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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반공주의 도서에 따르면 집산화는 당의 지도부와 스딸린에 의해 ‘강요’되었고 테러를 통해 수행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거짓이다. 집산화라는 격렬한 사건이 일어난 동안, 가장 억압받던 농민대중에게서 본질적인 추진력이 나왔다. 흑토 지대에서 한 농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바뜨락(batrak,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생을 보냈다. 10월 혁명은 나에게 토지를 주었고, 나는 해마다 돈을 빌렸으며, 야윈 말을 얻었고, 나는 농지에서 일할 수 없고, 아이들은 넝마를 걸치고 굶주리며, 쏘비에뜨 당국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의 농장을 어떻게든 개선시킬 수 없다. 나는 오직 하나의 출구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트랙터 대열에 참가하여, 그것을 지지하고 진행시키는 것이다.’


린 바이올라(Lynne Viola)는 이렇게 썼다.:


‘비록 중앙에서 시작하고 승인되었지만, 집산화는 상당할 정도로, 농촌의 지역과 지구에 있는 지방 당과 정부 기관의 자유롭고 진취적 기획에 의하여 특별한 정책이 되었다. 집산화와 집단 농장은 스딸린과 중앙 당국에 의해서라기보다 훈련되지도 않았고 권한도 없는 농촌의 관리들과, 자활에 맏겨진 집단 농장의 지도자들의 실험에 의해서, 후진적인 농촌의 현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바이올라는 근본적인 하부(the base)의 내적 동력을 정확하게 강조한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그녀의 해석은 한쪽만을 본 것이다. 그녀는 스딸린과 볼셰비끼당이 시종일관 추구했던 대중 노선을 놓치고 있다. 당은 일반적인 방향을 설정했고, 이러한 기초 위에서 하부와 중간 간부들의 실험이 허용되었다. 그 다음에 하부에서 나온 결과들을 평가하여 새로운 지시, 수정, 개정안을 작성했다.


바이올라는 계속 이어갔다:


‘국가는 집단에 의해, 그리고 법령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농촌의 행정에서, 정부의 발언권을 강화시켜주거나, 정부정책의 정확한 수행을 보장하는 하부 조직이나 인적 자원이 없었다.... 농촌에서 스딸린 체제의 기반은 국가통제의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통제와 정비된 행정 계통의 완전한 부재에 있었다. 그 결과 그것은 농촌에서 기본적인 통치 도구가 되었다.'


실제로 진행되는 집산화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얻어진 이러한 결론에 대해 두 가지 논평을 할 수 있다.


‘어느 곳에나 있는 당 관료제도’에 의해 실행되는 ‘쏘련 공산당의 전체주의’라는 논제는 스딸린 하의 실제적 쏘비에뜨 권력과는 어떤 진정한 관련도 없다. 그것은 현실의 사회주의에 대한 부르주아계급의 혐오를 보여주는 선전 문구이다. 1929년에서 1933년까지, 쏘련에는 기술적인 수단이나, 필요로 되는 자질을 갖춘 인원이나, 계획적이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집산화를 지도하기에 충분한 당 지도부가 없었다: 전능하고 전체주의적인 국가로 쏘련을 묘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농촌에서 집산화를 향한 근본적인 충동은 가장 억압받는 농민들에게서 일어났다. 당이 집산화를 준비하고 시작했으며 도시출신의 공산당원들이 지휘하였으나, 이러한 농민들의 습성과 전통의 거대한 격변은, 가장 가난한 농민들이 집산화의 필요성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억압이 동력의 기본적인 도구가 되었다’라는 바이올라의 판단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도구는 농민 대중의 동원, 의식의 향상, 교육, 그리고 조직화였다. 물론, 이러한 건설적인 사업은 ‘억압’을 요한다. 즉, ‘억압’은 발생했고, 구체제의 사람들과 오래된 습성에 맞선 쓰라린 계급투쟁이 없이 그것(건설적인 사업 ― 역자)은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


‘혁명은 정규적인 행정 경로를 통해서 실행되지 않았다: 그 대신 국가는 농촌의 관료주의를 방지하기 위해서, 일반 당원과 노동계급의 핵심적인 부문에 직접 호소했다. 노동자들에서 그리고 다른 도시에서 기간요원을 대규모로 충원한 점과, 관료주의를 방지한 점이, 새로운 제도의 기초를 놓기 위한 획기적인 정책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 뤼도 마르텐스, 《쓰딸린 바로 보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