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나 체코 폴란드 등지에서 소련이 부정선거 쿠데타해서 사회주의 세웠다는건 하나의 통념처럼 굳어져 있는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기에 어떤 식으로 반박하며, 동유럽 사회주의 성립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어떤 양상이었나요?
댓글 13
동유럽 국가들에서 사회주의가 '이식'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진 이야기인데, 사실과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헝가리의 경우, 당대 서방의 언론들조차 선거 과정이 공정했다고 진술하고 있고, 외부 세력의 개입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의 <르몽드>나, 뉴욕의 <해럴드 트리뷴>은 1947년 헝가리 의회 선거에 대한 보도에서 상대편 당원들을 향한 폭력이 선거 도중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지요. 부정 선거임을 입증하려면, 그에 대한 근거 문헌을 들어야 하는데, 대부분 확실한 사실관계에 입각하기보다, 추측에 입각한 경우가 많지요. 얼마나 많은 표가 '조작'되었는지에 대해 그들 스스로도 합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대부분 '수만 표'가 조작되었다고 말하는데, 전체 유권자 숫자를 고려할 때 미미한 비중에 불과합니다.
익명(211.196)2023-06-13 20:28:00
1945년 당시 헝가리의 유권자 수는 510만명이었고, 1947년에는 30만명 증가해서 540만명이었습니다. 헝가리 노농인민당이 '선거 조작'을 하려고 했다면 최소한 10만~20만표 이상 가량을 추가로 투표함에 기입해야 했을텐데, "수만 표가 조작"되었다는 이들의 주장에서 보듯, 기초적인 산수 계산조차도 되지 않는 것이죠. 선거가 조작됐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그에 부응하는 1차 문헌, 예컨대 쓰딸린이 헝가리 노농인민당 지도부에게 선거 조작을 지시했다는 문서를 출처로 밝히면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사실이 문헌적 근거를 통해 입증된 바는 전무하지요. 1947년 선거 당시 투표수 조작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부류들은 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사고조차도 탑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헝가리 문제에 관해서는 이전에 옆 갤러리에서 비슷한 질문이 올라와서 답변한 바 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은 위 링크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요약하자면, (1) 일반민주주의적 개혁을 헝가리 노농인민당이 주도했고, (2) 전후 재건 사업에서 에르노 게뢰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점, 그리고 (3) 토지개혁이나 교육기회의 확대 등이 노동자계급 뿐만 아니라 소지주당에 소속되어 있던 광범위한 대중을 견인하여, 헝가리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했다는 것이 주된 요지입니다. 일련의 모든 과정들은 공산당이 인민전선을 주도함으로써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제1기와 제2기에서 부각된 당면 과제들ㅡ토지개혁, 주요 기업의 국유화, 농촌에서의 협동조합 도입 등ㅡ을 일관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익명(211.196)2023-06-13 21:12:00
"1948년 초부터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새로 입당한 사람은 수천 명의 옛 전국 사회당원, 인민당원들을 포함하여 237,384명에 달했다. 슬로바키아 공산당에도 대중적인 입당 현상이 나타났다." -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혁명사』 제2권, 342쪽.
익명(211.196)2023-06-13 21:57:00
1948년 초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지지율 하락'이라는 위기에 직면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주장에는, 위와 같은 반례가 존재합니다. 1948년 2월에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고, 시위에 나섰던 것은 '지지율'의 문제가 아니라, 1945년 이후 전후 재건을 방해했던 우익 세력과, 기층 근로대중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했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사이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의 연장선상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예컨대, 1947년 3~4월에 가뭄으로 경제난이 일어났을 때 자본가들과 도매상인들은 독점이윤을 통해 물가상승을 유도했고, 대다수 노동자, 농민들을 곤경에 빠트렸지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국민위원회의 결의와 가두집회를 통해 그러한 폭거를 저지하는 데에 있어 성공을 거둔 바 있습니다.
익명(211.196)2023-06-13 22:24:00
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우익 진영은 마셜플랜을 통해 가뭄을 해결하고,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자는 입장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경제난의 실질적인 주동자로서 자신들이 고이윤을 통해 대다수 민중들의 생활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일환이었습니다. '경제난'의 실질적인 해결은 1947년 10월에 부르주아 정당들의 반대를 뚫고 통과된 '백만장자세' 법안과 같은 조치들을 통해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지요. 백만장자세의 경우, 이를 주도한 정당은 공산당이었고, 100만 크로나 이상의 재산소유자들로부터 특별세를 거두어 가뭄 피해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여 농촌 경제를 살리자는 취지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아울러, 이 모든 과정에서 노동자-농민의 행동통일은 아래로부터 가일층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익명(211.196)2023-06-13 22:49:00
1946~1948년 당시, 노동자들과 농민들 사이에서 공산당의 지지율은 우익 세력의 저항에 맞서면서, 오히려 상승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토지 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1946년 가을에 94만 3,271헥타르의 경작지를 농민들에게 재분배하기 위해 6개 이상의 농업 법안이 제출됐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농민위원회를 통해 농민들의 요구를 수렴했지요. 1947년 4월에는 '그라데츠 강령'을 통해 1) 50헥타르 이상의 지주 소유 농지의 분할과, 2) 농민에 대한 국영보험제도의 실시, 그리고 3) 국영 기계 기지의 창설에 기초한 농업 기계화를 촉구한 바 됩니다. 이에 대해 농민들은 농민 위원회에서 채택된 결의문들을 중앙에 보냄으로서 공산당의 제의에 화답했고, 1947년 7월 토지개혁 법안의 채택으로 귀결됩니다.
익명(211.196)2023-06-13 23:03:00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지지율이 1946년~1948년 사이에 상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준거로는, 이 당시 공산당의 강령과 방침을 들 수 있습니다. "민족의 대다수를 획득하자!"는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자산계급과 상공업자들에 의해 조장된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지주 및 부농에 맞서 토지개혁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기실 그러한 정책적 토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활성화 역시 '민족의 대다수를 쟁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강조했던 1947년 1월의 중앙위원회 결정서와,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 제1차 대회의 결의문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파업위원회와 농민위원회가 창설되어 기존의 지배적 계급에 대한 투쟁이 격화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익명(211.196)2023-06-13 23:29:00
일련의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이,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2월 혁명의 원인은 '지지율 하락으로 인한 위기의식'이나 '쿠데타', 혹은 '쏘련의 개입'으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2월 혁명이 일어난 원인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제시했던 50인 이상의 모든 공업 기업의 국유화와, 도매 상업의 국유화에 대한 요구를 우익 세력이 거부한 데에서 비롯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인민당과 민주당 등에 소속되어 있었던 12명의 각료들이 사표를 제출했고, 국민보안부대를 장악하여 공산당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도처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었지요.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은 오히려 우익 세력에 해당됐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각 급 단체들과 파업위원회, 대중조직을 통해 이에 대응했습니다.
익명(211.196)2023-06-13 23:54:00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주요 기업뿐만 아니라, 1948년 2월에 이르러 50인 이상의 '모든' 기업에 대한 국유화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이후 제반민주적 개혁 조치를 통해 대중적 신임을 획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우익 세력의 쿠데타에 맞서 같은 해 2월 22일에 공장평의회 전국대회가 개최됐을 때 전체 8000명의 대의원 중 7900명이 국유화에 찬성했다는 사실로 드러납니다. 더 나아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호소로 국민전선 행동위원회가 창설되었다는 점과, 프라하에서 1만 5천명의 노동자 경찰대가 조직되어, 보안부대를 동원하려 했던 자산계급의 기도를 미연에 저지했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우익 세력은 국민보안부대에 대한 기습적 장악 이외에 대중들을 확보할 수단을 지니지 않았지요.
익명(211.196)2023-06-14 00:09:00
이 당시 부르주아 계급의 쿠데타 시도에 대한 대중적 저항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프라하에서는 10만 명, 크라디츠에서는 2만 명 이상, 브르노에서는 4만 명 이상의 집회가 개최됐고, 각 공장에서도 공산당과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주도 아래 잇다른 집회가 열렸다."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혁명사』 제2권, 345쪽.)
익명(211.196)2023-06-14 00:14:00
주지하듯이, 1948년 '2월 혁명'은 부르주아 자산계급의 무력 쿠데타에 대한 공산당 및 민주적, 애국적 분자들의 적법한 대응에 해당됩니다. 1948년 2월 24일에는 250만 명이 총파업에 참여했고, 프라하만 해도 19만 6천명이 집결했는데, 당대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구수를 고려한다면 정치적 구도와 계급 간 역관계를 충분히 바꾸고도 남지요.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대해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을 생각할 때, "누가 누구를"의 문제는 중차대한 문제로 부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1948년의 체코슬로바키아는 25년 후의 칠레와 다른 길을 걸었고,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일각에서 말하는 '공산당의 쿠데타' 설은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동유럽 국가들에서 사회주의가 '이식'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진 이야기인데, 사실과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헝가리의 경우, 당대 서방의 언론들조차 선거 과정이 공정했다고 진술하고 있고, 외부 세력의 개입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의 <르몽드>나, 뉴욕의 <해럴드 트리뷴>은 1947년 헝가리 의회 선거에 대한 보도에서 상대편 당원들을 향한 폭력이 선거 도중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지요. 부정 선거임을 입증하려면, 그에 대한 근거 문헌을 들어야 하는데, 대부분 확실한 사실관계에 입각하기보다, 추측에 입각한 경우가 많지요. 얼마나 많은 표가 '조작'되었는지에 대해 그들 스스로도 합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대부분 '수만 표'가 조작되었다고 말하는데, 전체 유권자 숫자를 고려할 때 미미한 비중에 불과합니다.
1945년 당시 헝가리의 유권자 수는 510만명이었고, 1947년에는 30만명 증가해서 540만명이었습니다. 헝가리 노농인민당이 '선거 조작'을 하려고 했다면 최소한 10만~20만표 이상 가량을 추가로 투표함에 기입해야 했을텐데, "수만 표가 조작"되었다는 이들의 주장에서 보듯, 기초적인 산수 계산조차도 되지 않는 것이죠. 선거가 조작됐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그에 부응하는 1차 문헌, 예컨대 쓰딸린이 헝가리 노농인민당 지도부에게 선거 조작을 지시했다는 문서를 출처로 밝히면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사실이 문헌적 근거를 통해 입증된 바는 전무하지요. 1947년 선거 당시 투표수 조작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부류들은 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사고조차도 탑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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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문제에 관해서는 이전에 옆 갤러리에서 비슷한 질문이 올라와서 답변한 바 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은 위 링크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요약하자면, (1) 일반민주주의적 개혁을 헝가리 노농인민당이 주도했고, (2) 전후 재건 사업에서 에르노 게뢰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점, 그리고 (3) 토지개혁이나 교육기회의 확대 등이 노동자계급 뿐만 아니라 소지주당에 소속되어 있던 광범위한 대중을 견인하여, 헝가리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했다는 것이 주된 요지입니다. 일련의 모든 과정들은 공산당이 인민전선을 주도함으로써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제1기와 제2기에서 부각된 당면 과제들ㅡ토지개혁, 주요 기업의 국유화, 농촌에서의 협동조합 도입 등ㅡ을 일관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948년 초부터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새로 입당한 사람은 수천 명의 옛 전국 사회당원, 인민당원들을 포함하여 237,384명에 달했다. 슬로바키아 공산당에도 대중적인 입당 현상이 나타났다." -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혁명사』 제2권, 342쪽.
1948년 초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지지율 하락'이라는 위기에 직면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주장에는, 위와 같은 반례가 존재합니다. 1948년 2월에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고, 시위에 나섰던 것은 '지지율'의 문제가 아니라, 1945년 이후 전후 재건을 방해했던 우익 세력과, 기층 근로대중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했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사이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의 연장선상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예컨대, 1947년 3~4월에 가뭄으로 경제난이 일어났을 때 자본가들과 도매상인들은 독점이윤을 통해 물가상승을 유도했고, 대다수 노동자, 농민들을 곤경에 빠트렸지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국민위원회의 결의와 가두집회를 통해 그러한 폭거를 저지하는 데에 있어 성공을 거둔 바 있습니다.
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우익 진영은 마셜플랜을 통해 가뭄을 해결하고,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자는 입장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경제난의 실질적인 주동자로서 자신들이 고이윤을 통해 대다수 민중들의 생활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일환이었습니다. '경제난'의 실질적인 해결은 1947년 10월에 부르주아 정당들의 반대를 뚫고 통과된 '백만장자세' 법안과 같은 조치들을 통해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지요. 백만장자세의 경우, 이를 주도한 정당은 공산당이었고, 100만 크로나 이상의 재산소유자들로부터 특별세를 거두어 가뭄 피해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여 농촌 경제를 살리자는 취지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아울러, 이 모든 과정에서 노동자-농민의 행동통일은 아래로부터 가일층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1946~1948년 당시, 노동자들과 농민들 사이에서 공산당의 지지율은 우익 세력의 저항에 맞서면서, 오히려 상승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토지 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1946년 가을에 94만 3,271헥타르의 경작지를 농민들에게 재분배하기 위해 6개 이상의 농업 법안이 제출됐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농민위원회를 통해 농민들의 요구를 수렴했지요. 1947년 4월에는 '그라데츠 강령'을 통해 1) 50헥타르 이상의 지주 소유 농지의 분할과, 2) 농민에 대한 국영보험제도의 실시, 그리고 3) 국영 기계 기지의 창설에 기초한 농업 기계화를 촉구한 바 됩니다. 이에 대해 농민들은 농민 위원회에서 채택된 결의문들을 중앙에 보냄으로서 공산당의 제의에 화답했고, 1947년 7월 토지개혁 법안의 채택으로 귀결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지지율이 1946년~1948년 사이에 상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준거로는, 이 당시 공산당의 강령과 방침을 들 수 있습니다. "민족의 대다수를 획득하자!"는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자산계급과 상공업자들에 의해 조장된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지주 및 부농에 맞서 토지개혁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기실 그러한 정책적 토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활성화 역시 '민족의 대다수를 쟁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강조했던 1947년 1월의 중앙위원회 결정서와,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 제1차 대회의 결의문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파업위원회와 농민위원회가 창설되어 기존의 지배적 계급에 대한 투쟁이 격화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련의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이,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2월 혁명의 원인은 '지지율 하락으로 인한 위기의식'이나 '쿠데타', 혹은 '쏘련의 개입'으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2월 혁명이 일어난 원인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제시했던 50인 이상의 모든 공업 기업의 국유화와, 도매 상업의 국유화에 대한 요구를 우익 세력이 거부한 데에서 비롯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인민당과 민주당 등에 소속되어 있었던 12명의 각료들이 사표를 제출했고, 국민보안부대를 장악하여 공산당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도처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었지요.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은 오히려 우익 세력에 해당됐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각 급 단체들과 파업위원회, 대중조직을 통해 이에 대응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주요 기업뿐만 아니라, 1948년 2월에 이르러 50인 이상의 '모든' 기업에 대한 국유화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이후 제반민주적 개혁 조치를 통해 대중적 신임을 획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우익 세력의 쿠데타에 맞서 같은 해 2월 22일에 공장평의회 전국대회가 개최됐을 때 전체 8000명의 대의원 중 7900명이 국유화에 찬성했다는 사실로 드러납니다. 더 나아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호소로 국민전선 행동위원회가 창설되었다는 점과, 프라하에서 1만 5천명의 노동자 경찰대가 조직되어, 보안부대를 동원하려 했던 자산계급의 기도를 미연에 저지했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우익 세력은 국민보안부대에 대한 기습적 장악 이외에 대중들을 확보할 수단을 지니지 않았지요.
이 당시 부르주아 계급의 쿠데타 시도에 대한 대중적 저항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프라하에서는 10만 명, 크라디츠에서는 2만 명 이상, 브르노에서는 4만 명 이상의 집회가 개최됐고, 각 공장에서도 공산당과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주도 아래 잇다른 집회가 열렸다."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혁명사』 제2권, 345쪽.)
주지하듯이, 1948년 '2월 혁명'은 부르주아 자산계급의 무력 쿠데타에 대한 공산당 및 민주적, 애국적 분자들의 적법한 대응에 해당됩니다. 1948년 2월 24일에는 250만 명이 총파업에 참여했고, 프라하만 해도 19만 6천명이 집결했는데, 당대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구수를 고려한다면 정치적 구도와 계급 간 역관계를 충분히 바꾸고도 남지요.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대해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을 생각할 때, "누가 누구를"의 문제는 중차대한 문제로 부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1948년의 체코슬로바키아는 25년 후의 칠레와 다른 길을 걸었고,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일각에서 말하는 '공산당의 쿠데타' 설은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