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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적 부르주아를 향해 유화책을 추구했던 분파주의적 기회주의 파벌은 그리스 인민운동의 혁명적 유산을 더럽히고 은폐했다. 그리스 공산당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이른바 '6차 총회'의 강령에서 완전히 매장됐으며, 평화적 이행과 민주적 변화가, 반레닌주의적, 수정주의적 이행은 모든 문제들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서 기존의 방침을 대체했다." - 니코스 자카리아디스, 1962.


1. 니코스 자카리아디스(Nikos Zachariadis)는 반파시스트, 반제국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그리스 공산당의 총서기(1931~1956)였다. 전간기(그리스와 이딸리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포함해서) 2차대전 당시 메탁사스(Metaxas) 정권을 타도하고, 그리스 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의 주도로 광범위한 근로대중을 끌여들어 반파쇼, 반제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고, 1944년 당시 시타노스(Sitanos) 등의 행보를 비판하며(시타노스는 바르키자 협정의 주역으로, 그리스에서 인민권력의 수립을 방해했다) 그리스 내전 당시 그리스 민주군을 조직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리스 내전의 패배 이후에는 망명지인 타쉬켄트에서 당적 사업을 책임졌다.


2. 그리스 공산당 6차 총회는 1956 3월 타쉬켄트에서 열렸다. 1949년 이후 해외에 망명했던 그리스 공산당 당원들의 85~95%는 이 당시 쏘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의 결정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저항을 전개했다. 1958년에는 6천 명의 당원들이 당 내외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쏘련과 중국, 이딸리아, 프랑스, 불가리아, 뽈쓰까(폴란드), 마쟈르(헝가리), 비엣남, 꾸바, 조선(북한), 알바니아의 공산당-노동자당들에 집단적으로 서신을 전달했으며, 흐루쇼프 등에 의해 창설됐던 '국제위원회'의 당 지도부 교체를 비판하였다. 1962 5월에는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렸던 나치 독일의 국기 하강식 기념일을 맞아 타쉬켄트의 모든 당 조직들과, 1940년대 중후반 내전 당시 망명·수감·체포된 당원들의 지지로 대중적 집회를 열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리스 공산당과 소련의 수정주의 지도부의 방해로 인해 무위로 끝났다.


3. 1958년에 그리스 공산당 당원들의 각국 당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더 이상 인민들의 혁명적 투쟁을 이끌었던 지도부가 아니다. 이는 1) 현임 당 지도부가 1955 9 9일 타쉬켄트 당 지부에서 그리스 공산당을 겨냥한 정치적 도발의 결과로 성립됐고, 1956 6차 총회의 결정을 바탕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며, 2) 수정주의 지도부의 정책이 6차 총회 이전에 그리스 공산당이 견지했던 혁명적 노선에 대한 수정을,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대한 수정을 의미했기 때문이고, 3) 맑스-레닌주의의 제반 원칙들에서 이탈한 기회주의적 노선을 추종했기 때문이며, 4) 기회주의적 방침을 추구함으로써 인민들의 투쟁을 약화시키고, 근로인민대중의 운동을 그리스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에 종속시켰기 때문이었다."


4. 1962 5 21일부터 5 27일까지 쏘련 당국의 주도로, 그리스 '공산'당의 지도부와의 긴밀한 협력 하에서 대대적인 검거가 벌어졌다. 자카리아디스의 지지자들과 당의 중책을 맡았던 책임비서들은 까자흐쓰딴으로 추방되거나 구금에 처해졌다. 에스파냐 내전 당시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팔레스(S. Palles)는 이 당시 스트라티스 강제수용소를 철거하고 공산당원들을 석방했던 까라만리스(Karamanlis) 내각의 조치와 비교하면서 그리스 공산당 지도부의 행동을 비판했다. 1962 9 14일에는 타쉬켄트에 체류했던 4명의 지도적 공산당원들이 '6차 총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페뜨로빠블롭쓰끄(Petrovpavlovsk, 까자흐쓰딴 공화국 북부의 도시 - ) 12시간 이내에 떠날 것을 종용받았다.


5. 니코스 자카리아디스는 일찍이 1956년 봄에 열린 '6차 총회'에서 "그리스 공산당이 부르주아 정당으로 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고(Dimitri Votsika, ‘Portraita koryfeon stelehon tou KKE’, Athens, 1999, p. 21), 1955년에도 그리스 공산당 내외에서 전개됐던 수정주의적 움직임을 경계했다. 자카리아디스의 이러한 태도는 타쉬켄트에서 대중집회 시도가 일었던 1962년 당시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됐다.


6. 소련과 그리스 공산당이 1970년대에 밝힌 니코스 자카리아디스의 사인은 분명하지 않다. 브레즈네프와 플로라키스는 1973년 여름에 자카리아디스가 '심장병'으로 자연사했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후 베라 꾸즈네초바(Vera Kuznechova)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시신의 부검을 맡았던 의사는 상부의 압력으로 인해 니코스 자카리아디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해야 했으며,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암살됐다는 사실을 인터뷰를 통해 밝혀낼 수 있었다.


7. 그리스 공산당은 쏘련의 해체 이후에야 맑스-레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청산주의와 수정주의에 맞서기 시작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그 이후의 시기에서 공산당은 수정주의적 강령을 수용했다. 이 당시 그리스 공산당에서 유로코뮤니즘을 지향했던 그리스 국내공산당(KKE-Interior)이 별도로 분리됐고, 특히 플로라키스(Florakis) 지도부 하에서는 뻬레쓰뜨로이까를 옹호했다. 쏘련 해체 이후에야 그리스 공산당은 자기비판에 입각하여 맑스-레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청산주의와 수정주의를 배격한다는 입장을 표방할 수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그리스 공산당 1995년 테제를 보라) 니코스 자카리아디스가 복권된 계기도 이와 크게 무관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