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1년 당시 쏘비에트 우끄라이나의 인구가 불과 수년 전 수백만 명의 아사자를 나은 홀로코스트의 잔재들과 생존자들로 이루어져 있었거나, 생존자들이 1932~1933년 기근에 대해 우끄라이나인들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제노사이드로 인식했다면 파씨즘은 의심의 여지 없이 격렬한 환영을 받았을 것이고, 쏘비에트 우끄라이나의 인민들은 유대인 생존자들이 나치에 대해 보일 법한 반응처럼 쏘련의 방어에 있어 미적지근한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 Tottle, Douglas. Fraud, Famine, and Fascism. Toronto: Progress Books, 1987, p. 102





2.


기근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뱟까(現 끼로프 일대 - 주) 북부에서도 마주쳤던 여름의 반(半)건조성 기후대는 1932년 당시 쏘비에트 연방의 남부 지역 전역에 걸쳐 흉작을 야기했다. 둘째, 집산화를 둘러싼 투쟁은 작황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집산화는 관료적 규범에 바탕을 둔 질서정연한 과정이 아니었다. 집산화는 당의 지원으로 빈농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빈농들은 "꿀락"의 토지를 몰수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집단농장에 기초한 경제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는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당은 1930년 무렵부터 일찍이 실수를 밝혀내고 과오를 정정하기 위해 당원들을 파견했다. (...) 1933년의 강우량은 시의적절했다. 당은 꼴호즈의 운영을 돕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바탕으로 선별된 당원들을 농촌에 파견했다. 당원들은 성공했다. 1933년의 풍작 이후 농촌의 상황은 경이로운 속도로 급격하게 개선됐다.


- Tottle, Douglas. Fraud, Famine, and Fascism. Toronto: Progress Books, 1987, p. 96-97





3.


쏘비에트 정부는 소량의 곡물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을 끊임없이 배포했다. 쏘련 전역이 식량 부족에 실질적으로 직면했고, 곡물 수매량과 배분량에 대한 정보가 의심의 여지 없이 정확했다는 사실에 미루어볼 때, 당대의 소련이 명실상부하게도 극심한 식량 부족에 부딪혔기 때문에, 기근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1931년과 1932년의 흉작에 있었다.


- Tauger, Mark. Natural Disaster and Human Actions in the Soviet Famine of 1931-1933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2001, p. 5





4.


애플바움은 1930년대 초반의 식량부족 사태가 "이전보다 많은 곡물을 생산하려는 농민들의 동기를 총체적으로 무너뜨린" 식량 부족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정부의 곡물 수매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87) 하지만 이후에는 1930년의 수확량이 1929년의 숫자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도 말한다. 애플바움의 말대로, 농민들의 동기가 "완전히 일소"됐다면 이와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애플바움은 또한 1929~1930년 당시 쏘련의 기근 구제책(82, 108)에 대해서도 논하지만, 흉년과 기근에 대한 구제가 농민들에게 동기를 마련해준 경위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단지 1928~29년 곡물 위기 도중에 쏘련 지도부의 상당수가 우끄라이나 민족주의를 위험요소로 지목했고, 우끄라이나의 민족주의 계열 조직들에 대한 약식재판을 열며, 농민들의 저항이 민족주의와 연계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이었다.


(...) 애플바움은 현대적 농업에 대한 쓰딸린의 문헌들을 인용하지만, 쏘련의 "과학에 대한 우상화"로 폄하하며, 정치인들과 계획기구의 관계자들이 기존의 농업보다 기계화됐고, 과학적 영농에 기초했던 미국식 농업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염두하지 않는다. 애플바움은 스스로도 자인한 것처럼, 연이은 흉년이 쏘련의 정치인들로 하여금 농업의 기계화를 일깨운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애플바움은 오히려 농업 집산화에 대한 1928년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을 두고 농민들을 "착취"하고, 이들이 "공업화"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취지의 논조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농업의 현대화는 1928년의 총회들에서 중대한 문제였다. 애플바움은 1929년에 쏘련이 출중한 유전학자인 니꼴라이 바빌로프의 주도로 농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지 않았던 중앙농업연구원(VAKhNiL)을 창설했다는 사실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


애플바움은 곡물 수매계획의 축소에 대한 1932년 7월 쓰딸린과 까가노비치의 대화를 인용하지 않을 뿐더러, 쓰딸린과 까가노비치가 실제로 곡물의 수매 비중을 축소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 다루지 않는다. (179) 애플바움은 또한 1933년 겨울에 쓰딸린이 "곡물 수매량을 축소할 것"을 거부했다고 주장한다. (193) 그러나 애플바움이 "인용"한 자료들에서는, 쓰딸린 정권이 우끄라이나에서 곡물 수매량의 목표치를 4배로 줄였고, 1932년 5월에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130만 톤이 감소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우끄라이나 지역의 수매량에서 10% 이상의 비중을 점했던 65만 6천톤으로, 1932년 10월에는 115만 톤이 추가적으로, 그리고 1933년 1월에는 45만 9천 톤으로 줄어들었다. 1932년 5월 이후 일련의 조치들에서 쓰딸린은 굶주리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 우끄라이나의 요구에 응답하여 곡물의 수매량을 감축했다. 쓰딸린은 우끄라이나에 식량을 지원하면서, 애플바움이 언급하지 않는 기타 지역들의 요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마침내 1933년 2월 5일, 쏘비에트 정권은 지역 관리들에게 곡물의 수매를 멈출 것을 요구했고, 종자의 배양과 식량구호의 공급을 개시할 것을 주문했다.


- Tauger, Mark, 《Review of Anne Applebaum's "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5.


1931년은 볼가 지역과 시베리아 서부, 우끄라이나 일부와 기타 지역에서 대규모 기근이 일어난 해였다. 이를 인지했던 쏘련 체제는 수매된 곡물을 구호식량으로서 기근 피해지역에 공식적으로 재(再)배포했으며, 농업학자들로 구성된 회의를 통해 가뭄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고, 제안된 조치들의 상당수는 실행 단계로 옮겨졌다.


- Tauger, Mark. “Statistical Falsification in the Soviet Union: a Comparative Case Study of Projections, Biases, and Trust.” The Henry M. Jackson 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 University of Washington, 2001, p.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