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호 : 고난의 행군 이야기하니까 옛날 그 시절... 눈시울이 뜨거워지네요...
김련희 : 지금도 생각하면 그 엄혹했던, 그 지독했던 나날, 어떻게 이겨냈을까? 저희 딸이 94년 생인데 95년부터 고난의 행군이었으니까, 진짜 풀죽 먹이고, 국수 있잖아 200g짜리 조그만 것 요만한 한줌 가지고 다섯 식구가 멀건 물에다가 뭔가 풀 같은 것 넣어가지고 멀겋게 해서 하루 종일 먹는 거예요. 너무 어린 나이에 풀죽 먹고 이렇게 먹다나니까.
홍강철 : 평양사람들이 더 힘들었죠.
김련희 : 평양은 말할 수가 없었어요.
유영호 : 여기서는 이제 평양 그러면, 뭔가 특권층이 있는 곳이고, 이런 식으로 선전되어 있고, 그리고 뭔가 대도시니까 덜 힘들었을거다 싶은데, "대도시가 생각 외로 무지 힘들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김련희 : 제가 평양에서 고난의 행군 3년을 해보고, 지방으로 내려가서 살았잖아요. 지방에 나가니까 살만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지방은 텃밭, 내 땅이라도 뚜져 먹을 수가 있어요.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껍질, 송기떡 있잖아. 목이 꽉꽉 메가지고 구멍이 막혀서 변도 못 보는 이런 일도 있었는데, 그런 송기떡이라도, 칡뿌리 뜯어오고 이런 거 있었는데 평양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김책공업대학병원의 양복점에 있었는데, 대학 학생들, 기숙사생 모든 대학들의 70%가 기숙사생들이에요. 집에서 다니는 사람들보다 지방사람들이 많았었는데, 그 학생들, 인민들도 굶어서 배급을 못 주는데 학생들은 밥을 먹여야 되잖아요, 국가가. 근데 국가가 쌀을 못대주니까 한달 동안 온 대학이 학업을 중지하고 한 달 동안 몽땅 산에 나갔어요. 학급별로 가서 칡뿌리를 뜯어 온 거예요. 학생들 공부 못하고, 한달 동안 가서 칡뿌리 뜯어가지고 와서, 한 배낭씩 지고 와서 그 칡뿌리를 다 깨끗이 후비고, 씻어서 대학국수(공장) 거기서 국수 눌러가지고 했는데. 남쪽 사람들 흔히 먹는 칡국수, 진짜 호화스럽죠. 완전 귀한거죠. 근데 그 때 칡국수는 진짜 죽기 싫어서 먹었어요. 살아야 돼서, 살고 싶어서 먹었어요, 학생들이.
홍강철 : 돌피라는 거 있거든요. 논밭에. 논에 가면, 돌피 있잖아요. 벼의 돌피 있어요.
유영호 : 돌피, 모르겠어요. '피뽑는다' 할 때 그 피?
홍강철 : 예, 그거예요. 그 돌피를 가져다가 껍데기 벗기는 거예요. 껍질을 벗겨서 그래 간다 말이에요. 갈아서 그거 돌피 가지고 이런 '꼬장떡'이라고. 그런 것도 만들어 먹고 그랬죠. 도토리, 산에 올라가서... 그 때 또 고난의 행군 때 도토리 참 많이 열렸어요. 밤도 많이 열리고, 왜 그랬는지...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그랬거든요. "고난의 행군, 도토리가 살렸다"고. 미국놈들이 우리가 굶겨죽이지 않은 게... "도토리 잘 될 줄 생각 못했다"는 거죠. "그걸 타산 못했다"고.
“평양 사람이 더 잘 산다”는 고전적인 논변을 타파하는 일화인 것 같습니다. 평양이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논리도 말이 아니죠.
도시보다 시골이 사정이 더 나았다는 김련희 씨의 말이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