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쟌에서 손상된 민족적 감정에 대한 증거들은 사회적 불만과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루지야는 쓰딸린에 대한 정치적 암살과, 쓰딸린의 측근이었던 라브렌띠 베리아(쓰딸린만큼 중상과 비방을 당했던 인물)의 총살을 용서할 수 없었다. (주 - 1956년 3월 그루지야 전국에서 벌어졌던 반수정주의 인민혁명을 참고하라) 쓰딸린과 베리아는 모두 그루지야에서 태어났다. 아제르바이쟌도 쓰딸린과 베리아의 친우였으며, 지난 세기 아제르바이쟌이 배출한 호걸이었던 미르-쟈파르 바기로프(Mir-Diafar Bagirov)의 총살에 있어 동방상련의 감정을 공유했다. 한평생 볼쉐비끼이자 체끼스뜨였으며, 혁명과 내전을 경험했던 바기로프는 20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1서기로 재직했다. 바기로프는 1956년에 흐루쇼프 일당에 의해 몰증이 없는 혐의로 체포됐으며, 법정 아닌 '법정'에서 재판을 거쳐 처형당했다. 바기로프와 함께 아제르바이잔 당과 국가, 사법기구의 수많은 인사들이 바기로프에 의해 발탁됐다는 이유로 공직에서 면직됐으며 출당조치가 가해졌다. 그러나 바기로프는 노동자들과 농민들 사이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누리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영내의 도시와 농촌에서 수많은 인민들은 바기로프가 체포되자 쏘련 최고평의회에 탄원서를 내보냈다. 대중적인 인사였던 바기로프는 흐루쇼프 체제에 대한 안티테제의 상징이 됐다.
- Lavrentiy Gurdzhiev, For the Motherland, For Stalin! - From the Poltical Protests in the USSR
수정주의자 흐루쇼프를 매우 쳐라! - dc App
1960년대 초중반 아제르공화국 숨가이뜨에서 쓰딸린을 기리는 인파들이 노동절과 10월 혁명 기념집회에서 수정주의자들에게 항의한 사례도 많이 있지요. 바기로프와 마찬가지로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에 평생을 헌신했던 볼쉐비끼들은 쓰딸린의 기념비가 철거되자 이렇게 말했죠. "오늘은 쓰딸린의 차례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다. 저들은 내일 레닌의 기념비마저 철거하려 들 것이다." 레닌-쓰딸린의 유산을 온갖 중상모략과 비방으로부터 수호하고자 한 볼쉐비끼적 헌신과 투지, 의지를 되새겨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