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갤 사람들은 중국 소련에 대해 잘 알고 또 긍정적으로 보시는 분들이 많으거 같더군요. 그래서 소련이랑 중국 역사에 대해 궁금한거 몇 가지 정도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1. 흐루쇼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시던데 정확히 흐루쇼프가 소련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길래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시는건가요? 저는 흐루쇼프가 스탈린 때 엄격함과 잔혹함에서 벗어난 개혁적인, 하지만 실패한 지도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건가요?
2. 베리야와 말렌코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스탈린이 죽었다 같은 영화를 보면 베리야는 성욕과 권력에 미친 독재자로 나오고 말렌코프는 무능한 꼭두각시로 나오던데 이것이 사실인가요? 또 그 밖에 카가노비치 불가닌 몰로토프 미코얀 등은 어떤 사람들인지 간략히 알려주실 수 있나요?
3. 흐루쇼프가 나쁜 놈이라면 그 흐루쇼프를 몰아낸 브레즈네프 같은 보수파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4. '크레믈린의 위기'라는 게임에선 체르넨코가 죽은 후 그 후계자 후보로 고르바초프 말고도 로마노프, 그리신, 그로미코가 있는 것으로 나오더군요. 이 세 사람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특히 로마노프는 네오 스탈린주의자로 나오던데 레닌갤 분들은 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시나요?
5. 문화대혁명을 검색해 보면 4인방이 이를 주도한 걸로 나오던데, 어디서는 이 4인방이 장제스 시절 4대가문보다 악독하고 부패한 인간들이라고 하던데 이들에 대해서 레닌갤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칭은 정말 싸이코패스였나요?
6. 크레믈린의 위기를 만든 제작사에서 '중국: 마오의 유산'이라는 게임도 만들었던데 이 게임의 주인공은 화궈펑이라는 사람이라 하더군요. 화궈펑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질문이 좀 많아서 죄송합니다.
1. 흐루쇼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시던데 정확히 흐루쇼프가 소련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길래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시는건가요? 저는 흐루쇼프가 스탈린 때 엄격함과 잔혹함에서 벗어난 개혁적인, 하지만 실패한 지도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건가요?
2. 베리야와 말렌코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스탈린이 죽었다 같은 영화를 보면 베리야는 성욕과 권력에 미친 독재자로 나오고 말렌코프는 무능한 꼭두각시로 나오던데 이것이 사실인가요? 또 그 밖에 카가노비치 불가닌 몰로토프 미코얀 등은 어떤 사람들인지 간략히 알려주실 수 있나요?
3. 흐루쇼프가 나쁜 놈이라면 그 흐루쇼프를 몰아낸 브레즈네프 같은 보수파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4. '크레믈린의 위기'라는 게임에선 체르넨코가 죽은 후 그 후계자 후보로 고르바초프 말고도 로마노프, 그리신, 그로미코가 있는 것으로 나오더군요. 이 세 사람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특히 로마노프는 네오 스탈린주의자로 나오던데 레닌갤 분들은 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시나요?
5. 문화대혁명을 검색해 보면 4인방이 이를 주도한 걸로 나오던데, 어디서는 이 4인방이 장제스 시절 4대가문보다 악독하고 부패한 인간들이라고 하던데 이들에 대해서 레닌갤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칭은 정말 싸이코패스였나요?
6. 크레믈린의 위기를 만든 제작사에서 '중국: 마오의 유산'이라는 게임도 만들었던데 이 게임의 주인공은 화궈펑이라는 사람이라 하더군요. 화궈펑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질문이 좀 많아서 죄송합니다.
1. MTS를 통해 농기계 등 생산수단을 대여의 한 수단에서 상품으로 바꾸어 사회주의 농업의 전망에 방해를 놓았죠. 농기계가 보급된다고 해도, MTS를 통한 생산수단의 계획적인 활용이 부재할 때 낭비되는 비중은 높아집니다. 흐루쇼프는 MTS를 폐지하여 소련 농민들이 비싼 가격으로 농기계를 사고, 팔도록 만들었고, 농촌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모순을 조장했습니다. 스딸린 시기 집단농장에서 개인 부업은 10%에 그쳤고, 그마저도 기계화된 생산 수단의 광범위한 활용을 통해 감소하는 추세를 보임으로써 공적 노동의 효율성이 증명되었죠. 그러나 농업에서 계획적 경리가 사라진 이후 트랙터의 손실량이 늘어났을 뿐더러, 농기계(생산수단)의 능률은 1마력당 32.6 헥타르의 면적에 대한 경작에서 큰 폭으로 감소하게 됩니다.
1-1. 흐루쇼프는 20차 당 대회 당시 '비밀연설'과 1957년 6월의 쿠데타를 통해 당권을 장악한 사람이죠. 쓰딸린의 "공포정치"를 폭로했다고 알려진 '비밀연설'은 대중적 지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극히 한정된 범위에 있던 당원들을 대상으로 행해졌고, 그마저도 몰로또프와 까가노비치 등의 반대로 흐루쇼프는 한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공식 석상에 나오더라도 쓰딸린의 공헌을 칭찬하는 어조로 연설을 해야 했고 당 내에서 반대도 만만치 않게 존재했죠.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사이에 생겨난 쏘련의 맑스-레닌주의 조직의 문건에 따르면 평당원의 상당수도 몰로또프, 까가노비치와 마찬가지로 쓰딸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들어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을 규탄했습니다.
1-2. 비당원 대중들도 마찬가지로, 흐루쇼프에 반대하여 찌플리스(트빌리시)와 여러 곳에서 쓰딸린을 지지하며 수정주의 세력에 대해 전면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비밀연설'을 했던 흐루쇼프와 주꼬브를 비롯한 동조자들은 베리아 사후 넘겨받은 무력기관을 통해 대중의 요구를 짓누를 수밖에 없었고요. 1927년 15차 당 대회와 1956년 20차 당 대회는 전자가 대중의 지지와 요구에 부응하여 집산화와 문화혁명, 쓰따하노프 운동으로 이어지며 노동자계급의 우위를 확고히 했다면 후자의 경우 정반대에 해당됐다는 점에서 상이했죠. 흐루쇼프의 축출을 위해 1957년에 상임위원회 차원에서도 움직이게 되지만, 군을 비롯하여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었던 흐루쇼프가 주꼬프를 활용함으로써 종래에 당이 가지고 있던 우위는 무너졌죠.
1-3. 흐루쇼프는 소련을 '개혁'하려 시도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쏘련의 와해에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당과 국가기구의 관계는, 예를 들면 군과 같은 경우 주꼬브가 쏘련 군대의 공식 기관지에 '당이 더 이상 군의 사정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불평한 것처럼 당의 우위가 보장됐고, 국가기구와 동일시되지 않았죠. 그러나 1957년 6월 이후 당과 국가기구의 관계는 당이 국가기구와 유사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1960년대 초반 '산업당'과 '공업당'으로 당 기구를 나눈 것은 국가기구의 조직 구성에 당을 등치시킨 것으로 되는데, 공산당-노동자당의 정치적 지도가 무너지고 쏘비에트의 기능이 약화되는 결과를 야기했습니다. 당원을 행정적 업무를 맡았던 국가기구의 기관원과 동격으로 놓은 것이지요.
1-4. 쏘브나르호즈 개혁도 쏘련 사회의 내파에 있어 1965년 개혁과 함께 상당한 역할을 맡았죠. 중앙집중계획의 배격과 경제기구의 분권화를 위주로 한 정책은 국가계획의 완수에 차질을 빚게 되는 계기가 됐고, 쏘브나르호즈(국민경제회의)가 105여 곳에 설치된 결과 국가기구에 속한 성원들의 비중은 경제관리의 '간소화'를 명목으로 했지만, 실제 상으로는 상당한 수준으로 확대됩니다. 야금과 화학 공업이 전체 중에서 23%밖에 완수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지방 공화국의 계획조차도 전부 완수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중앙계획경제 하에서 이루어졌던 계획의 제반 요소들이 무너지게 된 것이죠. 훗날 민족주의로 변하게 되는 지역주의가 발생한 배경도 쏘브나르호즈에 대한 계혁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고요.
흐루쇼프의 '개혁'이 오히려 소련의 사회주의를 약화시키고 공산당을 분열시키며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말씀이군요. 개혁가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오히려 반동적인 독재자의 면모가 더 강했다는거구요. 그나저나 전쟁 영웅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주코프 장군이 공산당의 문민통제에 반대하고 또 그걸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건 좀 충격적인 면모군요.
2. 베리야는 쓰딸린 사후 19차 당 대회 당시 상임위원회와 중앙위에 선출된 쓰딸린의 지지자들을 몰아내는 데에 전력을 다했고, 1936년 헌법 제정 당시 미꼬얀과 함께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없애기 위한 일환으로서 시행된 선거구에 대한 개편과, 내전 당시부터 인맥과 혈연, 지연을 통해 지속됐던 관습적인 풍토를 타파하기 위해 제시됐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확대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베리아가 추문을 부렸거나, 각종 기행을 일삼았다는 주장은 자극성 있는 소재를 활용하는 반공주의에 입각한 주장일 뿐더러, 그 자체로서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말렌꼬프의 경우는 쓰딸린 사후 "신노선"을 내걸며, 소비재 위주의 생산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주자로, 생산수단(1부문)에 대한 투자를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경향을 보였고요.
베리야가 수정주의 독재자라는건 맞지만 소아성애자라거나 강간마라거나 하는 사생활에 대한 비난은 왜곡된 측면이 강하다는거군요. 말렌코프가 소비재 생산을 늘리자고 했던건 흐루쇼프랑 비슷하네요. 그러면 스탈린 사후에는 전부 수정주의자 밖에 없었던건가요? 참 카가노비치 몰로토프 미코얀 불가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스탈린이 죽었다에선 별로 비중이 없던데.
그리고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사상을 제대로 이을 수 있던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쓰딸린의 기조를 이어받아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힘쓰고, 생산력에 대한 본위주의를 지양했던 쪽에 속했던 이들로는 까가노비치와 몰로또브 등이 있었죠. 몰로또브와 까가노비치는 쓰딸린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보다 역사적 관점에서의 평가를 중시했기에 흐루쇼프와 상당한 갈등을 빚었죠. 몰로또브의 경우는 '집약농법'을 주장하여 '처녀지'의 양적 확대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통찰력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꼬얀의 경우는 흐루쇼프의 입장에 동조하여 몰로또브와 까가노비치에 공세를 가한 대표적인 인물이죠. 쏘련 헌법과 이후의 이슈들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의 면면에서 "내가 쓰딸린을 꺾었다"고 이야기한 전적이 있으며 국가기구에 속한 기관원들의 이해관계를 전형적으로 반영했습니다.
3. 쏘련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사실상 와해시킨 장본인들이 브레즈네프 등에 해당됩니다. 흐루쇼프의 기조에서 나타났던 문제점을 일부 수정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지만, 수정주의적 기조를 전면적으로 폐기하지 않고 되려 꼬씨긴-리베르만 개혁을 후원했습니다. "공업 관리의 개선, 계획사업의 완성과 공업 생산에 대한 경제적 자극을 강화하는 것에 대하여(1965)"라는 제목으로 쓰인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문서는 생산 수단도 상품으로 취급하는 생산력주의를 일변도로 강조하는 성격을 지녔죠. 생산 수단이 더 이상 무상으로 지급되지 않고 유상으로 지급되면서, 쏘련의 국영 기업소는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소유관계에 바탕을 두지 않고 상품화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기업소와 비슷하게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보수파가 스탈린 사상을 그대로 이은건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자꾸 이렇게 질문 드려서 죄송하지만 브레즈네프 시절 일어났던 사블린의 선상 반란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브레즈네프 등의 소련에 대항해서 진정한 레닌주의를 복원하겠다고 했던 사블린은 반수정주의자의 면모가 있다고 할 수 있나요?
발레리 사블린에게서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0월 혁명에서 영감을 받고 부조리에 저항하고자 하는 정신은 있었지만요. (이에 대해서는 뜨로쯔끼주의 정파의 글에서도 비슷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사블린의 선상 반란은 수정주의로 인하여 내파되어 가고 있었던 쏘련의 사회상-전위로서 당의 역할 상실, 소브나르호즈 개혁 이후 점차 증가했던 지역주의,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실질적인 해체 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죠. 사블린의 반란과는 별개로,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이후 쏘련에서 마오주의 등 수정주의에 반대하여 맑스-레닌주의를 기치로 내건 조직들이 대부분 단명에 그쳤지만, 전국 각지에 생겨났고,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명맥을 이어받아 옐찐과 뿌찐에게 저항하고 있고요.
4. 그로미꼬는 뻬레쓰뜨로이까 초기에 고르바쵸프의 후원자로 기능했던 인물이고, 로마노프는 원칙에 충실하면서 실무 경험도 갖춘 인물로 지목됩니다. 그리신의 경우 체르넨꼬와 가까운 인물이죠.
5. 야오웬위안과 같은 경우는 1972년 당시 린뱌오 사태를 논함에 있어 이론적 식견이 나름대로 있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옛 사회의 모반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지반 자체의 위에서도 수정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위험성을 중국 공산당의 이론지에 게재하기도 하는 등 통찰성 있는 면모도 보이고요. '4인방'이 장제스 시기 '4대 가문'처럼 부패했다면, '개혁개방' 이후 가정승포제로 인하여 심각한 타격을 입은 중국의 향촌에서 여태껏 문혁의 성과들-비록, <제국주의와 혁명>에서 엔베르 호자가 논한 비판에서 보듯 초좌익적 요소들을 보임으로써 등소평의 '개혁개방'을 수월하게 만든 점이 있지만 구습 타파라는 지점에서 의의가 충분히 있는-이 활발히 기려지고 있는 경위는 무엇일지도 생각해볼 여지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사인방에 대해서도 반공주의적 왜곡이 많이 가해졌다는 거군요. 사인방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졌고 가장 많이 욕을 먹던 사람은 장칭이던데 장칭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서구 측의 평가에 따르면, 사인방에 대해서 '급진'적이고 '강경'하다는 투로 주로 묘사되곤 했죠. 문혁 당시 장칭도 야오웬위안 등처럼 나름의 체계적인 견해와 입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엔베르 호자가 1978년에 집필한 <히스니 카포(Hysni Kapo) 동지께 보내는 편지>에서 나오듯이 한철에 피다 지는 "꽃"으로서, 조직적 차원에서 행동할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죠. 장칭도 물론이지만 4인방은 전체적으로 정치적 기반을 공고하게 다지는 것보다 "혁명극을 통한 선전과 사설 및 기고" 이외에 이렇다 할 조직적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마오쩌둥 사후에 급격하게 밀려납니다.
4인방에 대한 엔베르 호자의 평가입니다.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hoxha/works/1978/07/30.htm
6. 화국봉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항일 전쟁에 뛰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유고슬라비아와 찌또의 수정주의적 방침에 대해 전체적으로 우호적인 노선을 취했던 인물이죠. 마오쩌둥이 좌익 기회주의와 우익 기회주의의 편향을 보였다면, 화궈펑은 우익 기회주의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면서 등소평의 집권에 도움을 준 인물이죠.
길고 자세한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 스탈린 사후 소련,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한국에서 번역된 읽을 만한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쏘련에 대해서는 국문으로 번역된 책들 중에서 바만 아자드의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와 로저 키란 & 토머스 케니의 <배반당한 사회주의>를 추천합니다. 중국과 문혁에 대하여 국역된 책은 마오주의나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서적을 시중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부르주아 역사학자의 저서지만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가 마오쩌둥의 시기나 문혁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는 우익의 상투적인 비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내립니다. 마오쩌둥 시기와 그 이후 중국에 대해 영어로 된 서적을 본다면 파오유칭(Pao-Yu Ching)의 <승리에서 패배로>가 마오주의 진영의 입장에서 쓰인 대표적인 저작에 해당되고, 호자 계열의 입장에서 쓰인 책으로는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통해 건설될 수 없다>가 있습니다.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는 시중에 나와 있고, <배반당한 사회주의>는 노사과연 웹사이트에서 자체적으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도 시중에 물론 있고요. 위에서 앞서 말한 영서들은 대개의 경우 PDF로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승리에서 패배로(From Victory to Defeats)>:
https://foreignlanguages.press/wp-content/uploads/2020/11/N01-From-Victory-to-Defeat-5th-Printing.pdf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통해 건설될 수 없다(Socialism Cannot be Built in Alliance with the Bourgeoisie)>:
https://drive.google.com/file/d/1Kbw3mQTT1o60mHYV-pIGKbj4kPY86apc/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