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한국 현대사와 베트남 현대사를 공부해 보면, 정말 소름 끼치는 부분이 있다. 한국에서는 친미 독재자 이승만이 무수히 많은 양민을 학살했다면, 베트남에서는 친미 독재자 응오딘지엠이 무수히 많은 양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양민 학살을 보면, “친미 정부하에서 자행된 인권 유린 및 미국의 지원과 도움을 받았다.”라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보인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즉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에서는 1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했고, 한국전쟁에서는 국민 보도연맹 학살을 포함하여, 대략 100만 명의 민간인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학살당했다.1)
비록 규모 자체는 이승만 정부보다 비교적 작지만,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남베트남에서도 이러한 테러와 양민 학살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이 천인공노할 양민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면,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이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미국의 침략으로 남베트남에서 희생된 민간인 숫자만 하더라도 대략 100만 명 단위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2)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으로 베트남에 대한 침략 전쟁을 자행한 미국이 네이팜 폭격과 수색과 섬멸 작전(Search and Destroy)으로 광범위한 양민학살을 자행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참전을 지지했던 미국의 역사학자 권터 루이는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이 바디 카운트 계산법으로 사살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1/3인 22만 명 이상이 베트남 민간인이었다고 책에서 주장했다.3)
이러한 학살을 생각해 보았을 때,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명분도 없었고, 그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베트남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전쟁이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남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미군의 대규모 지상병력 파병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고, 항상 그랬듯이, 그 규모는 공산주의 혁명 세력들이 한 것보다 항상 광범위한 규모였다. 즉 프랑스 세력과 응오딘지엠 정부 그리고 지엠 정부 이후의 남베트남 정부와 미국 세력이 저지른 테러와 학살은 공산주의 세력들 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으며, 때로는 이들이 저지른 학살이 혁명 세력이 한 것으로 왜곡되고 여론 조작되기까지 했다.4)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응오딘지엠 정권 시기 어떠한 일이 벌어졌고, 테러와 학살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응오딘지엠 정부의 집권 과정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호치민(Ho Chi Minh)과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이 이끄는 혁명 군대에게 참패를 당한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과 인도차이나 문제를 놓고 회담이 성사됐다. 제네바 회담에서 강대국들은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남북분단시키기로 했고, 북쪽에는 호치민이 이끄는 정부가 남쪽에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바오다이가 이끄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설립됐다. 당시 바오다이 황제는 너무나도 인기가 없는 프랑스의 꼭두각시였고, 그는 귀국하지 얼마 되지 않은 인물을 총리 자리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었다.
바오다이 정부의 총리가 된, 응오딘지엠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이미 미국에서 자신의 지지세력들을 형성해놓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바오다이 황제를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응오딘지엠은 바오다이를 축출하기 위해 1955년에 남베트남 국민에게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98.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바오다이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응오딘지엠을 지지한 인사로는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 조지프 케네디(존 F. 케네디의 아버지),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 휴버트 험프리 그리고 존 F. 케네디 등이 있었다.5)
국민투표 이후 응오딘지엠은 이른바 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하고, 본인 스스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말이 좋아 대통령이지, 그의 남베트남 통치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자신의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족벌체제였다. 또한 미국에 대한 대외의존도는 식민지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에 따르면, 응오딘지엠 정부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미국의 승인 없이는 정책을 채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6) 미국에 의해 남베트남에 미국 꼭두각시 정부가 설립돼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는데,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3. 양민 학살의 규모
위에서 언급한 1954년 제네바 회담은 “2년 이내에 남북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를 표기해놓았었다. 그러나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했다. 그 이유는 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결국 남베트남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서막이 된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를 집필한 윤충로 교수는 지엠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은 과거 반프랑스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이었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동조였다고 논문에 집필했다. 당시 응오딘지엠은 이중의 압력, 곧 한편으로는 토지개혁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 대한 압력, 다른 한편으로는 1956년 평화적 통일선거 이행에 대한 압력에 봉착해 있었는데, 지엠은 이런 불안과 압력을 멸공(diệt cộng)ㆍ반공(tố cộng)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지엠은 집권 초기부터 베트민(Viet Minh)이 전국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위원회 사무실들을 폐쇄했었으며, 반대파들에 대한 탄압도 가속화했다.7)
공산주의자를 소탕한다는 명분 하에 양민 학살도 자행됐다.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애드워드 허만(Edward Herman)이 쓴 <여론조작>에 따르면 응오딘지엠 지지자이자 고문인 조셉 버팅어(Joseph Buttinger)는 1956년 대규모 원정대의 병사들이 “공산당 점령 지역에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 남베트남 군대는 마을을 습격하고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농민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요 탄압 대상은 반프랑스 저항세력과 베트민이었고, 특히나 195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무수히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고, 촘스키와 허만은 책에서 여러 근거를 통해 밝혔다.8)
응오딘지엠 정권의 마지막 육군총참모장이었단 쩐반돈(Tran Van Don) 장군은 그들은 제멋대로 체포했고, 집단수용소에서는 아무런 법적인 보호 조치도 받을 수가 없었으며, 기간도 정해지지 않은 채 감금했고,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971년 세상에 공개된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에도 하노이와 농촌의 과격분자 사이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연관도 없었다고 밝혔으며, 지엠 정부의 강제 수용소를 조사했던 호니(P.J Honey)도 수감자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도, 공산주의 지지자들도 아니었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응오딘지엠 정부의 인권유린과 테러 그리고 학살은 심각했다.9)
특히나 1959년 응오딘지엠 정권은 10/59법령을 발령하여,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고, 이것은 결국 1960년 이른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Viet Cong)을 창설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아래의 본문에 상세하게 나와 있지만, 응오딘지엠 정부는 남베트남 민중을 대상으로 백색테러와 학살을 저질렀고, 이러한 상황은 많은 남베트남 민중들이 베트콩을 대중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표출됐다. 아래의 내용은 쩐반짜우의 인용문이다.
“남부당국은 그 지역의 우리 동포와 모든 애국적이며, 평화적인 세력을 야만적으로 학살하고 있다. 겨우 1년 동안에 그들은 3,000건이 넘는 범죄를 저지르고,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 적어도 4,000명의 애국자들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19,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응오딘지엠은 대통령이 된 순간부터 베트민을 뿌리뽑기 위한 테러 및 학살 정책을 자행했다. 그 규모는 미국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고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대략 12,000명의 민간인이 응오딘지엠 정부하에서 처형당했다. 기본적인 법적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러한 살인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발발했다. 그리고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수십 만명의 정치범 및 양민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됐고, 1956년에만 하더라도 그 숫자는 대략 5만 명 이상이나 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베트남의 역사학자이자 혁명가인 쩐반짜우(Tran Van Giau)는 응오딘지엠이 집권하고 몇 년 사이에 874개의 감옥에 275,000명이 감금되고, 53만 명이 고문으로, 230,000명이 지뢰나 폭탄에 의해 불구가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80,000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했다. 일본의 전 요미우리 신문기자인 오쿠라 사다오는 1960년까지 응오딘지엠 정부 하에서 80만 명이 수감되고, 9만 명이 처형당했으며, 19만 명 이상이 장애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10)
미국 역사학자 버나드 폴은 <베트콩 보이지 않는 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남베트남 정권에 의한 사망자 수를 6만 6,000명이라고 보았고, 베트남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산하에서 발간한 <베트남 공산당사>를 보면, 1954년부터 1959년까지 남베트남에서는 466,000명의 공산주의자와 애국지사들이 체포되었으며, 이중 40만 명이 수감되고 68,000명이 살해되었다고 나온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와 책을 제작하고 집필한 마이클 매클리어는 알렉산더 캔드릭의 책을 인용하며 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누의 비밀경찰은 75,000명을 살해하고 5만 명을 투옥했다고 주장했다.11)
4. 결론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응오딘지엠 정부의 학살과 테러는 매우 광범위했으며,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한반도 상황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은 “1957년부터 1965년 4월까지 15만 명이 넘는 베트콩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대다수의 희생자는 민간인이었다.”고 밝혔다.12) 1960년대 베트남에서 집필한 책인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을 보면, 1954년부터 1965년까지 대략 17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나와 있다.13)
이러한 추산들과 학살의 수치와 학살 대상의 범위와 실태를 생각해 보았을 때, 응오딘지엠 정권에서 학살당한 무고한 민간인은 대략 10만 명 정도로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1965년 미군의 전격적인 베트남 침략 이전부터, 이미 양민 학살은 응오딘지엠 정부하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저질러졌으며, 이 학살의 성격은 해방 후 한반도의 상황과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살의 주체를 지원한 세력은 바로 미국이었다.
해방후 남한이나 1954년 이후 남베트남의 상황이 보여주는 것은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은 절대적으로 민주적이지도 자주적이지도 않다는 사실과 정권의 정통성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정통성이 있었다면,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이런 학살 정책을 벌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이 민중 대다수였기에, 이런 잔인하고 천인공노할 대량 학살을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저질렀던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의 응오딘지엠 정부에게는 정통성과 명분 그리고 대중성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당연하게도 베트남의 국가 정통성은 민중을 대량 학살한 응오딘지엠 정권이 아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호치민과 북베트남에게 있었다.
5. 각주 및 참고문헌
각주.
1)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 형성사> p.555~556 및 <대한민국 악인열전> p.37을 참고하라.
2) 베트남 전쟁의 총 민간인 사망자는 보통의 경우 남북 베트남을 합쳐 200만 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995년 베트남 측에서 내놓은 조사 자료를 보면, 민간인 300만 명에서 400만 명이 사망했고, 군인 1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케네디 행정부에서 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380만 명을 죽였다고 아메리칸 대학 강연에서 밝혔다. 조너선 닐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 p.105 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02와 닉 터스의 <Kill Anything That Moves> p.13 그리고 영화감독 마틴 쉰의 다큐멘터리 <Vietnam: American Holocaust>를 참조.
3) <America in Vietnam> p.450~451.
4) 자세한건 촘스키와 허만의 <미국 대외정책론> p.397~417과 <여론조작> p.344~345, 찰스 펜의 <호치민 평전> p.280 및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50를 참고하라.
5)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6~447.
6) 기사 <What Ken Burns Left Out of the Vietnam Story> 2018.03.01.을 참조함.
7)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325와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 p.690을 참조.
8) <여론조작> p.320~321.
9)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12~11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6~327.
10) 자세한 내용은<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67~68, <The Vietnam Wars 1945-1990> p.56,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327,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12~113을 참고하라.
11) <여론조작> p.320(각주 내용으로 자세한건 p.598에 있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12, <베트남 공산당사> p.103을 참조.
12) <미국 대외정책론> p.357.
13)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 p.20
참고문헌.
국내자료
<미국 대외정책론>, 촘스키 허만(저), 임채정(역), 일월서각, 1985
<베트남 공산당사>, 베트남공산당사연구회(저), 김종욱(역), 소나무, 1989
<호치민 평전>, 찰스 펜(저), 김기태(역), 자인, 2001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저), 유경찬(역), 을유문화사, 2002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저), 정영목(역), 푸른숲, 200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저), 선인, 2005
<여론조작>, 촘스키 허만(저), 정경옥(역), 에코리브르, 2006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저), 이광일(역), 들녘, 2015
<대한민국 악인열전>, 임종금(저), 피플파워, 2016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유일상(저), 하나로애드컴, 2021
영어자료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 저자불명, Giai Phong Publishing House, 1968
<America in Vietnam>, Guenter Lewy, Oxford University, 1978
<Vietnam A History>, Stanley Karnow, Viking, 1984
<The Vietnam Wars 1945-1990>, Marilyn B. Young, Harper Prennial, 1991
<Kill Anything That Moves>, Nick Turse, Picador, 2013
기사
<What Ken Burns Left Out of the Vietnam Story> 2018.03.01
다큐멘터리
<Vietnam: American Holocaust> 2008
응오딘지엠 씹새끼
참.. '독립운동'을 읊으면서, 응오딘지엠에 대해 옹호한다는 건 범인이 할 법한 주장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