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제 4차 임시 지하 중앙 위원회를 조직하는 데 성공하여 주로 프라하 지구의 당 조직을 근거지로 하면서 중부 체코와 모라비아 등지에서 서서히 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공산당은 기관지 《루디 프라보》를 발행하고 저항 운동을 통일하며 국민 위원회를 창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시기에 인민대중의 일부에서는 쏘련군에 의한 해방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이른바 '대기주의'가 발생한다. 공산당은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면서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전망을 제시하고, 인민들에게 궐기를 호소한다. 이에 대해 독일군은 공산당에게 탄압을 집중한다.
한편 부르조아지는 이러한 조건들을 이용하여 저항운동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미군에 의한 해방을 기대한다.
1945년초부터 공산당의 지도 아래 거의 전국에 걸쳐 비합법 국민 위원회가 저항 운동을 통합하는 중심이 된다. 날이 갈수록 사보타지는 증가하고, 특히 파시스트 군에게 중요한 철도 운수는 거의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공장에서는 비합법 공장위원회가 조직된다. 생산은 저하되고, 1945년 봄에 이르러 완성품은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 비합법 조직이 공장의 보안을 스스로 장악할 준비를 한다. 빨치산 운동도 봄에 최고 절정에 이르게 된다.
저항운동의 지도세력은 공산당원이었다. 그들은 지하의 혁명적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1945년초부터 빨치산 운동을 강화하고, 그것을 전인민적 봉기로 전화시키기 위해 준비한다. 체코 국민회의도 무장봉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원들은 런던 망명파의 방해로 인한 무기 부족으로 고생해야만 했다. 그들은 심지어 쏘련군 통수부와도 연락을 계속 취할 수 없었다.
1945년 4월, 체코 지역에 혁명적 정세가 고조된다. 미군에 의한 체코슬로바키아 서부 국경의 횡단, 소련군에 의한 체코 지역 해방의 개시, 소련군의 베를린 공략, 미군과 소련군의 엘베 강변에서의 상봉 등과 같은 조건 아래서 체코 지역의 독일군은 완전히 포위된다. 인민은 각지에서 점령군의 권력을 타도하고 국민 위원회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 점령군에 대한 무장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5월 5일 마침내 프라하 인민의 봉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무엇을 위해 죽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나라 인민의 자유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적 해방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새로운 자유 공화국이 탄생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피를 흘렸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공화국, 곧 근로 인민의 공화국이 될 것이다. 이 공화국에서 우리는 지배자가 되고 주인이 될 것이다. 자본가적 흡혈귀는 존재하지 않고, 결핍과 착취는 사라질 것이다. 인민은 스스로 자신의 행복과 복지를 창조할 것이다. (...) 투쟁에 궐기하라! 바리케이트를 구축하라! 바리케이트전에 참전하라! 투쟁 만세! 혁명 만세!" -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의 호소문, 1945년.
소련군이 아직 멀리 있는 가운데 봉기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봉기의 선두에는 공산당의 주도 아래 체코 국민회의가 서 있었다. 봉기의 중심세력은 프라하의 노동자계급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약 10만 명이 2000여 곳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약 3만 명이 방위에 배치된다. 나치스는 프라하에 주둔시킨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약 2000명의 시민을 살해한다. 독일 SS부대에 의한 대량 학살, 전국 사회당과 장교 우파에 의한 프라하 방송국의 점거와 데마고기 방송 등으로 인하여 봉기단의 힘은 약화된다.
5월 7일에서 8일 밤에 걸쳐 공산당의 주도 아래 체코 국민회의는 점령군과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단호한 투쟁과, 민족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의 달성을 인민들에게 호소한다. 소련군은 6일 프라하 해방 작전을 개시하여 9일에 완료한다. 10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한 독일군 주력 부대가 항복한다.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로 시작된 체코슬로바키아 인민의 반파시즘 민족해방운동의 민족민주혁명으로의 전화 과정은 프라하 인민봉기에 의해 최절정에 도달하고 마침내 승리한다.
- 사바타 마사요시,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혁명사 II》, 311~315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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