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여인의 이름을 한 태풍이 중부지방을 지나는 중이었다. 부산에는 구경꾼 같은 심심한 빗줄기가 잠깐씩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새벽에는 비가 내렸고 정오에는 그쳤다.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조금 늦을지도 모른다는 연락이 왔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릴 때는 늘 일이 꼬이는 법이다. 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독서에 집중했다. 그는 사르트르의 소설을 읽는 중이었다.
여자가 바깥에 비가 오는지 물었다. 남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답했다. 삼십 분 뒤에 그들은 만났다. 남자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자는 그 말을 믿는 척한다. 그들은 강변을 걸었다. 카페들이 늘어선 거리는 차분하게 젖어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자그마한 식당에 들어간다. 중국식 크림 국수와 볶음밥을 주문했다. 1500원짜리 생맥주를 하나 시켜 나눠 마셨다. 식당 한켠에는 옛날 홍콩영화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자주 웃었다. 여자는 앞머리를 잘라야 좋을는지 묻는다. 남자는 부산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여자의 젓가락질을 유심히 본다.
그들은 다시 강변을 걷기로 한다. 여자는 문득 고개를 든다. 보름달이야, 그러네,
마침맞게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퍼진다. 잠을 잊은 물고기들이 퐁당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여자의 자그마한 콧잔등 위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여자는 코를 찡그린다. 비가 또 오려나봐, 남자는 여자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웃었다. 집에 가야지 빗줄기가 굵어지기 전에, 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조금 더 빨리 걷기로 했다.
여자의 집 앞 정자에 잠시 앉기로 한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괜히 빨리 걸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앉을 수 있잖아,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젓가락질 못하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거든, 난 젓가락질 잘하는데, 남자가 웃자 여자도 웃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니? 여자는 고개를 젓는다. 남자는 조용히 속으로 발음한다.
“그런 비밀을 꼭 가지고 싶었어. 그리고 그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어”
너는 나를 기억할까? 여자가 묻는다. 남자는 웃는다. 달빛이 내려앉은 산뜻한 콧잔등을 본다. 오늘 세상에 비가 단 한방울만 내려야 한다면,
남자는 더이상 어떤 여자의 옆얼굴을 보며 바다를
떠올리지 않는다. 여자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남자는 돌아선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걷는다. 보름달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 이제 남자와 여자는 영영 만나지 못한다. 그 밤은 누구의 울음도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소리내어 말하지 못할 울음이었다.
어떤 사람은 슬픈 예감을 예언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