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고르 피할로프(Igor Pykhalov)는 기근이 로씨야 제국에서도 지속적으로 출현했고,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도 만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쏘비에트 시기에 이르러, 이전 시대까지 만성적으로 일어났던 기근은 명실상부하게 자취를 감췄다. 대규모 기근은 1921년 내전 이후와 1932~1933년, 대조국전쟁 종전 이후 1947년에 세 차례에 걸쳐 출현했을 뿐이었다. 짜르정 치하의 로씨야에게 기근이 연례행사처럼 인식됐다면, 쏘비에트 시기에서 기근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집산화 이후의 기근을 논할 때 1932~1933년 기근은 인재라고 쉽게 단언할 수 없다. 기근은 집산화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몇몇 지역에서 주로 일어났지만, 쏘련 당국은 당대에 중앙, 혹은 지역에서 현지인들을 몰살하기 위한 할당량을 세워놓지 않았다. 쏘비에트의 당국자들이 우끄라이나인과 까자흐쓰딴인들만 별도로 선별해서 피의 참극을 일으킬 계획을 세울 예정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이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다"고 이고르 피할로프는 말한다.
(…) 이고르 피할로프는 그와 같은 기근 희생자들의 숫자에 대한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쏘련 전국과 우끄라이나, 까자흐쓰딴의 사망자 수치가 알려진 것보다 10배 더 적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까자흐족이 중국과 같은 인접 지역들로도 거처를 옮겨다닌 유목민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치를 계산할 때, 자연사로 인해 인구의 감소가 발생했는지, 인위적이며 의도적으로 촉발됐는지 판별하는 과정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피할로프는 말한다.
이고르 피할로프는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이 1930년대에, 기근과 정확히 똑같은 시기에 민족적 체계를 형성했기 때문에(민족으로서 까자흐인들이 말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문화의 발전이 진척됐기 때문에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은 명백하게 잘못됐다. - 역자 주), 로씨야의 매체인 나까누네(nakanune.ru)와의 인터뷰에서 까자흐쓰딴 독립의 문제를 별도로 상세하게 다뤘다. 피할로프는 쏘비에트 정부가 '제노사이드'를 기획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기괴한 발상이며, 오늘날 독립국으로 변한 까자흐 쏘비에트 공화국을 쏘비에트 정부가 만들었다고도 말했다. 피할로프는 역사에 대한 우끄라이나 당국의 입장-맹위를 떨치고 있는 민족주의와, 내전의 발단으로 이어진 로씨야 혐오증-이 야기했던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까자흐쓰딴의 민족주의 정객들이 자국에서 우끄라이나와 똑같은 사태를 원한다면, '기근'을 기리기 위해 더 많은 기념비들을 건립해야 하며,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하여 반로씨야 선전을 수행하고, 쏘비에트 권력에 먹칠을 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피할로프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주의의 대두는 일국 차원에서의 파괴와, 더 나아가 제 2의 우끄라이나 사태를 재탕하기 위해 가장 '최적의' 요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 까자흐쓰딴 사회주의 운동, «1932~33년 까자흐쓰딴 기근은 집단학살이었는가?» 에서 발췌.
번역의 대본은 In Defense of Communism 홈페이지에 영역된 까자흐쓰딴 사회주의 운동의 기사(
https://www.idcommunism.com/2019/03/was-the-famine-of-1932-33-in-kazakhstan-a-genocide.html)를
참고하였음.
1947년 기근은 근거없는 개솔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