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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뜨로츠끼가 쓰딸린 시대에 건설된 사회주의 사회를 깎아내리기 위해 관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관료주의" 혁명으로서 10월 혁명에 대한 '지분'은 쓰딸린 자신에게 있지 않다. 10월 혁명 직후 멘쉐비끼는 당 관료들이 자의적으로 관용 자동차를 이용하고, 호화 아파트와 다차에서 생활을 영위하며, 중앙집권화된 관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고 비난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담긴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 당시 레닌과 함께했던 뜨로츠끼는 추후 이와 같은 주장을 차용했고, 쓰딸린에 맞서기 위해 멘쉐비끼와 다를 바 없는 언어를 구사했다.


"모든 국가에서 행정을 관장하고, 통제하며,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개인들의 집단은 언제나 존재감을 여김없이 드러냈다." - 레닌, 《국가와 혁명》 中


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행정을 관장하고 통제하며, 영향력을 뿌리내리는 과제는 언제나 일정한 층위의 집단과 연계되어 있었다. 인민을 지배하는 통치 집단이 있는 한, 이와 같은 집단이 권한을 남용할 위험성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다. 쏘련에서 존재했던 관료제는 쓰딸린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 쏘련의 관료주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분업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사회주의 하에서 관료주의는 노동의 분업 등이 사라지고 공산주의 사회가 성립됐을 때에야 비로소 조락한다. 공산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좋고 싫던 관료주의와 얽힐 수밖에 없다. (역자 주 - 관료주의는 개인의 주관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닌, 옛 사회의 잔재에 해당된다. 레닌의 표현을 빌리자면 '매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일정 기간 동안 존속하며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에 따라, 그리고 끈기있는 투쟁을 통해 관료주의의 위험성이 비로소 감소한다.) 레닌과 쓰딸린은 역사적 조건과 현실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으며, 관료주의가 없는 사회주의 질서를 지향했다. 레닌과 쓰딸린은 관료주의에서 오는 위험성을 깨닫고 수 차례에 걸쳐 당에게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들은 아래로부터 엄정한 비판을 통해 이러한 관료주의를 통제하고자 했다. 한편으로, 진정한 맑스주의자로서 이들은 당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관료제의 도움 없이 국가를 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들은 관료주의와의 투쟁이 쁘띠부르죠아에 대한 투쟁처럼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한 차례의 혁명만으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관료주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객관적 조건이 반드시 존재해야 했다. 경제발전은 필수적으로 요구됐다. 대규모 공업이 성장해야 했고, 프롤레타리아의 비중이 수적으로 증가해야 했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의식 또한 마찬가지로 증진되어야 했으며, 교육과 문화가 발달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며 장기간 동안 소요되는 문제였다.


쓰딸린은 관료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당원들의 정치적 의식 수준을 높이고, 당 내에서 민주주의를 장려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연방공산당(볼쉐비끼)는 새로 입당한 당원들을 훈련하고, 정치적 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당 학교를 개설했다. 1930년에서 1933년 사이에 당 학교는 5만 2천 개에서 20만 개로 증가했다. 당 학교에서 훈련받은 당원들의 숫자는 100만 명에서 450만 명으로 증가했다. 당원의 숫자는 150만 명(1929)에서 500만 명(1937~1938)명으로 늘어났다. 당원들의 정치적 의식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에 따라 향상된 것이었다. 당과 국가에서 관료제에 맞서 투쟁하고 민주주의를 장려할 기반은 마련되어가고 있었다.


- Tolety J. Rao, 《모셰 르윈에 대한 우리의 '응답'》 中




II.


1934년 12월 끼로프가 암살된 후에도 이러한 기조는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평당원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이 당 관료제 내부의 부패한 관료들에 맞서 활기차게 벌어졌다. 당 지도부는 지도적 간부들로 하여금 당원자격을 검증하고 자아비판을 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서, 당 지도부는, 당내 민주주의를 보장하고 권력의 남용을 저지할 수 있도록 당규를 올바로 적용하기 위한 조건들을 정비했다. 당 지도부는 또한 지방 지도자들과 당원들의 소통을 확대할 것도 요구했다. 당 지도부는 그것을 비인간적인 당내 관료주의를 제거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


쓰딸린은 다음에 당 사업에서의 수많은 오류들과 발생한 오류들을 수정하기 위해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대책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 그는 세포 지도자들로부터 지구(地區) 및 쏘비에뜨 공화국들의 당 조직의 지도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지도적인 당 간부들을 위한 체계적인 학습을 제안하면서 연설을 끝맺는다.


당 세포 서기들을 당적으로 교양하고 재교육하기 위해서는 각 지구의 중심에 4개월 과정의 '당 강좌'가 개설되어야 합니다.


지구 조직의 1서기들을 정치적으로 재교양하기 위해서는 쏘련에, 말하자면 10곳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들에 8개월 과정의 '레닌 강좌'가 개설되어야 합니다.


시당 서기들을 사상적으로 재교양하고 정치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서는 쏘련공산당(볼) 중앙위원회 산하에 6개월 과정의 '당 역사 및 정책 학습 강좌'가 개설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6개월 과정의 '국내-국제 정책협의회'가 쏘련공산당(볼) 산하에 조직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각 지역과 변경의 당 조직들 및 각 민족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1서기들을 보내야 합니다.


- 마리오 소사, 《진실이 밝혀지다》, 113쪽; 165~166쪽 中




III.


"극히 자주 당의 일꾼들이, 객관적인 이유가 아니라, 즉흥적이고 주관적이며 속물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이유로 선출되고 있습니다. 극히 자주 친지들, 친구들, 동향 사람들, 개인적으로 헌신적이었던 사람들, 상관에게 아부하는 데 능슥한 사람들이, 그들이 정치적, 업무적으로 적합한지 여부를 고려함이 없이 선출되고 있습니다. 자연히, 책임감 있는 일꾼들로 구성된 지도 집단 대신에 우리는 친밀한 사람들로 구성된 소규모의 가족을, 즉 노동자협동조합을 갖게 되는데, 그 구성원들은 무사안일하게 살려고 하고, 서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하며, 내부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서로를 칭찬하며, 때때로 무기력하고 메스꺼운 성과 보고서들을 본부로 보냅니다. 그러나 한 가족적 분위기에서는 업무상 결함을 비판하거나 지도자들이 그 업무를 자아비판할 어떤 여지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가족적 분위기는 아첨꾼들을, 즉 자존심이 없는 사람들을 양성하기에 좋은 여건을 조성하고 그 때문에 그것은 볼쉐비즘과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쓰딸린은 당 관료들을, 단지 그들의 상관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하게는 평당원들에 의해서 통제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어떤 동지들은 오로지 지도자들이 작업 결과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는 하향식 평가로만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물론 하향식 평가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작업을 완료하였는지 검증하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향식 평가로서 평가 업무 전체가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다른 종류의 평가로 상향식 평가가 있는데, 이것은 지도자들이 인도하는 대중들이 지도자들을 평가하고, 지도자들의 실수에 관심을 갖고, 그리고 이러한 실수들을 교정할 수 있는 방법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평가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입니다."


- 마리오 소사, 같은 책, 167~168쪽 中



IV.


중앙위원회 2월 회의에서 통과된 중요한 결의 중 하나는 정확하고 엄격한 민주적 규정에 따라 비밀투표로 사람을 선출하는 당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중앙위원회 회의 2주 후인 1937년 3월 20일에 '당 조직 선거'에 관한 중앙위원회의 포고가 발표되었고, 언론에서는 자아비판과 당 내부 민주주의, 지도적인 당 관료들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중앙의 지도부는 부패한 당 지도자들이 선거 집회들을 교묘하게 조종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선거는 1937년 4월에 실시되었다, 선거 집회들에서는 현지 지도자들이 광범하게 비판을 받았다. 토론과 비판을 위한 당 회의들은, 예전에는 당 규율이 부족하거나 비행을 저질렀다며 평당원들을 비판하던 공개 토론의 장이었다. 이제,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제는, 지방 당 지도자들이 비판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들 회의에서는 대체로 많은 당원들이 당위원회들에 임명되었다. 토론은 길어졌고, 회의록은 세세하게 작성되었다. 마지막에 비밀선거들이 실시되었다. 스몰렌스끄 문서고에는 투표지를 포함하여 당 선거와 관련된 많은 문서들이 있다.


(...)


당 선거의 전국적인 결과가 이후 언론에 발표되었다. 1937년 5월에 알려진 선거 결과에 의하면, 5만 4천 개의 당 조직 가운데 55%에서 이전 지도자들이 교체되었다. 이는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전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두 번째로는 부적격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는 정치인들을 내쫓기 위해 필요한 집단적인 힘을 평당원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불만을 중앙위원회 회의가 공식화시켰음이 명백해졌다.


- 마리오 소사, 같은 책, 174~176쪽 中




V.


쏘비에뜨 정부는 이전 체제로부터 물려받았던 후진성, 무지와 문맹과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에 직면했는데, 그것은 낡은 국가의 관리들을 행정기구의 실질적인 부분들에 활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로씨야에서 새로운 권력의 승리와 함께, 기회주의의 요소들은 그들의 개인적 이익을 채우고자 당과 국가 기구에 들러붙었다. 무지와 문맹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러한 사회계층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웠다. 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생산 체제에서 새로운 관계가 지배하는 것이 촉진되어 노동자들의 통제를 향상시키는 데에 반영되고, 행정 기구의 복잡성을 단순화하고, 극복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한 문제들은 레닌과 쓰딸린의 당 문서와 저작들에서 강조되고 있었다. 1920년대 기회주의 분자들을 당에서 추방하고 당 구성을 노동계급으로 확보하려는 방침을 개선하기 위해 당원들의 숙청과 재등록 조치가 취해졌다. 산업노동자들로 당의 사회적 구성을 향상시킬 필요성은 또한 쏘비에뜨 권력 이후 국가장치의 관리에 대해, 제국주의 간섭 이후 산업단위에서부터 군 전선까지 당의 많은 지도적인 당원들을 이동시킬 필요 때문에 나왔다. 이 때문에 산업노동자나 농업노동자들과 함께 당을 성장시키기 위해 특정한 목표들이 설정됐는데, 생산에서 차지하는 위치상 그들은 사회적 노동과 공산주의 생산관계의 전달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당 기관들의 집중 관심 사안이었다. 볼쉐비끼 전연방공산당/쏘련공산당(AUCP(b)/CPSU)의 다양한 문서에는 당의 조직적인 느슨함, 당의 사회적 구성의 변화, 이데올로기적 업무의 과소평가, 상황을 미화하는 현상, 허약함의 은폐, 생산단위와 행정기구의 관리자들의 자기중심적 의도 등이 다각도로 확인되고 강조되었다.


위의 내용은 쏘비에뜨 권력과 특히 "쓰딸린 시대"의 "전체주의"에 관한 신화(mythology)가 얼마나 현실과 다른지를 보여준다. 이 문제들이 해결됐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상관없이 이러한 현상들은 공산당이 공산주의 관계를 수립, 강화하고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사회주의 권력 과정 동안 당이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극복될 수 있다는 방향성은 있었다.


이 전체 과정을 통해, 약점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조차도 공산당이 변치 않았던 것에 한해서는 공산당의 특유한 양상들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는 1950년대까지 공산당의 지도적인 간부들이 물질적인 혜택과 수입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 그리스 청년공산주의자(KNE),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쏘련 사회주의 경제, 권력, 역사왜곡에 대하여》, 92~93쪽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