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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 빠진 전체주의론적 관점에 대해선 '국가'에 너무 집중했다고, 피츠패트릭류 수정주의 관점에 대해선 '사회'에 너무 집중했다고 비판하면서 그 중간을 찾겠다고 하던데.
피츠패트릭이 분석한 스탈린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를 소련 체제와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아닌 당에서 준 선험적 혜택의 덕을 본 이들이 소련 체제를 '수용'하는 '상호거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고.
마지막에 스탈린과 소련 관료층이 산업화 시대의 부르주아의 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은 국자론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나?
1. 소련에서 노동자와 공장장이 피착취자-착취자의 관계였다는 주장이 성립되려면, 공장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자의적으로 해고시킬 수 있어야 하고, 공장 관리자들의 결정이 절대적인 위치를 점해야 했는데,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공장 관리자로 등용된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특별 감찰부, 위원회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이 당의 지원과 함께 공장장을 감시했고, 상당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도 놓치면 안 되죠. 위 논문의 저자인 박수현은 소련의 노동자들이 법적 테두리 밖에서 공장 관리자들에게 대항했다고 표현하는데, 공장 운영의 주요한 축을 담당했던 생산회의(Favkom)에서 공장장의 의견에 반대하여 기존의 결정사항을 바꿀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각하하고 있습니다.
2. 논문의 저자는 "선진 노동자들과 후진 노동자들의 갈등"을 언급하지만, 쓰따하노프 운동에서도 사회주의적 경쟁이 강조됐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쏘련의 노동자계급이 맑스적 의미로서의 '대자적 계급'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익 집단의 집합체라고 말하죠. 1920년대부터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집산화 이후 농촌에서 유입된 후진 노동자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말하는데, 산업화 초기의 양상들만 열거할 뿐, 이후의 양상들에 대하여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돌격반 운동과 쓰따하노프 운동에서 후진 노동자들에게 선진 노동자들이 기술을 전수하거나, 작업 성과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하는 양상이 빈번했는데,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는 외재적 관계가 아니라 연대와 협업에 기초하여 사회주의적 경쟁을 펼쳐나갔다는 살아있는 증거로 되죠.
2-1. 상위 노동자 10%와 하위 노동자 10%의 임금 격차를 언급하면서, 숙련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가 고정되어 있는 계층임을 논문에서는 강조하고 싶어하는데, 쏘련에서 후자가 전자로 충분히 올라설 수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주장입니다. 1935년 말엽에 쓰따하노프 운동이 최초로 실시됐을 때 목표치를 완수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10~21%에 달했지만, 2년 후에는 5~14%로 줄어들었습니다. 쓰따하노프 노동자들이 특권에 기생하지 않고, 전체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거나, 생산기술의 향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숙련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격차도 소멸의 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된 것이죠.
2-2. 저자는 '대자적인 노동자계급'이 쏘련에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쓰따하노프 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미미했다는 점을 놓치고 있으며, 쓰따하노프 노동자들이 당의 지원을 받았고, 더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공장 관리자들의 보수주의와 소극적인 태도에 맞섰다는 사실ㅡ이에 관해서는 로버트 써스턴의 논문을 참고하면 좋습니다.ㅡ을 놓치고 있습니다. "작업현장의 여럿이 함께 실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 참가자들에게만 공이 돌아가는 것에 분개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그러한 사례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는지, 아니면 특정한 지엽적인 사례에 국한되는지부터 논하지 않는 이상, 쓰따하노프 운동의 전체적 성격을 규정짓는 데에 있어서 한계가 있죠.
2-3. 1938년 이후 생산단위 내부에서 관리자의 역할이 강조되고, 노동 규율이 강화됐다고 해도, 쏘련에서 노동자들이 공장 관리자들을 비판한 것으로 체포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노경덕은 노동규율이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일은 없었다고 한노사연 강연에서 말하지요. 1930년대에 마그니또고르쓰끄 지역의 용접기사로 일했던 미국인 존 스콧(John Scott)은 1940년 모쓰크바의 한 공장에서 열린 생산회의에 참석했을 때 노동자들이 "공장장을 비판할 수 있었고, 생산량과 생산의 질을 높이고, 원가를 어떻게 낮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제안서를 낼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노동자가 공장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자리잡혀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2-4. 노동자와 공장 관리자 사이에서 나타난 문제로 특별법정이 열렸을 때 후자가 전자에 대해 어떠한 발언권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도 지목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영국의 쏘련학자인 매리 맥올리는 "쏘련에서의 노동분쟁(1969)"에서 공장장은 피고의 자격으로만 법정에 출두할 수 있었고, 심의와 판결의 모든 과정에서 배제되었다고 말하죠. 쓰딸린 시기 쏘련에서 노동자들이 파편화된 이익 집단으로 기능했다면, 특별법정과 생산회의와 같은 기제는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고, 쓰따하노프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들의 여건과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생산회의에서 적극적으로 나설 일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쓰딸린 또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격차를 언급해도, 이를 철폐해야 함을 자신의 저작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2-5. '임금 격차'에 대해 논하자면, 전체 임금 중에서 성과급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습니다. 1차 5개년 계획의 실시 이후 노동자들의 급여를 책정할 때 사회적 소비 기금의 비중이 1944년까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29%(1929)에서 44%(1944) 정도로 확대됐지요. 그리고 1) 1947년부터 1954년까지 2배~3배로 인하된 도매 가격으로 노동자들이 기존보다 수백만 루블을 더 취득할 수 있었고, 2) 국가의 총 예산에서 책정되는 교육, 보건, 주거 부문의 지출량도 증가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쏘련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쓰딸린 시기에 대폭 상승했습니다. 사회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생활비 문제는 성과급뿐만이 아니라, 임금 책정에 있어 다양한 기준들과 국가의 시책을 보아야 하죠.
2-6. 자본주의 하에서 성과급의 성격과, 사회주의 하에서 성과급의 성격을 비교하는 데에 있어 유용한 자료는 1954년 쏘련에서 출판된 <정치경제학 교과서> 제3부 33장 "사회주의의 물질적 토대"가 있습니다. 관련 링크는
https://www.marxists.org/subject/economy/authors/pe/pe-ch33.htm에
있습니다.
3. 미시사적 측면에서 쏘련의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혹은 혜택을 받는 대신 당의 시책에 순응했다는 주장은 스티븐 코트킨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1990년대 이후로 유행했던 주장이죠. 다만 그러한 주장은 노동자들이 공장 내부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했다는 측면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전체주의론의 논거들 중 하나인 '노동자들의 원자화'ㅡ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쓰딸린 시기 쏘련에 대해 다룰 때 언급하는ㅡ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죠.
어째 읽으면서 자꾸 '개인주의'를 강조하길래 '이러면 전체주의 시각에서 개인을 지나치게 원자화해서 본다는 비판이랑 뭐가 다르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맞았던 것 같군요. 전체주의와 수정주의를 '절충'한다고 했으니 전체주의론의 입장이 많이 반영될 수 밖에 없는 것 같긴 하네요.
박수현의 논문에 대해 반론할 소재는 차고 넘치지만, 대표적인 자료로는 로버트 써스턴의 "Reassessing the History of Soviet Workers - Opportunities to Criticize and Participate in Decision Making"을 권합니다. 그리고 이 갤러리에 쓰따하노프 운동에 관해 올라왔던 게시글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쓰딸린 지도부가 계층과 계층의 격차에 안주하거나 조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철폐하는 방향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아울러, 노동자계급이 대자적이지 않았고, 선험적으로 호명됐다는 논변에 대해서도 쓰딸린 당시 1차 문헌들을 활용하며 반박하고 있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이 글의 논문에서는 주로 모세 레윈의 책을 인용하던데 레윈은 어떤 입장인가요? 코뮤니즘 레딧에서는 강추한다는 글을 봤었는데.
<레닌의 마지막 투쟁>의 저자로, 쓰딸린이 레닌을 계승하지 않았다고 보는 학자입니다. 주로 뜨로쯔끼주의 써클 및 단위들의 찬사를 받고 있죠. 쓰딸린이 레닌 유언장을 은폐했고, 그루지야 문제를 둘러싸고 레닌과 갈등을 벌였다는 각종 이야기들의 시초가 모셰 르윈에게서 나왔습니다.
르윈의 그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는, 1) '레닌 유언장' 자체의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것과 2) 그루지야 문제로 레닌이 쓰딸린을 '대러시아 국수주의자'라고 비판했을 때 혼수 상태에 이미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비밀리에 유언장을 작성하여 밀당을 하는 것은, 당의 중요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회부하는 레닌의 평소 당 사업 작풍과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레닌의 친필이 포함되어 있지 않죠. 그리고 후자에 대해서는, 레닌이 1922년 말엽 혼수 상태에 빠지기 전까지 당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므자바니(그루지야 공산당의 지도자)의 그루지야 대국주의를 비판했던 쓰딸린의 견해에 동조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르윈에 대한 비판으로는, 인도의 한 맑스-레닌주의 논자가 <혁명적 민주주의>지에 기고한 "모셰 르윈에 대한 '우리의 응답'('Our Reply' to Moshe Lewin)"을 보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쓰딸린이 관료주의의 '화신'이었다는 르윈의 주요 논거ㅡ그리고 뜨로쯔끼주의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애용하는ㅡ에 대해서도 이의 제기를 던지고 있는 글인 만큼, 대체적으로 읽을 만 합니다.
https://www.revolutionarydemocracy.org/rdv21n2/lewi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