작용했다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에루뜨가 맑스레닌주의자로 남는 것은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저버리지 않았고, 미약한 기반 위에서도 중앙계획경제와 사회주의 생산관계 확립의 전면화를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었다. - dc App
폴란드 수정주의화는 고물차가 1956년부터 해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