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에선 스탈린은 예조프의 후임으로 말렌코프를 추천했는데 정치국에선 베리야를 밀어줘서 베리야가 되었다고 나오는데 팩트 체크 좀.
근데 이 말이 팩트면 nkvd는 단 한 번도 스탈리의 뜻대로 굴러간 적이 없다는 것인데 신기하네. 보통 어떤 정권이든 지도자들은 nkvd 같은 조직부터 통제하지 않나?
문재인이가 기무사 조졌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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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프 이후 후임으로 말렌꼬프가 아니라 베리야가 된 것은 쓰딸린 시기 쏘련이 '개인 독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국 CIA도 1950년대에 발간한 기밀 문서에서 전연방공산당(볼쉐비끼)이 쓰딸린 개인의 압도적인 정치력에 의해 '일인 독재'에 입각하여 굴러갔다는 발상을 거부하고 있는데, 실제로 당과 국가의 의사결정과정도 실질적으로 내부 구성원들 간의 의견 조율을 통해 이루어졌지요. 쓰딸린도 공산당의 당원이자, 정치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의사를 당의 결정보다 우위에 두지 않았던 것이고, 베리야가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익명(125.191)2023-07-01 00:16:00
답글
창작물이나 역사책 등지에서 엔카베데는 항상 스탈린의 오른팔이며 베리야는 충실한 스탈린의 측근으로 묘사되던데 애초에 베리야가 스탈린의 뜻으로 임명된 사람이 아니라는게 약간 신선한 충격이네요. 뭔가 내가 알고 있던 상식과 통념이 뿌리부터 잘못된 느낌... 심지어 저게 맑스주의자나 소련 공산당원도 아니고 공산주의랑 상관 없는 서구 역사학자인 아치 게티에게러 나온 말이니...
위 링크에 있습니다. 흔히 서방 언론, 매체에서 쓰딸린이 당 위에서 군림하며 철권 통치를 했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발상이 실제 현실과 부합하지 않다고 지적하지요.
익명(125.191)2023-07-01 00:33:00
답글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cia 사이트 들어가서 스탈린 관련 기밀문건 좀 검색해 봤는데 어떤 문서(1954년 작성)에서는 스탈린 1인 독재라 하는 등 전체적으로 소련에 대한 묘사가 통일되지 않고 오락가락 하는 느낌이더군요.
익명(i49gkz6a9c0i)2023-07-01 0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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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밑에 제가 질문한 '전형문제를 레닌은 어떻게 봤는지'에 대해서도 답변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익명(i49gkz6a9c0i)2023-07-01 01:43:00
답글
1953년 7월에 작성된 CIA 문서도 쓰딸린이 서기국을 기반으로 당 내부 및 외부의 인사들을 조종하면서 권력을 획득했고, 철권통치를 했다는 언급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애너 루이스 스트롱(A. R. Strong)과 같은 경우는 ≪쓰딸린의 시대(Stalin Era)≫에서 쏘련에서의 주요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쓰딸린의 지시', '쓰딸린의 결정'과 같은 류의 용어가 쓰이지 않았다고 진술하지요. 실제에 있어서도, 바실레프쓰끼와 쓰딸린 시기에 당과 국가의 주요 요직을 맡았던 기타 인사들이 진술하듯이,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기 이전에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군사위원회와 같은 기구들에서는 집단적인 의사 결정이 우선시됐고, 쓰딸린 본인도 독단적으로 모든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은 바 됩니다.
익명(125.191)2023-07-01 16:07:00
답글
위 링크의 CIA 문헌은 1955년에 작성된 문헌입니다. 1953~1955년 사이에 쏘련의 정치 상황에 대해 다룬 문헌들이 언급하신 대로 논조가 일관적이지 않은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차 검증의 영역으로 나아간다면, 쓰딸린 시기가 '1인 독재'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명확해지죠. 쓰딸린 본인도 주변인들의 찬사에 대해 달갑지 않게 여겼고, 1930년대부터 1953년까지 그 자신을 향한 '개인 숭배'의 풍토에 대해 반대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출했는데, 예컨대 1946년 당시 혁명의 신진 세대를 육성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전연방공산당(볼쉐비끼)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당 내부에 자기비판의 기풍을 가일층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논했을 때 특출한 인물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풍토를 규탄한 바 됐지요.
베리야가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 될 수 있었던 데에는 한 가지 요인이 더 있는데, 예조프 시기에 발생했던 각종 좌경적 오류들을 수습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합의점이 도출됐기 때문에 베리야가 된다고 해도 큰 하자는 없었습니다.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체포된 인원이 90% 이상으로 감소했고, 사형이 1% 미만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베리아는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 되고 나서 쓰딸린과 당 중앙위원회가 요구했던 바를 충실히 이행했지요. 아울러, 예조프의 만행으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되거나 좌천 내지 파면됐던 당원과 비당원들의 신원을 회복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익명(125.191)2023-07-01 00:55:00
답글
이에 대한 관련 자료로는, 그로버 퍼의 《흐루쇼프, 거짓말했다》의 관련 내용( http://lodong.org/wp/archives/5718)을 참고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흔히 베리야가 '숙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말해지는데, 1937년~1938년 사이에 베리야가 엔까베데에서 요직을 맡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지요.
익명(125.191)2023-07-01 01:02:00
답글
말렌꼬프가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 발탁되지 않았다고 해도, 숙청 과정에서 발생했던 오류들을 시정하자는 견해가 전당적인 중론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베리야라고 해도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죠. 예조프 시기 내무인민위원회에서 부조리를 자행했던 이들에 대한 조치가 이루어지고, 사회주의적 법치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조프 이후 후임으로 말렌꼬프가 아니라 베리야가 된 것은 쓰딸린 시기 쏘련이 '개인 독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국 CIA도 1950년대에 발간한 기밀 문서에서 전연방공산당(볼쉐비끼)이 쓰딸린 개인의 압도적인 정치력에 의해 '일인 독재'에 입각하여 굴러갔다는 발상을 거부하고 있는데, 실제로 당과 국가의 의사결정과정도 실질적으로 내부 구성원들 간의 의견 조율을 통해 이루어졌지요. 쓰딸린도 공산당의 당원이자, 정치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의사를 당의 결정보다 우위에 두지 않았던 것이고, 베리야가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창작물이나 역사책 등지에서 엔카베데는 항상 스탈린의 오른팔이며 베리야는 충실한 스탈린의 측근으로 묘사되던데 애초에 베리야가 스탈린의 뜻으로 임명된 사람이 아니라는게 약간 신선한 충격이네요. 뭔가 내가 알고 있던 상식과 통념이 뿌리부터 잘못된 느낌... 심지어 저게 맑스주의자나 소련 공산당원도 아니고 공산주의랑 상관 없는 서구 역사학자인 아치 게티에게러 나온 말이니...
그 CIA의 50년대 기밀 문건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
https://web.archive.org/web/20210427003852/https:/www.cia.gov/readingroom/docs/CIA-RDP80-00810A006000360009-0.pdf
위 링크에 있습니다. 흔히 서방 언론, 매체에서 쓰딸린이 당 위에서 군림하며 철권 통치를 했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발상이 실제 현실과 부합하지 않다고 지적하지요.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cia 사이트 들어가서 스탈린 관련 기밀문건 좀 검색해 봤는데 어떤 문서(1954년 작성)에서는 스탈린 1인 독재라 하는 등 전체적으로 소련에 대한 묘사가 통일되지 않고 오락가락 하는 느낌이더군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밑에 제가 질문한 '전형문제를 레닌은 어떻게 봤는지'에 대해서도 답변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1953년 7월에 작성된 CIA 문서도 쓰딸린이 서기국을 기반으로 당 내부 및 외부의 인사들을 조종하면서 권력을 획득했고, 철권통치를 했다는 언급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애너 루이스 스트롱(A. R. Strong)과 같은 경우는 ≪쓰딸린의 시대(Stalin Era)≫에서 쏘련에서의 주요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쓰딸린의 지시', '쓰딸린의 결정'과 같은 류의 용어가 쓰이지 않았다고 진술하지요. 실제에 있어서도, 바실레프쓰끼와 쓰딸린 시기에 당과 국가의 주요 요직을 맡았던 기타 인사들이 진술하듯이,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기 이전에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군사위원회와 같은 기구들에서는 집단적인 의사 결정이 우선시됐고, 쓰딸린 본인도 독단적으로 모든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은 바 됩니다.
위 링크의 CIA 문헌은 1955년에 작성된 문헌입니다. 1953~1955년 사이에 쏘련의 정치 상황에 대해 다룬 문헌들이 언급하신 대로 논조가 일관적이지 않은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차 검증의 영역으로 나아간다면, 쓰딸린 시기가 '1인 독재'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명확해지죠. 쓰딸린 본인도 주변인들의 찬사에 대해 달갑지 않게 여겼고, 1930년대부터 1953년까지 그 자신을 향한 '개인 숭배'의 풍토에 대해 반대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출했는데, 예컨대 1946년 당시 혁명의 신진 세대를 육성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전연방공산당(볼쉐비끼)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당 내부에 자기비판의 기풍을 가일층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논했을 때 특출한 인물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풍토를 규탄한 바 됐지요.
바실레프쓰끼의 쓰딸린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는 것이 좋습니다.
http://lodong.org/board/board.html?mtype=view&page=1&bid=3&num=327&seq=1598&replynum=327&shownum=325
아울러, 애너 루이스 스트롱의 쓰딸린 시기 당과 국가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진술은 ≪쓰딸린의 시대(The Stalin Era)≫ 22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PDF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michaelharrison.org.uk/wp-content/uploads/2018/07/The-Stalin-Era-Anna-Louise-Strong-Mainstream-NY-1956.pdf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lenin&no=1567&page=1
전형 문제에 대한 질문에 답변 남겼습니다.
베리야가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 될 수 있었던 데에는 한 가지 요인이 더 있는데, 예조프 시기에 발생했던 각종 좌경적 오류들을 수습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합의점이 도출됐기 때문에 베리야가 된다고 해도 큰 하자는 없었습니다.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체포된 인원이 90% 이상으로 감소했고, 사형이 1% 미만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베리아는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 되고 나서 쓰딸린과 당 중앙위원회가 요구했던 바를 충실히 이행했지요. 아울러, 예조프의 만행으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되거나 좌천 내지 파면됐던 당원과 비당원들의 신원을 회복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이에 대한 관련 자료로는, 그로버 퍼의 《흐루쇼프, 거짓말했다》의 관련 내용(
http://lodong.org/wp/archives/5718)을
참고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흔히 베리야가 '숙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말해지는데, 1937년~1938년 사이에 베리야가 엔까베데에서 요직을 맡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지요.
말렌꼬프가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 발탁되지 않았다고 해도, 숙청 과정에서 발생했던 오류들을 시정하자는 견해가 전당적인 중론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베리야라고 해도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죠. 예조프 시기 내무인민위원회에서 부조리를 자행했던 이들에 대한 조치가 이루어지고, 사회주의적 법치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