뽈쓰까(폴란드)에서 농업은 대공업 부문보다도 많은 적자와 암울한 전망이 수반됐던 경제의 약한 고리로서 기능했다. 고무우까처럼 기에레끄도 뽈쓰까 농업의 사적 부문을 공고하게 다지고 강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주저하지 않았다. 공식 통계에 의하면, '재분배' 과정은 70년대 전반을 통틀어 세기를 더해갔다. 이 당시 "재분배" 정책으로 인하여 국유지 중 9만 헥타르는 1973년에 개인 소유 농장으로 이관됐으며, 1974년에는 8만 2천 헥타르가, 1978년에는 9만 1000 헥타르가, 그 다음 해에는 15만 헥타르가 사유지로 판매됐다. 개인 농장의 급격한 수익 증가는 일어나지 않았고, 서방에서 시행된 온갖 종류의 방식들을 농업에 도입하기 위해 반복되는 시도들도 기에레끄가 품었던 결과를 안겨주지 못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노동력의 이동현상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비록 농촌에서 여전히 소규모 토지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1971~1975년 사이에 93만 8천명의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했다.) 미경작 토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소규모 자산을 거느리고 있었던 농민들은 당국의 요구와 무관하게 수익성이 높은 품목들(채소, 꽃, 과일 등)을 위주로 농산품들을 재배했다. 뽈쓰까 통일노동자당(PUWP)의 반(反) 맑스주의적 정책으로 인한 결과, 뽈쓰까 농업에서 성황을 이루며 "자라났던" 모든 폐단들을 일일히 열거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농업 부문이 퇴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반드시 명시될 필요가 있다.
개인농장 350만 곳과 국영농장 4500곳, 농촌협동조합 1600곳으로 구성된 농업 부문은 국가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적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비록 1956년 이래로 매년마다 곡물을 들여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곡물의 수입 비중은 1970년대에 이르러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달았다. 1975~77년 사이에 뽈쓰까는 곡물 1500만 톤을 수입했다. 1976~79년에 3100만 톤보다 많은 곡물을 들여왔을 때, 뽈쓰까는 농산품을 수입하는 데에 석탄의 수출로 얻은 거의 대부분의 실물자산을 소모해야 했다. (뽈쓰까는 세계 유수의 석탄 수출국 중 하나로 손꼽히는 나라이다. - 저자 주)
- 출처: Spiro Dede, 《The Counter Revolution within the Counter Revolution》, Tirana, 1983, pp. 172~173.
수정주의는 역시 독소군요 - dc App
외채에 관해서도 할 말은 많은데, 저 당시 상황이 말을 잇지 못하게 하죠. 서방 국가들에 대한 무역의 의존도도 심화되어 가고 있었고, 고무우까처럼 물가가 폭등하니 가격을 인상하지 않나, 여러모로 사회주의에서 일탈하는 행보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