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오래된, 불과 며칠 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다. 남자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소설을 본다. 뒤에 놓인 서가와 꽃병, 소설책, 남자가 어우러져 싸구려 정물화에서나 느껴질 법한 정적을 자아낸다. 그는 커피나 차도 주문하지 않는다. 남자를 쫓아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시선 한 번 주는 사람조차 없다. 익숙한 무관심 덕분에 하품이 나온다. 남자는 심심해진다. 조용히 책을 덮자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린다. 당연한 인과다. 남자는 남자가 보고 싶었으므로 비가 오는 것이다. 바깥의 사람들은 이 당연한 인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비를 피해 허둥지둥 움직인다. 남자는 휑한 눈으로 그런 사람들을 응시한다. 바쁘게 달리는 인파 사이로 한 남자가 젖은 어깨를 털며 카페의 문을 열어젖힌다. 남자가 기다리던 남자였고, 보고 싶어하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남자에게 있어 당연한 인과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남자의 눈이 비로소 생기를 띤다. 남자는 익숙하게 남자의 앞에 앉아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이네.”

  “오랜만은 무슨. 요즘 장마잖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장마를 만든 거야.”

  “순전히 우연인걸?”

  “미친. 차라리 기상예보를 믿겠다.”

  남자는 남자의 얼굴에 뱉듯이 대꾸하고는 젖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 놓는다. 남자는 읽다 만 소설책을 서가에 꽂아 놓는다. 카페 주인은 밀린 주문을 소화하느라 가만히 의자에 앉아 쉬고 있다. 온종일. 자리로 돌아온 남자가 묻는다.

  “어떻게 쓸만한 건 가져왔어?”

  “아무것도 없었어. 꿈도 기억나지 않고, 그럴듯한 사건도 없고, 반짝이는 영감이나 문장도 씨발.”

  “새끼, 제대로 직무유기네.”

  “직무유기는 나 같은 놈한테 쓸 말이 아닐 텐데.”

  “하. 이 꽉 막힌 새끼는 어떻게 된 게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질 않아요. 됐고, 진짜 아무것도 없어?”

  “사실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거라도 보여줘.”

  “쪽팔린 데.”

  “우리 사이에 쪽팔릴 게 뭐 있어. 빨랑 내놔.”

  “알았어. 근데 약속 하나만 해.”

  “뭘?”

  “보고 나서 욕을 하거나 폭력을 사용하진 말아줘.”

  “등신이 얼마나 대단한 걸 썼길래 약속까지 하래.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 그리 해드릴게.”

  그제야 남자는 외투 속을 뒤져 스마트폰을 꺼내 놓는다. 7월 24일부터 7월 30일까지 일주일간의 메모장은 공백에 가깝다.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쓰다 만 단편 하나가 덩그러니 남자를 맞이한다. 어이, 친구. 나밖에 없다고 실망한 것은 아니지? 건조한 바탕체 문자들이 혓바닥을 내민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남자의 입가가 어그러진다. 가톨릭 7대 주선 중 하나인 인내가 필요한 때이다. 남자는 자신이 가진 인내의 여유분을 싹싹 긁어모아 부들거리는 주먹을 내려놓는다. 남자는 폭력을 사용하는 대신, 미완성 단편을 또박또박 읽어나간다. 물론 남자와 남자를 제외한 카페의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단 걸 남자는 알고 있다. 글은 이렇다.

  [ 서른넷의 선미는 요즘 들어 삶이 즐겁다. 남편이 남겨준 두둑한 사망 보험금을 탕진하는 데에 재미가 들렸기 때문이다. 남편의 부모는 이미 세상을 등진 지 오래고, 둘 사이에 자식도 없으므로 5억 원에 달하는 보험금이 모두 선미의 몫이었다. 거기에 남편 명의의 아파트까지 저절로 굴러들어왔으니 모두 합하면 7억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발인을 마치고 삼일 뒤, 선미는 팀장에게 퇴사를 통보했다. 배우자의 죽음이라는 완벽한 이유가 있었기에 팀장도 군소리하지 않았다. 심경에 중대한 변화가 있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한 달간의 인수인계 기간이 지나고 그녀는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변했다.

  선미는 콜센터 대신 호스트바에 가서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다. 독수공방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친구들이 술김에 회포나 풀자며 끌고 간 것이 시초였다. 정작 유흥을 주도한 친구들은 비싼 테이블 요금에 못 이겨 나가떨어지고 이제는 그녀 혼자 남게 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미의 지명은 변하지 않는다.
  민준이예요.
  담담한 소개. 알아듣지 못할 가명들 사이의 유일한 본명. 선미는 그를 보면서 도심 복판에 자리 잡은 공원을 떠올린다. 너는 주위의 애들과는 다른 순수함을 가지고 있어. 나는 그게 보여. 민준의 눈동자는 바다를 닮았다. 신혼여행지였던 산토리니에서 마주한 빛깔. 몸을 던지고 싶다.

  눈치 볼 친구도 사라진 선미는 갈수록 대담해진다. 자신의 아파트로 민준을 데려온다. 저녁을 먹이고, 잠을 재우기도 한다. 선미는 옆에 누워 속삭인다.  
  나는 너만 사랑해. 너만 사랑하게 됐어.
  아침이 되면 에그 베네딕트와 핫식스를 상에 올린다. 민준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음료수다. 민준은 핫식스를 하루에 세 캔씩 꼭 마셔야 성이 찬다. 그의 말마따나 하루를 버티기 위함이다. 아침상을 깨끗이 비우면 민준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날 쓸 돈을 타내어 밖으로 나간다. 선미는 민준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선선히 돈을 내준다. 그럴 때면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 것 같다. 뿌듯함이 온몸을 채운다. 아 씨발 재미없네 ]

  또렷한 목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지는 내내 글을 쓴 남자는 손발이 오그라든다. 남자는 생각한다.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다고. 하지만 죽지 못한다. 자살을 결정하려면 남자와 남자로 이루어진 2인이 만장일치로 한강에 뛰어드는 것에 찬성해야 하는데, 글을 읽고 있는 남자는 생에 대한 미련이 남자보다 월등히 깊으므로 보나 마나 의결정족수 미달이다. 쪽팔림은 마지막 ‘아 씨발 재미없네’ 에서 극대화된다. 차라리 벌거벗고 대화하는 게 나을 텐데.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남자는 마지막 문장을 특별히 세 번 정도 더 읽어주고 나서야 스마트폰을 돌려준다.

  “아, 씨발. 재미있네?”

  남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외투에 집어넣는다. 황급히 얼굴을 묻는 자세가 꼭 우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남자는 울지 않는다. 남자의 눈물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교회에서 만난 여자친구와의 아픈 연애 끝에 터득한 삶의 진리다. 남자는 고인 눈물을 훔치고 얼굴을 든다. 남자는 눈물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말한다.

  “너 비스티 보이즈 봤지?”

  “어떻게 알았어?”

  “척하면 척이지. 우리가 남이냐?”

  “남이 되고 싶다.”

  “희망 사항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희망 사항인 거야. 그나저나 비스티 보이즈 재밌지?”

  “재밌게 봤지. 하정우야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좋았던 건 윤계상 연기였어.”

  “가장 좋았던 것이 윤계상 연기라고? 에이, 거짓말.”

  “맞아. 거짓말이야. 윤진서랑 윤계상 베드씬이 가장 좋았어.”

  “그래. 우리 솔직해지자. 나도 베드씬 좋긴 했는데 아쉬운 게 있다면 윤진서가 너무 스키니한 몸매라는 점?”

  “나도 그게 좀.”

  “근데 이런 연구결과도 있더라. 사람이 배고플 때는 상대적으로 풍만한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배부를 땐 날씬한 이성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기사 하나를 보여준다. 식욕에 따라 달라지는 이성의 성적매력이라는 제목. 쓸데없는 연구라고 한마디 하려다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 남자도 이런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클릭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글 이야기는 이쯤 하자. 보니까 답도 없더구먼. 약속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죽빵날리려다 참았다. 네게 만회할 기회를 주지. 괜찮은 품번이나 추천해봐.”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남자가 선심 쓰듯 말한다. 너무 당당해서 순간 뭐든 불어버릴 뻔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막무가내다. 참다못한 남자가 반문한다.

  “이 세상에 품번을 외우고 다니는 사람도 있냐?”

  “있지. 고등학교 때의 네가 그랬잖아.”

  “아니, 야, 그건 좀. 너무 옛날 일이잖아. 지금은 그 정도 아니라고.”

  “내가 착해서 그냥 속아 넘어가 준다. 고맙게 생각해.”

  “아니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내가 미안.”

  남자가 웃으며 한발 물러선다. 그 모습에 남자는 도리어 불안해진다. 남자가 남자를 잘 아는 것과 같이 남자도 남자를 잘 알고 있다. 화전양면전술. 이를테면 북한과 비슷한 것이다. 미소 띤 얼굴로 등에 칼을 꼽을지도 모른다. 틈틈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만을 노리는 놈이니까. 그럼 나 역시 미쳐버리겠지. 바깥을 보니 비가 그쳐가고 있다. 소나기.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떠날 시간이다. 대화가 더 길어지면 위험할 것 같으니 다행인가. 남자가 일어선다. 남자도 문까지 따라온다. 남자는 헤어짐에 앞서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넌 누구야.”

  남자는 대답한다.

  “아무도 아니야. 난 그 누구도 아니야. 부랑자, 거지, 떠돌이 일꾼, 박스 카, 와인 통. 네가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면 날카로운 면도칼이 될 수도 있지.”

  찰스 맨슨. 같은 대답이므로 남자는 카페를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