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어떤 맥락이었나요? 그럼 당시 소련 공산당과 쿠바 공산당 사이의 차이점이 많은 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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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과 독일과의 전쟁 도중 당이 쏘비에트를 통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집행하는 사례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후에도 그 여파가 일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쓰딸린은 이데올로기적 지도 기관으로서 당의 성격을 확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사무형, 관료형 인간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는 인자들로 당을 재구축하고, 대중을 경제, 사회,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주체로 내세우려고 했던 노력들이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된 1936년부터 1953년 3월 이전까지 전개됐지요.
익명(211.55)2023-09-04 22:07:00
경제적 문제에 집중하느라 군중의 사상의식을 발동하고 교양하는 정치사업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하는 풍조가 당 내부에 존재했는데, 1937년 2월에 발표된 "논쟁에 화답하는 연설"에서 쓰딸린이 집중적으로 규탄한 주제였죠. 또 다른 요소로는 내전 이래로 지방당 제1서기들이 당 기구를 배타적, 독점적으로 사유화해서 소집단을 형성한 사례들이 있었는데, 당 사업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중시하고,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묵살하는 행위였던 만큼 쓰딸린에 의해 1930년대부터 줄곧 비판받은 바 됩니다. 쓰딸린이 말년에 취한 행보는 1930년대에 가열차게 추진됐던 반관료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죠.
익명(211.55)2023-09-05 00:50:00
답글
그럼 그 당시랑 현재의 쿠바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보다 대중 정치 사업에 집중하고, 또 반관료투쟁에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것이가요?
레갤러 1(211.218)2023-09-05 12: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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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꾸바 공산당은 7.26 운동을 실질적으로 계승하여, 1965년 이후에 창당된 공산당과는 결이 다른 조직입니다. 체 게바라를 제외한 7.26 운동의 지도자들 상당수는 본래 민족주의적 신념을 가졌고, 이후 사회주의자로 바뀐 케이스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당시 꾸바 공산당은 바티스타 정권의 탄압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쏘련 공산당과 비교하기에는 적절한 예시가 되지 못하죠. 옆 갤러리에서 언급된 '꾸바 공산당'은 따라서 현재의 꾸바 공산당을 염두한 것이라고 봅니다. - dc App
익명(211.55)2023-09-07 02: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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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꾸바 공산당은 90년대와 다르게 사상사업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국주의 세력의 포위와 공세 속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해나갈 수 있다는 의식이 이전 세대에 비해 약한 상태이죠. 가장 최근에는 소생산자들의 생산활동을 합법적으로 승인하는 조치를 실시하고 있는데, 그로 인한 여파도 큽니다. 장마당의 국영상점으로의 포섭과 농업 부문에서도 현대화를 통해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를 꾀하고 있는 조선(북한)과는 대조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요. 물론 꾸준히 지켜보아야 할 일이지만, 현 꾸바는 이데올로기적 지도 기관으로서 당의 역할이 현재로서는 약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 dc App
익명(211.55)2023-09-07 02: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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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1930년대에 개시된 대항계획과 쓰따하노프 운동 도중 생산회의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기업소 관리자들의 소환과 파면을 추동했던 주체가 각 생산단위의 당 위원회였던 만큼, 쏘련 공산당이 꾸바 공산당에 비해 특별히 대중들에 대한 정치사업을 강조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는 없습니다. 쓰몰렌쓰끄 지역당 1서기 루먄체프가 1937년에 평당원들에 의해 파면됐고, 모쓰끄바 지역당 1서기 흐루쇼프가 비슷한 시기에 무분별한 숙청으로 좌천됐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20년대에 비해 상황은 비교적 나았죠. 진정 관건이 되는 것은 그러한 강조가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고, 전쟁 당시 당원들이 가장 먼저 사망함으로써, 군부와 제1서기들을 견제할 세력이 약화됐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 dc App
익명(59.5)2023-09-19 0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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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딸린도 이를 인식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원에서 당과 국가를 분리시키기 위해 숱한 노력을 했습니다. 이 당시 쏘련 공산당의 맑스-레닌주의 지도부가 추구했던 방침은 내전과 전쟁으로 인해 지역의 행정적 업무까지 당이 일시적으로 도맡았던 관행을 없애고, 쏘비에트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원이 당원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조직 및 쏘비에트의 구성원으로서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획득하기 위해 인민의 심부름꾼으로서 모범을 보인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지요. 1940년대 중후반에 즈다노프와 함께 쏘련 공산당 19차 대회를 소집하고자 한 것도, 경제 • 정치 • 철학 • 문예 등의 분야에서 군중 동원을 추구했던 것도 기실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 dc App
익명(59.5)2023-09-19 0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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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우리 쏘비에트 기관 전체, 예컨대 우리의 군대, 우리의 운수기관, 우리의 경제기관 등이 우리 당의 기관이라거나, 쏘비에트 등을 대신할 수 있다거나 또 당을 국가권력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레닌은 “쏘비에트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여러 번 말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당이 국가권력이며, 쏘비에트와 당이 동일하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수십만의 당원을 가지고 있는 당은 수천만의 당원 및 비당원을 망라하고 있는 중앙과 지방의 쏘비에트와 그 가지들을 지도한다. 그러나 당은 그 자체가 쏘비에트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며, 대신해서도 안 된다.
ㅡ 쓰딸린, 「레닌주의의 제문제에 대하여」, 『쓰딸린 선집』 제2권, 학우서방, 1964, p. 29. - dc App
익명(59.5)2023-09-19 02: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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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닌은 ”쏘비에트 내부에 조직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재를 실현하고 있으며, 또한 볼쉐비끼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과 “당의 모든 사업은 직업 여하를 막론하고 근로대중을 망라하고 있는 쏘비에트를 통하여 진행“되며(『전집』, 제25권, pp. 192-193를 보라.), 독재는 ”쏘비에트 기구를 거쳐서 이루어지게 된다“(『전집』, 제26권, p. 64를 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의 지도적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동일시하는 자는 쏘비에트, 즉 국가권력을 당과 슬며시 바꾸어 놓는 자이다.
ㅡ 쓰딸린, 「레닌주의의 제문제에 대하여」, 『쓰딸린 선집』 제2권, 1964, pp. 29-30. - dc App
익명(59.5)2023-09-19 0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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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공산당을 국가기구와 동일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전자는 당이 쏘비에트를 대신하여 행정 • 사무를 전쟁 이후에도 맡아야 한다는 지방당 1서기들의 견해였고, 반면에 후자는 쓰딸린 등이 취했던 스탠스였죠. 전자의 입장이 문제로 되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참여도 신장을 가로막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위해 필요한 당과 국가의 조락을 예비하는 데에 있어 차질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지방의 당 지도자들은 쓰딸린에 맞서 비상상황에서 취득했던 권한을 이후에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자 했었지요. 결론적으로, 쏘련의 수정주의화는 당이 쏘비에트를 통해 국가를 지도한다는 개념이 각인되지 못했던 영향이 큽니다. - dc App
내전과 독일과의 전쟁 도중 당이 쏘비에트를 통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집행하는 사례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후에도 그 여파가 일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쓰딸린은 이데올로기적 지도 기관으로서 당의 성격을 확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사무형, 관료형 인간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는 인자들로 당을 재구축하고, 대중을 경제, 사회,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주체로 내세우려고 했던 노력들이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된 1936년부터 1953년 3월 이전까지 전개됐지요.
경제적 문제에 집중하느라 군중의 사상의식을 발동하고 교양하는 정치사업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하는 풍조가 당 내부에 존재했는데, 1937년 2월에 발표된 "논쟁에 화답하는 연설"에서 쓰딸린이 집중적으로 규탄한 주제였죠. 또 다른 요소로는 내전 이래로 지방당 제1서기들이 당 기구를 배타적, 독점적으로 사유화해서 소집단을 형성한 사례들이 있었는데, 당 사업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중시하고,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묵살하는 행위였던 만큼 쓰딸린에 의해 1930년대부터 줄곧 비판받은 바 됩니다. 쓰딸린이 말년에 취한 행보는 1930년대에 가열차게 추진됐던 반관료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럼 그 당시랑 현재의 쿠바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보다 대중 정치 사업에 집중하고, 또 반관료투쟁에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것이가요?
그 당시 꾸바 공산당은 7.26 운동을 실질적으로 계승하여, 1965년 이후에 창당된 공산당과는 결이 다른 조직입니다. 체 게바라를 제외한 7.26 운동의 지도자들 상당수는 본래 민족주의적 신념을 가졌고, 이후 사회주의자로 바뀐 케이스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당시 꾸바 공산당은 바티스타 정권의 탄압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쏘련 공산당과 비교하기에는 적절한 예시가 되지 못하죠. 옆 갤러리에서 언급된 '꾸바 공산당'은 따라서 현재의 꾸바 공산당을 염두한 것이라고 봅니다. - dc App
현재의 꾸바 공산당은 90년대와 다르게 사상사업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국주의 세력의 포위와 공세 속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해나갈 수 있다는 의식이 이전 세대에 비해 약한 상태이죠. 가장 최근에는 소생산자들의 생산활동을 합법적으로 승인하는 조치를 실시하고 있는데, 그로 인한 여파도 큽니다. 장마당의 국영상점으로의 포섭과 농업 부문에서도 현대화를 통해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를 꾀하고 있는 조선(북한)과는 대조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요. 물론 꾸준히 지켜보아야 할 일이지만, 현 꾸바는 이데올로기적 지도 기관으로서 당의 역할이 현재로서는 약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 dc App
마지막으로, 1930년대에 개시된 대항계획과 쓰따하노프 운동 도중 생산회의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기업소 관리자들의 소환과 파면을 추동했던 주체가 각 생산단위의 당 위원회였던 만큼, 쏘련 공산당이 꾸바 공산당에 비해 특별히 대중들에 대한 정치사업을 강조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는 없습니다. 쓰몰렌쓰끄 지역당 1서기 루먄체프가 1937년에 평당원들에 의해 파면됐고, 모쓰끄바 지역당 1서기 흐루쇼프가 비슷한 시기에 무분별한 숙청으로 좌천됐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20년대에 비해 상황은 비교적 나았죠. 진정 관건이 되는 것은 그러한 강조가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고, 전쟁 당시 당원들이 가장 먼저 사망함으로써, 군부와 제1서기들을 견제할 세력이 약화됐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 dc App
쓰딸린도 이를 인식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원에서 당과 국가를 분리시키기 위해 숱한 노력을 했습니다. 이 당시 쏘련 공산당의 맑스-레닌주의 지도부가 추구했던 방침은 내전과 전쟁으로 인해 지역의 행정적 업무까지 당이 일시적으로 도맡았던 관행을 없애고, 쏘비에트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원이 당원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조직 및 쏘비에트의 구성원으로서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획득하기 위해 인민의 심부름꾼으로서 모범을 보인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지요. 1940년대 중후반에 즈다노프와 함께 쏘련 공산당 19차 대회를 소집하고자 한 것도, 경제 • 정치 • 철학 • 문예 등의 분야에서 군중 동원을 추구했던 것도 기실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 dc App
레닌은 우리 쏘비에트 기관 전체, 예컨대 우리의 군대, 우리의 운수기관, 우리의 경제기관 등이 우리 당의 기관이라거나, 쏘비에트 등을 대신할 수 있다거나 또 당을 국가권력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레닌은 “쏘비에트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여러 번 말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당이 국가권력이며, 쏘비에트와 당이 동일하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수십만의 당원을 가지고 있는 당은 수천만의 당원 및 비당원을 망라하고 있는 중앙과 지방의 쏘비에트와 그 가지들을 지도한다. 그러나 당은 그 자체가 쏘비에트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며, 대신해서도 안 된다. ㅡ 쓰딸린, 「레닌주의의 제문제에 대하여」, 『쓰딸린 선집』 제2권, 학우서방, 1964, p. 29. - dc App
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닌은 ”쏘비에트 내부에 조직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재를 실현하고 있으며, 또한 볼쉐비끼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과 “당의 모든 사업은 직업 여하를 막론하고 근로대중을 망라하고 있는 쏘비에트를 통하여 진행“되며(『전집』, 제25권, pp. 192-193를 보라.), 독재는 ”쏘비에트 기구를 거쳐서 이루어지게 된다“(『전집』, 제26권, p. 64를 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의 지도적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동일시하는 자는 쏘비에트, 즉 국가권력을 당과 슬며시 바꾸어 놓는 자이다. ㅡ 쓰딸린, 「레닌주의의 제문제에 대하여」, 『쓰딸린 선집』 제2권, 1964, pp. 29-30. - dc App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공산당을 국가기구와 동일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전자는 당이 쏘비에트를 대신하여 행정 • 사무를 전쟁 이후에도 맡아야 한다는 지방당 1서기들의 견해였고, 반면에 후자는 쓰딸린 등이 취했던 스탠스였죠. 전자의 입장이 문제로 되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참여도 신장을 가로막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위해 필요한 당과 국가의 조락을 예비하는 데에 있어 차질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지방의 당 지도자들은 쓰딸린에 맞서 비상상황에서 취득했던 권한을 이후에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자 했었지요. 결론적으로, 쏘련의 수정주의화는 당이 쏘비에트를 통해 국가를 지도한다는 개념이 각인되지 못했던 영향이 큽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