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강간' 문제에 대한 반론ㅡ독일이나 동유럽 일대를 기준으로ㅡ은 한국어 출판물 중에서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쏘련이나 20세기 사회주의를 공부하는 이들이 영어, 노어 자료들을 주로 살펴보는 것도 괜한 이유가 아니죠. 영어, 노어로 된 자료들이 반공주의 비판 가이드라인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어 자료들이 있었다면, 이미 수록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익명(218.51)2023-07-30 13:28:00
답글
국내 자료보다, 1차 및 2차 문헌이 영어나 노어로 풍부하게 있는 해외 자료들ㅡ특히 원사료들ㅡ을 참고하는 것이 사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국내의 제도권 학계에서는 전시 강간에 대한 그 당시의 대응 방침을 비롯한 1차 문서들을 직접적으로 연구하기보다, 오직 증언에 입각해서 하나의 사례를 전체적인 사례로 확대, 과장하는 경우가 많고, 담론의 폭도 협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강간이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 대상과 주체를 명확히 설정하기보다, '쏘련 군인'으로 모호하게 잡는 경우가 많지요. 전시강간에 대한 쏘련 군 당국의 대응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고,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사실인 것처럼 수긍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강합니다. 비교적 전향적인 학자들이라고 해도 김태우의 <냉전의 마녀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예외는 아니지요.
익명(218.51)2023-08-01 10:11:00
우선, 쏘련군의 전시 강간을 논하는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을 논하자면, 사료적 가치가 부족한 증언을 역사적 사실로 신봉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위 첫 번째 사진도 증언을 인용하며 소련군의 '잔학성'을 부각시키는 편인데, 전시 강간에 대해 쓰딸린이 1945년 1월에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는 것을 무시하고, 조치의 강도가 약하더라도 최소 7년 이상의 중노동형으로 선고됐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해방된 지역에서 여성과의 성적 관계는 용인될 수 없다. 성폭력과 강간을 저지른 범죄자는 총살에 처해야 한다"고 쓰딸린이 말한 것처럼, 준강제 매춘을 비롯한 모든 범법적 행위는 엄벌에 처해졌습니다. 쏘련군과 독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이 영국, 프랑스, 미국보다 더 적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입니다.
위 첫 번째 사진은 기본적으로 군 장교나 병사들이 강간을 자행했을 때 어떠한 조치가 내려졌는지 다루지 않습니다. O. A. 르제프쓰끼에 따르면, 1945년 초반-중반 사이에 군사재판에 회부된 군 장교는 4148명으로 약식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고, 실질적인 집행까지 이루어진 바 됩니다. 같은 해 4월 20일에 쓰딸린과 몰로또프가 작성한 《제1우끄라이나 전선군과 제2우끄라이나 전선군의 군 사령관들과 군사평의회 위원들에게 보내는 명령》의 첫 번째 조항에 따르면, "독일군 전쟁포로와 민간인들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을 요구하며, "독일인들에 대한 잔혹한 대우는 저항심만 더욱 부추길 뿐"이라고 지적하는데, 강간에 대해 법정 최고형인 사형에 처한다는 기존의 입장이 재확인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익명(218.51)2023-07-30 14:43:00
답글
쓰딸린이 1945년 1월 19일에 강간죄를 사형에 처한다는 지시를 하달한 이래로, 각 전선군의 지휘관들은 로꼬솝쓰끼가 그랬던 것처럼, 약탈범들과 강간범들에 대해 즉결처분을 내리며 적극적으로 대처한 바 됩니다. 이 당시 붉은 군대의 정치부서들에서 작성된 수천 건의 문헌들은 현지 인민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현상들을 예방하고, 퇴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각 전선군 사령부와 군사평의회의 밀접한 개입 하에서 수행됐지요. 붉은 군대 병사들에 의한 강간의 빈도가 대폭 감소한 것은 그에 따른 영향입니다. 베를린 전투에서 쏘련은 당 정치사업과 군사재판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강간을 최대한 예방하고자 했고, 이는 서방 국가들의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나똘리 까를린(A. Karlin)에 따르면,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전투원 90만명 중에서 강간을 저지른 인원은 1945년 4월 22일부터 1945년 5월 9일까지 72명으로 집계됐습니다. 붉은 군대의 규율이 미군 진영과 비교할 때 월등히 높았고, 전시 강간에 대해 엄격하게 처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전후에도 붉은 군대에서 "약탈, 강간, 기타 만행이 타국에 비해 심하지 않았"고, 러시아 군인들의 만행에 관한 소문들을 퍼뜨렸던 부류조차도 '러시아 군인들이 술에 취한 채 허공에 총을 발사한' 것밖에 그 어떤 만행도 보지 못했다고 시인해야 했을 정도였죠. 위 첫번째 사진의 책은 '증언'을 바탕으로 '쏘련이 독일인들에게 잔혹하게 대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데, 전형적인 취사 선택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익명(218.51)2023-07-30 15:33:00
답글
"변호사들은 독일 여성에 대해 성적으로 잔인하고 야수적인 만행을 저지른 일부 병사들이, 특히 흑인들의 경우 총살에 처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백인 미국인 병사들에게 강간당한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에게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해진 적이 없다.“
익명(218.51)2023-07-30 15:49:00
답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와 전후 독일에 진주했던 미군 사령부의 전시 강간에 대한 태도를 다룬 대목인데(위 링크 참조), 대체적으로 독일 여성에 대한 겁탈, 강간을 방치하거나 묵인하는 편이었고, 흑인 병사들에 한해 관련 죄목이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쏘련 병사들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고 말하는 수많은 '증언자'들은 미군을 러시아인들의 아시아적 야만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줄 보호자로 여기는 경향이 강한데, 실제 역사적 사실과 엄연히 상반되는 이야기죠. 마리암 게브하르트(Mariam Gebhardt)에 따르면, 연합군 진영 병사들과 독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6만 8천명 중에서 83%가 미군과 영국군, 프랑스군이 자행한 강간으로 태어났고, 쏘련군은 그에 반해 5% 정도에 그친 바 됩니다.
마리암 게브하르트 저 《말하지 못한 범죄들》에 대한 서평인데, 바이에른 일대에서 벌어진 미군의 전쟁 범죄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있습니다. 1945년 4월 30일에 미군이 뮌헨에 진주했을 때, 광범위한 약탈, 파괴, 강간을 벌였는데, 특히 여성들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구타를 일삼고 성적 수치심을 조장했지요. 독일 민간인에 대한 강간이 현지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ㅡ미군이 진주할 때 강간 등 온갖 수치를 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ㅡ을 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미군 병사들에 의한 강간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쏘련과 다르게 엄격한 처벌도 없었고, 미국 내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약한 흑인 병사들을 재판정에 회부하는 정도에 그치며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려 했지요.
익명(218.51)2023-07-30 16:38:00
답글
추가로, 역사학자 유리 주꼬프(Y. Zhukov)에 따르면, "쏘련군이 했다"고 알려진 강간의 대다수는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석방된 쏘련군 포로들이나, 나치의 점령 당시 쏘련에서 독일 본토로 이주당한 민간인들에 의해 일어난 측면이 큽니다. 아나똘리 까를린(A. Karlin)이 제1벨라루스 전선군에 대해 논한 것처럼 붉은 군대 현역 전투원들 사이에서 범죄율은 극히 낮은 편이었지요. 1945년에 미군과 함께 독일에 진주했던 호주의 특파원 오스마 화이트(Osmar White)도 "붉은 군대는 다른 연합국 국가들의 군대들과는 반대로 질서정연한 규율을 갖췄고, 범죄에 대한 대처뿐만 아니라 도시의 재건, 생활필수품의 제공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말할 만큼 현지에서 신뢰를 획득한 바 됩니다.
익명(218.51)2023-08-01 03:41:00
답글
그리고 "대기성 매춘"에 대해서도, 쏘련군 지휘부는 오히려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현역(現役) 붉은 군대 병사들이 강간을 적극적으로 일으켰다고 하기에는 대부분이 그러한 행위에 대해 불쾌감, 내지는 혐오감을 표출한 바 되며, 위 댓글 타래에서 다룬 것처럼 쏘련군 최고사령부나 각 전선군 사령부 등에 의해 명시적으로 금기시됐기 때문에 범죄율 또한 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지요. 미군 점령 지역에서 쏘련군 점령 지역으로 수많은 독일 여성들이 이동한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기성 매춘'은 오히려 생필품이 극히 부족했던 미군 점령 지역에서 만연했고, 쏘련군 점령 지역에서는 반대로 우유와 같은 기초적인 생필품도 공급됐기 때문에, 현지 여성들이 성매매에 종사할 동기나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 한반도 이북 지역의 강간 문제에 대해서는 노정협에서 일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붉은 군대에 의한 강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쏘련 군정 당국이 이를 방치했거나, 묵인 내지 지원했다는 견해는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의 과장이 섞인 증언에 상당 부분 기초하고 있지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이북에 거주했던 베네딕트회 신부 호플레(Hopple)는 쏘련군 병사들이 초기에 강간과 약탈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항상 정확했고, 병사 관리도 철저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1946년 1월부터 쏘련 군정은 헌병대를 투입해서 질서를 바로잡고, 강간범들을 사형에 처할 정도였지요. 조선일보 등지에서 말하는 것은 일부 사례를 짜집기해서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른바 '강간' 문제에 대한 반론ㅡ독일이나 동유럽 일대를 기준으로ㅡ은 한국어 출판물 중에서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쏘련이나 20세기 사회주의를 공부하는 이들이 영어, 노어 자료들을 주로 살펴보는 것도 괜한 이유가 아니죠. 영어, 노어로 된 자료들이 반공주의 비판 가이드라인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어 자료들이 있었다면, 이미 수록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국내 자료보다, 1차 및 2차 문헌이 영어나 노어로 풍부하게 있는 해외 자료들ㅡ특히 원사료들ㅡ을 참고하는 것이 사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국내의 제도권 학계에서는 전시 강간에 대한 그 당시의 대응 방침을 비롯한 1차 문서들을 직접적으로 연구하기보다, 오직 증언에 입각해서 하나의 사례를 전체적인 사례로 확대, 과장하는 경우가 많고, 담론의 폭도 협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강간이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 대상과 주체를 명확히 설정하기보다, '쏘련 군인'으로 모호하게 잡는 경우가 많지요. 전시강간에 대한 쏘련 군 당국의 대응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고,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사실인 것처럼 수긍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강합니다. 비교적 전향적인 학자들이라고 해도 김태우의 <냉전의 마녀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예외는 아니지요.
우선, 쏘련군의 전시 강간을 논하는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을 논하자면, 사료적 가치가 부족한 증언을 역사적 사실로 신봉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위 첫 번째 사진도 증언을 인용하며 소련군의 '잔학성'을 부각시키는 편인데, 전시 강간에 대해 쓰딸린이 1945년 1월에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는 것을 무시하고, 조치의 강도가 약하더라도 최소 7년 이상의 중노동형으로 선고됐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해방된 지역에서 여성과의 성적 관계는 용인될 수 없다. 성폭력과 강간을 저지른 범죄자는 총살에 처해야 한다"고 쓰딸린이 말한 것처럼, 준강제 매춘을 비롯한 모든 범법적 행위는 엄벌에 처해졌습니다. 쏘련군과 독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이 영국, 프랑스, 미국보다 더 적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입니다.
https://web.archive.org/web/20120401022017/http://gpw.tellur.ru/page.html?r=books&s=beevor
위 첫 번째 사진은 기본적으로 군 장교나 병사들이 강간을 자행했을 때 어떠한 조치가 내려졌는지 다루지 않습니다. O. A. 르제프쓰끼에 따르면, 1945년 초반-중반 사이에 군사재판에 회부된 군 장교는 4148명으로 약식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고, 실질적인 집행까지 이루어진 바 됩니다. 같은 해 4월 20일에 쓰딸린과 몰로또프가 작성한 《제1우끄라이나 전선군과 제2우끄라이나 전선군의 군 사령관들과 군사평의회 위원들에게 보내는 명령》의 첫 번째 조항에 따르면, "독일군 전쟁포로와 민간인들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을 요구하며, "독일인들에 대한 잔혹한 대우는 저항심만 더욱 부추길 뿐"이라고 지적하는데, 강간에 대해 법정 최고형인 사형에 처한다는 기존의 입장이 재확인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쓰딸린이 1945년 1월 19일에 강간죄를 사형에 처한다는 지시를 하달한 이래로, 각 전선군의 지휘관들은 로꼬솝쓰끼가 그랬던 것처럼, 약탈범들과 강간범들에 대해 즉결처분을 내리며 적극적으로 대처한 바 됩니다. 이 당시 붉은 군대의 정치부서들에서 작성된 수천 건의 문헌들은 현지 인민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현상들을 예방하고, 퇴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각 전선군 사령부와 군사평의회의 밀접한 개입 하에서 수행됐지요. 붉은 군대 병사들에 의한 강간의 빈도가 대폭 감소한 것은 그에 따른 영향입니다. 베를린 전투에서 쏘련은 당 정치사업과 군사재판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강간을 최대한 예방하고자 했고, 이는 서방 국가들의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https://www.stalinsociety.com/news/redarmyrapeofgermanygoebbels
아나똘리 까를린(A. Karlin)에 따르면,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전투원 90만명 중에서 강간을 저지른 인원은 1945년 4월 22일부터 1945년 5월 9일까지 72명으로 집계됐습니다. 붉은 군대의 규율이 미군 진영과 비교할 때 월등히 높았고, 전시 강간에 대해 엄격하게 처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전후에도 붉은 군대에서 "약탈, 강간, 기타 만행이 타국에 비해 심하지 않았"고, 러시아 군인들의 만행에 관한 소문들을 퍼뜨렸던 부류조차도 '러시아 군인들이 술에 취한 채 허공에 총을 발사한' 것밖에 그 어떤 만행도 보지 못했다고 시인해야 했을 정도였죠. 위 첫번째 사진의 책은 '증언'을 바탕으로 '쏘련이 독일인들에게 잔혹하게 대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데, 전형적인 취사 선택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변호사들은 독일 여성에 대해 성적으로 잔인하고 야수적인 만행을 저지른 일부 병사들이, 특히 흑인들의 경우 총살에 처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백인 미국인 병사들에게 강간당한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에게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해진 적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와 전후 독일에 진주했던 미군 사령부의 전시 강간에 대한 태도를 다룬 대목인데(위 링크 참조), 대체적으로 독일 여성에 대한 겁탈, 강간을 방치하거나 묵인하는 편이었고, 흑인 병사들에 한해 관련 죄목이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쏘련 병사들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고 말하는 수많은 '증언자'들은 미군을 러시아인들의 아시아적 야만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줄 보호자로 여기는 경향이 강한데, 실제 역사적 사실과 엄연히 상반되는 이야기죠. 마리암 게브하르트(Mariam Gebhardt)에 따르면, 연합군 진영 병사들과 독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6만 8천명 중에서 83%가 미군과 영국군, 프랑스군이 자행한 강간으로 태어났고, 쏘련군은 그에 반해 5% 정도에 그친 바 됩니다.
https://blogs.lse.ac.uk/lsereviewofbooks/2017/05/09/book-review-crimes-unspoken-the-rape-of-german-women-at-the-end-of-the-second-world-war-by-miriam-gebhardt/
마리암 게브하르트 저 《말하지 못한 범죄들》에 대한 서평인데, 바이에른 일대에서 벌어진 미군의 전쟁 범죄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있습니다. 1945년 4월 30일에 미군이 뮌헨에 진주했을 때, 광범위한 약탈, 파괴, 강간을 벌였는데, 특히 여성들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구타를 일삼고 성적 수치심을 조장했지요. 독일 민간인에 대한 강간이 현지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ㅡ미군이 진주할 때 강간 등 온갖 수치를 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ㅡ을 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미군 병사들에 의한 강간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쏘련과 다르게 엄격한 처벌도 없었고, 미국 내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약한 흑인 병사들을 재판정에 회부하는 정도에 그치며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려 했지요.
추가로, 역사학자 유리 주꼬프(Y. Zhukov)에 따르면, "쏘련군이 했다"고 알려진 강간의 대다수는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석방된 쏘련군 포로들이나, 나치의 점령 당시 쏘련에서 독일 본토로 이주당한 민간인들에 의해 일어난 측면이 큽니다. 아나똘리 까를린(A. Karlin)이 제1벨라루스 전선군에 대해 논한 것처럼 붉은 군대 현역 전투원들 사이에서 범죄율은 극히 낮은 편이었지요. 1945년에 미군과 함께 독일에 진주했던 호주의 특파원 오스마 화이트(Osmar White)도 "붉은 군대는 다른 연합국 국가들의 군대들과는 반대로 질서정연한 규율을 갖췄고, 범죄에 대한 대처뿐만 아니라 도시의 재건, 생활필수품의 제공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말할 만큼 현지에서 신뢰를 획득한 바 됩니다.
그리고 "대기성 매춘"에 대해서도, 쏘련군 지휘부는 오히려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현역(現役) 붉은 군대 병사들이 강간을 적극적으로 일으켰다고 하기에는 대부분이 그러한 행위에 대해 불쾌감, 내지는 혐오감을 표출한 바 되며, 위 댓글 타래에서 다룬 것처럼 쏘련군 최고사령부나 각 전선군 사령부 등에 의해 명시적으로 금기시됐기 때문에 범죄율 또한 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지요. 미군 점령 지역에서 쏘련군 점령 지역으로 수많은 독일 여성들이 이동한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기성 매춘'은 오히려 생필품이 극히 부족했던 미군 점령 지역에서 만연했고, 쏘련군 점령 지역에서는 반대로 우유와 같은 기초적인 생필품도 공급됐기 때문에, 현지 여성들이 성매매에 종사할 동기나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http://mlkorea.org/v3/?p=12208
해방 이후 한반도 이북 지역의 강간 문제에 대해서는 노정협에서 일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붉은 군대에 의한 강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쏘련 군정 당국이 이를 방치했거나, 묵인 내지 지원했다는 견해는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의 과장이 섞인 증언에 상당 부분 기초하고 있지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이북에 거주했던 베네딕트회 신부 호플레(Hopple)는 쏘련군 병사들이 초기에 강간과 약탈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항상 정확했고, 병사 관리도 철저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1946년 1월부터 쏘련 군정은 헌병대를 투입해서 질서를 바로잡고, 강간범들을 사형에 처할 정도였지요. 조선일보 등지에서 말하는 것은 일부 사례를 짜집기해서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