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집중제가 희생과 헌신, 지적 권위 등을 통해 기층의 자발성을 얻고
자발성에 기초하여 철의 규율을 유지한다는건 이해했는데
구체적으로 레닌은 어떤 과정을 거쳐 러시아 사회주의자, 노동계급 내에서 지도력을 얻은것?
나아가 볼셰비키도 어떻게 노동계급의 지도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
자발성에 기초하여 철의 규율을 유지한다는건 이해했는데
구체적으로 레닌은 어떤 과정을 거쳐 러시아 사회주의자, 노동계급 내에서 지도력을 얻은것?
나아가 볼셰비키도 어떻게 노동계급의 지도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
정세의 당면 요구에 부응하여 이론을 실천으로 전화시킨 것, 그것을 민주집중제를 통해 실천으로 관철시킨 것이 가장 중대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음. 1905년 혁명 이후에 채택된 의회 전술의 예를 들 때, 레닌은 두마를 정치폭로의 장으로 삼는다는 입장에 입각해서 당원들을 선거구에 진출시킴. 의회가 정치 폭로의 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세가 수세기에 있기 때문에 광범위한 무산자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기인함. 1917년 혁명 당시의 구호였던 "평화와 토지, 빵을"도 전쟁 종결을 원했던 러시아 민중의 요구가 반영된 것. 4월 테제에서도 보여지듯, 토론과 논쟁을 통해 진리를 경합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당 내 통일이 관철될 수 있었고 설득에 기초하여 군중을 발동시킬 수 있었음.
1. 당면 요구라 하면 객관적 조건의 제약으로 남겨진 활로(ex: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의회뿐)와 대중의 주관적/즉자적 욕망(ex: 빵, 토지, 평화)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인가요?
2. 아무리 그 사람 하는 말이 옳아도 사람이란 것이 경험으로 입증이 안되면 움직여주질 않는 법이잖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레닌과 볼셰비키는 어떻게 대중의 동의를 얻어낸건지 궁금합니다. 평상시에 대중이 국지적, 미시적으로 자기 삶에서 겪은 경험으로써 볼셰비키의 주장을 승인한건지, 아니면 볼셰가 결단을 통해 성과를 보임으로써 승인을 이끌어낸건지..
그 지역구 밀착 관리라 해야하나? 의원단 통해 그런것도 많이 한걸로 기억남요
1. 주-객관적 조건을 모두 아우르는 게 당면 요구입니다. 볼셰비키가 의회를 활용할 때 '정치폭로'의 용도로 썼다는 것에 담긴 의미는 다른 정당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당으로서 스스로를 위치지었다는 것, 타 정당의 의석 탈취에 목표를 설정짓는 대신 차르 체제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데에 주력했다는 것, 그리고 그 일환으로서 요구사항을 숨기거나 우회적으로 말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선거운동 도중에, 그리고 두마의 회기에서 호명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중의 즉자적 요구들에 대해 볼셰비키는 타 정파들과 다르게 정치투쟁과 밀접하게 연계시켰고 민주공화국의 성립, 8시간 노동제의 전면적 실시, 모든 지주들의 토지몰수라는 명시적인 입장으로 선거운동의 장에서, 두마에서 표방했습니다.
2. 볼셰비키가 발휘한 사상적 일관성과 기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격입니다. 멘셰비키는 1900년대 중반 이래 의회에서 의석을 추가하는 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사회적 변화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이 '토지법의 개선', 민주공화제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인민 대표자들의 통치'를 강령적 기반으로 삼았는데, 1905년 혁명 당시 러시아 각지의 노동자, 농민이 내걸었던 강령보다 후퇴한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당국에 의해 선거권 제한까지 가해졌기에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는 설득력이 결여되어 있었죠. 볼셰비키가 내걸었던 요구들은 그에 반하면 1905년 혁명의 경험과 요구들에 기초하여 표방되었다는 점에서, 광범위한 대중을 견인하기에 더욱 유리했습니다.
2-1. 8시간 노동제와 같은 경우도, 1905년 혁명 당시 러시아 공장 노동자들의 주된 요구였고, 일반민주적인 경제투쟁의 영역이었지만 멘셰비키는 자신의 선거강령에서 이를 한 차례도 공개적으로 표방하지 않았습니다. 일반민주적 과제는 두마의 틀 안에서 완성될 수 없고, 상술한 것처럼 차르에 의한 정치에서 민주적 공화정으로의 근본적 변화, 사회경제적 토대의 변혁이 수반됨으로서 완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러시아 노동자, 농민들은 알고 있었지만 멘셰비키는 반대로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민중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쟁점을 바탕으로 그것을 강령의 형태로 내화한 것이 볼셰비키가 대중한테서 지도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됐던 것이었죠.
2-2. 두마의 틀 안에서 민주주의적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선거 제도가 노동자, 농민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정치선전 및 폭로를 주안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노동자들은 자산계급과 다르게, 근무지가 정해진 지 6개월 만에야 선거권을 획득할 수 있었고, 명목상 20세 이상이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특별가옥세를 내지 않는 이상 투표장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방해가 심했습니다. 의회를 통해 우회적으로 선거강령을 전달하거나, 의석을 더 차지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구조였고, 그렇기에 멘셰비키의 견해가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2-3. 볼셰비키가 대중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프라우다를 통해 멘셰비키의 선거강령, 정책(2-1, 2-2 참조)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데에 있습니다. 멘셰비키가 양적인 '단결'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 고양이 사상투쟁에서 나온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선거 후보자들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선거강령의 문제를 토론의 쟁점으로 붙일 것을 요구했고, 선거인단 및 노동자들 사이에서 동의가 있었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례에서 보듯, 그러한 과정(토론과 논쟁을 통한 강령적 요구의 첨예화)은 볼셰비키가 선거에 입후보하여 두마에 노동자를 진출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2-4. 노동자들의 투표 -> 선거인단 선출 -> 두마 선거 입후보를 거치면, "의회에 선출된 이후 볼셰비키 의원단들의 활동은 어떠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볼셰비키 의원단은 활동시간의 대부분을 의회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할애했고, 그 세부적 양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프라우다, 당 조직, 노동조합과의 긴밀한 연계를 공고화할 것, (2) 당 중앙과 의원단 사이에서의 회의를 통해 행동계획을 성립할 것, (3) 1번과 2번에서 다뤄진 사항을 바탕으로 각종 합법, 비합법 조직의 요구를 정립할 것. 이때 (1)에서 제시된 의제들을 바탕으로, (2)에서 당 중앙과의 협의를 통해 행동계획을 구성하게 됩니다. 의회와의 밀착보다, 개개 의원이 소속된 지역구의 공장단위와 밀착함으로서 조직화를 할 수 있게 되죠.
2-5. 민중의 요구는 늘 자생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목적의식성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조직된 전위의 역할입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일상 속에서 타 정치세력의 요구안과 비교를 통해 볼셰비키의 요구를 받아들인 측면, 그리고 볼셰비키가 민중의 그와 같은 요구를 공개적인 선거강령의 형태로 표방, 혹은 표현을 빌리자면 결단한 측면. 즉 양자가 함께 가는 것이죠. 2-4번에서도 밝혔고, 위에서 고닉 분께서 말하신 지역구 밀착 관리도, 볼셰비키가 타 정당과 구별되는 조직으로 도약하게 된 원인이 됩니다.
2-6. 이에 관한 상세하고 풍부한 논의는 A. 바다예프의 <볼셰비키는 어떻게 의회를 활용하였는가?>를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노동자의 책에 PDF로 등재되어 있는 책이기 때문에 가입되어 있다면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917년 혁명의 "빵, 토지, 평화"는 함축된 용어이지만 임시 정부가 당대에 해당 과제를 수행할 수 없었고, 전쟁 지속을 옹호하고 있었기에 정치투쟁의 측면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4월 테제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해당 용어에서 빵은 소수의 지주, 산업자본가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에게 분배하자는 취지였고, 토지는 1905년 혁명부터 당면 과제였던 지주-소작 관계의 철폐, 평화는 제국주의 전쟁에서의 이탈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수백만 명 이상의 희생자들이 속출했고, 농민은 스똘리핀의 자영농 육성 정책에도 불구하고 봉건적 제도가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민중들은 이중의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서 볼셰비키가 "빵, 토지, 평화"의 구호를 체제 변혁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죠.
2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의 주류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우파와 좌파가 분당되기 이전의 시기-이었지만, 이들이 볼셰비키만큼 명확한 강령과 요구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볼셰비키로 주도권이 이동했죠. 1917년 코로닐로프 쿠데타 당시 볼셰비키가 노동자들에게 가장 먼저 이를 저지할 것을 요구했고, 노동자들의 무장이 신속히 조직된 점에서-3백만 명 규모였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수하르토의 1965년 쿠데타로 인해 와해된 사태를 고려하면, 당이 군중을 발동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도 노동자계급, 병사, 농민들을 자신의 깃발에 결집시킬 수 있었습니다. 임시정부도 1917년 하순에 이르면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전락했는데, 볼셰비키와 다르게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인합니다.
2-3. 은 쉽게 말해, 숫자 불리는 데 급급하느라 대중에게 일관성 없이 수표만 남발했던 맨셰. 그런 맨셰의 허점을 정확히 파고들어 그들이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지적할 수 있는 '판'을 조성한 볼셰. 이런 전략 차이에서 볼셰가 승리한 셈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2-4. 의 경우, 볼셰비키가 애시당초 법제의 점진적 개선이나 의석수 늘리기(의회주의)에 집착하지 않고, 의회를 철저히 정치폭로의 장(의회전술)으로 활용하기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접근법이었을까요? 보통 의회주의를 추구하는 당에선 원외보단 의회와의 밀착을 더 공고히 하는 편이니..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댓글을 이제서 보게 되네요. 의회의 활용 여부에 대한 전략, 전술적인 차이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분파들의 성패 여부를 결정지었습니다. 이는 의회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지, 혹은 수단으로 보는지의 차이로 간명하게 요약됩니다. 멘셰비키는 전자였고, 볼셰비키는 후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정세에 대한 양자의 실천에서 현저한 차이가 드러나지요.
2-4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것처럼 근본적인 강령적, 실천적 토대의 상이함이 그대로 관찰됩니다. 원내의 업무에 비중을 둘수록, 원외의 광범위한 근로대중과 소통할 비중이 역으로 줄어들게 되니 의회를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수단-의회를 활용하지 말자는 좌익주의적 언동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으로 본 것이죠. 의회 내부에서 개혁을 통한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본 지점도 그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호오호오
이스크라의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