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OJ_3MEKB6zM
공산주의가 시대를 역행하네 뭐네하는 앞뒤의 개소리들은 빼고
소련군은 잘 훈련된 우수한 군대였지만 방어교리의 부재와 지나친 유연함과 혁신이 독소전 초기의 패배와 막대한 물자손실을 불러왔다는데 맞는 말인가요?
독소전 때 패퇴했던 다른 결정적인 이유도 있나요?
공산주의가 시대를 역행하네 뭐네하는 앞뒤의 개소리들은 빼고
소련군은 잘 훈련된 우수한 군대였지만 방어교리의 부재와 지나친 유연함과 혁신이 독소전 초기의 패배와 막대한 물자손실을 불러왔다는데 맞는 말인가요?
독소전 때 패퇴했던 다른 결정적인 이유도 있나요?
https://youtu.be/OJ_3MEKB6zM
"붉은 군대 사령관들은 1939년과 1940년 독일군의 전격전을 유심하게 관찰하고 분석했으며 유의미한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프랑스가 1940년 5월에 주력군을 국경지대와 마지노선 후방, 벨지끄(벨기에) 일대에 응집시켰고, 독일의 전차들이 프랑스 군대를 포위할 수 있는 여건을 야기했다는 사실을 파악했을 것이다. 쏘련은 몇몇 병력을 국경에 남겨뒀으며, 이들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전 초기에 대규모 손실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과 달리, 붉은 군대의 주력은 함정을 피할 용도로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1939년에 "뽈쓰까(폴란드) 동부"라는 "방벽", 즉, "영토적 창구의 확보로 "종심방어전략"이 확립됐기 때문이었다."
"쏘련의 종심방어전략은 붉은 군대 전력을 파괴하려는 독일군의 야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주꼬프 원수가 회고록에 쓴 것처럼 '우리가 만일 군 전력을 국경에 집중시켰다면 쏘련은 틀림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빠르면 7월 중순부터 동부전선에서 히틀러의 전쟁은 전격전의 역량을 상실해갔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독일인들이 군인과 민간인에 관계없이 재빠른 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기 시작했다. 베어마흐트 산하 첩보기관인 아브베르(Abwehr)의 수장을 맡았던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제독은 전방에 있던 폰 보크 장군에게 '칠흑같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를 토로했다. 후방에서 수많은 독일인들은 동부에서 전쟁이 원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자크 파우엘스(Jacques R. Pauwels)의 바르바로사 80주년 기사에 나온 내용 중 일부인데, 본문에서 제기한 주된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서 잠시 번역해봄. 도메니꼬 로쉬르드(Domenico Rosurdo)도 1차 문헌들을 인용하면서 쏘련이 전쟁 직전에 예비대 80만 명을 국경지대 투입했다고 말하는데, 이 때도 군 전력을 섣불리 투입하는 자충수는 자제했음. 프랑스가 마지노 선과 벨지끄(벨기에), 국경과 같은 전방에 병력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독일군의 우회기동으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전훈을 인지하고 있었고, 더욱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로씨야 총참모부가 저지른 실수들을 고려할 때 -삼소노프 등이 주력 군단을 동프로이센 일대에 집중시켜서 괴멸의 위험을 야기- 공격에 주 안점을 둔 전략이나 방침보다 방어전략에 초점을 두는 게 당연함. 바르바로사 초창기에는 방어자의 위치에 있었기에 언제, 어디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격할지 파악이 못된 것이 큼. -
그랜빌포스트에 올라온 자크 파우엘스(Jacques R. Pauwels)의 바르바로사 80주년 기사:
https://www.greanvillepost.com/2021/06/22/operation-barbarossa-myths-and-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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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tatic1.squarespace.com/static/5ed33bcd368e221ec227cacd/t/5ee39a1731781f54f197c5f7/1591974443348/Domenico+Losurdo+-+Stalin.pdf
위에서 언급한 도메니꼬 로쉬르드(Domenico Losurdo)에 관한 자료로는 «쓰딸린: 흑색선전의 역사와 그 비판»이 있음. 공지에 있는 반공주의 비판 가이드라인에도 수록되어 있는 책이니 세심하게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그나저나, 요새는 그래도 학계 차원에서 윤용선씨 논문에서 보듯 쏘련이 먼저 선제공격을 시작하려 했다는 수보로프 테제에 대해 기각하는 분위기고 ‘쏘련은 전쟁에 대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긴 하나 보네. ‘공산주의’ 혹은 ‘스딸린’이라서 그랬다는 식의 스테레오타입은 여전히 한계로 다가오는 부분이 있기야 하지만. - dc App
혁신이 수없이 일어나서 시기적인 적용의 문제가 있었다는 논리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방어에 적합한 교리가 없어서 초창기에 밀렸다는 것은 사실에 들어맞지 않음. 종심방어를 통해 쏘련은 침략자 군대를 섬멸한다는 확실한 방침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행된 지 1달도 되지 않아 히틀러는 자신의 본래 목적, 즉 8주나 많으면 십수 주 이내로 목표를 완수한다는 희망을 버려야 했음. 히틀러 뿐만 아니라 군인, 민간인들도 그런 절망감에 빠져 있었음. 전방에 모든 병력을 투입했다면 쏘련이 얼마 지나지 않아 패망했을 것이라는 주꼬프의 주장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음. 실제로 쏘련군은 모스끄바 전투가 개시되기 전까지 지연전을 통해 독일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데에 일정한 역량을 발휘함.
추가적으로, 영상에서도 나오는 임박한 독일 공격에 대한 '경고'에 대해 지적하자면 쓰딸린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흐루쇼프의 소위 '비밀연설' 이래로 줄곧 와전되고 잘못 알려진 부분이 큼. 모순적이고 불확실한 정보를 판별하고 식별하는 과제가 있었고 허위 정보를 판별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예: 빌헬름 카이텔이 1941년 2월 5일에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역정보를 흘린 사례)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던 쓰딸린의 1941년 5월 5일 연설에서 보듯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고 해도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음. 역정보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전에 첩보를 접한다고 해도 '방어자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적이 어느 곳에서 공격하고 진입해올지 섣불리 속단할 수 없었던 것. - dc App
오히려 전쟁의 일자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비난을 가하는 행태는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 경제적 금수조치를 취하고 전쟁이 일어나려고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진주만 공습의 시간과 장소를 예측하지 못했다고 해서 루즈벨트에게 비난을 가하는 거랑 무엇이 다른가 싶음. 유치찬란한 행위의 소산인 것. 아울러 끼릴 메레츠꼬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위에 제기한 독일의 역정보와 같은 이유로 섣불리 판별을 내리기 어려웠다고 서술하고, 주꼬프나 바실렙스끼도 비슷한 입장을 견지함. 이와 더불어서 쓰딸린이 첩보에 대해 심사숙고를 할 지언정 제재를 가하거나 '무시'하지도 않고 독일인 투항병과 같은 경우는 프라우다에 대서특필되기도 하였음. - dc App
참고로, 쓰딸린의 1941년 5월 연설은 1943년 정도로 “예상”됐던 전쟁은 실제로 그보다 더 빨리 일어날 수 있다고 쏘련측은 생각했던 것. 다만 언제 어디서 터질 지 사전에 파악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역정보나 여러 문제들로 인해 방어하는 측의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불가능하고, 그래서 초기에 피해가 많이 났던 것. 흔히 회자되는 리하르트 조르게의 경우도 진위여부에 있어 신빙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최근 들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임. - dc App
숙청 문제는 본 질문글의 주된 문제가 아니지만 좌우간 다뤄보자면, 쏘련에서 일어난 숙군은 쓰딸린의 '개인적 야욕'이나 '허영심'을 위해 시행되지 않았고 당-군의 관계(뚜하쳅스끼의 경우)와 횡령, 비리에 대한 문제가 주를 이뤘음. '경험 있는 장교'들이 주로 희생됐다는 주장은 정합성 있는 설명이 아니고 전반적인 비중에서 게티의 조사에 따르면 1937~1938년의 경우에도 평균적으로 5% 정도에 그쳤음. 일개 개인의 역량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야끼르와 우보레비치, 블류헤르 등에서 드러나듯 군의 기강이 확립되지 못하고 사령관 스스로도 횡령과 비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부질없는 일임. 당대 쏘련에서 군관구가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군대는 단일화된 집합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영상에서 말하는 소위 '지도자를 잘못 둔' 것이 아니라 당대에 필수로 요구됐던 조치를 취한 것임. - dc App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thorez/1940/relations-occupiers.htm
그리고 독일에 대한 쏘련의 전반적인 입장은 영상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몰로또프-리펜뜨로프 조약 이후 외교적 기조에서 일방적으로 독일에게 양보한 것도 아니었는데, 일례로 프랑스 공산당 내에서 1940년 여름 이후 점령 당국과 협력하려 할 때(대중조직과 신문출판의 '합법적' 발행 추진 등) 거부할 것을 주장하며 나치에 대해 저항운동에 나설 것을 종용했던 쪽은 쏘련(+토레스)이었음. 몰로또프 쏘련 외상을 통해서도 독일의 동향에 대한 주기적인 파악과 경계가 있는 등 쏘련과 독일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 동맹이 아니었음. - dc App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빠른 혁신과 유연함이 독이 되었다는 거랑 방어자의 근본적인 불리함은 맞는 지적이지만 방어교리가 부재했다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생각해보니 나치즘이 수년간 소련을 위협하는데 방어교리를 만들지도 않았다는건 말이 안되겠네요. 근데 대숙청 관련한 부분에서 새로운 궁금증이 생기는데, 대대적인 숙청이 필오할 정도로 장교들
사이에서 비리가 만연했던 이유가 뭔가요?
붉은 군대는 여러 이익집단의 연맹체적인 성격이 초창기에 강했기 때문임. 적백내전 도중 로씨야 남부와 우끄라이나에 형성된 파벌들이 존재하고 씨비리(시베리아)와 극동에서도 파벌화의 양상이 현저하게 드러났기 때문. 전시에는 중요한 역량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문민통제가 되지 않는 이익집단의 끊임없는 형성은 군의 기강에 있어 악순환을 부른 것. 군 사령관 중에서 쓰딸린과 사적으로 인연을 맺은 경우라고 해도 파벌화의 온상이 되는 경우는 숙군작업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음. 1930년대 초중반에 실시된 기동훈련과 같은 경우 보고에서는 우수한 실적을 거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병사들의 숙련도는 낮은 상황이었음. 그리고 극동과 같은 경우는 병사들의 기강 헤이(약탈 등)를 사령관들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사례가 부지기수. 중앙의 노력과 항의도 기각되는 상황이어서 쏘련 초기부터 이어진 사회악은 빠른 시일 이내로 시정되어야 했던 것.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