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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빛 새순이 검은색을 밀어내면
이제야 알겠다, 내 얼굴이
밖에서 새겨진 것이 아니라 안에서 천천히 이루어졌음을,
그리하여 눈은 내 안쪽의 어둠을 먼저 들여다보고 외부를 보았음을
-송재학, 「악기가 필요할 때」 중에서
윤우에게.
마주 선 우리를 미닫이문이 가로막고 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오래된 재봉틀과 부속 재료들이 틀어박힌 어두운 방. 내가 서 있는 곳은 명절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주방.
우리는 각자 다른 시공간에 서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미닫이문을 스르륵 닫았다가 한순간 활짝 열어젖히면 너는 불현 듯 나타난 내 모습을 보고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던 내가 문 여는 시간을 조금 늦추거나 아예 멈춰버리면 너는 이내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아마 이별에 대한 원초적 불안 때문이겠지. 이를테면, 장장 열 달 동안 양수에 담겨 어미와 한 몸을 이루고 있다가 마침내 탯줄이 끊기고 어미의 몸과 헤어졌을 때 터져 나오던 신생아 시절의 그것처럼. 그래서 그럴까, 인간은 누구나 그 분리불안으로 인한 원초적 트라우마를 지니게 된다지.
그러나 윤우야,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이별의 순간을 반갑게 맞이하고, 혼자 있음의 시간을 엿가락처럼 늘려 나가는 것인지 모른다. 바꿔 말해 네가 서 있는 방 안의 어둠에 익숙해지고, 그 어둠 속에서 익어가는 것. 그것이 '성숙'에 다름 아니라면……
언젠가는 네 앞을 가로막아 선 문 너머, 참을 수 없는 존재를 지향하던 눈길을 돌리고 너의 내면풍경 같은 방 안의 어둠을 돌보아야 할 때가 오리라. 오븐 안에서 익어가는 빵처럼 어둠에 익어 부풀어 오른 눈동자로 재봉틀이며 실꾸리며 바늘 등등의, 그간 돌보지 않았던 너의 내면을 돌보아야 할 때가 오리라. 그때가 되면 비로소 외부의 보살핌 없이도 너는 너의 보호자가 될 수 있으리라.
하여 너를 돌아보며 나를 배운다.
숨바꼭질의 본질이 '숨은 것을 찾는 일'에 있다면 그것은 나의 눈을 피해 꼭꼭 숨었던, 숨죽이고 있었던 친구들의 머리카락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숨지 않았음에도 찾아보려 하지 않았던 나의 내면이었음을. 어쩌면 그 속엔 타인보다 낯선 내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놀이터의 시소 또한 '보다'와 '보았다'의 영문, 'see-saw'를 발음 그대로 표현한 기구이니, 자라날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조기 교육이란, 이별을 초대하는 자세와, 홀로 남겨진 시공時空 속에서 또 다른 나를 구출해낼 수 있는 구급법이 아닐까.
이 편지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종종 부치게 될 너에 관한 단상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네가 글자를 깨치고 나아가 삶의 기로에 섰을 때, 하나의 낡은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그마저도 부족하면 차라리 지나온 삶의 궤도에 궤적처럼 뿌려진 빵가루가 될 수 있기를.
이만 총총.
2019. 02. 23.
자크 라캉의 'fort-da' 놀이 생각나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있다 없다' 놀이쯤으로 보면 되는데, 아무튼. 좋은 시선을 갖고 있구나.
그 실패놀이를 염두에 두고 쓴 거예요. 역시 예리하십니다.
맞아. 나 역시 그 점을!
참고로, 이건 이제 두 돌을 넘어선 제 조카에게 쓴 편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었는데, 새삼 훌륭한 편지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좀 과한 표현을 써서 말하자면,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가 어긋나 있는 듯해. 그런데 그 어긋나 있는 부분에서 묘한 감동과 애정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풀어서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보는 것과 문자 속에 함의된 내용이 다른, 그 다른 지점에서 무한한 감정이 느껴져.
기표와 기의의 끝없는 미끄러짐은 언어의 숙명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공감하고 또 공감. 모든 것은 조금씩 어긋나 있기에, 우리는 그 틈으로 눈길을 주는 것. 반대로 모든 것이 조금도 어긋나 있지 않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사라지겠지.
좋은 글이네요 왜 이런 곳에 남기는 거죠?
장소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이러한 미천한 글로 인해 문학갤러리의 풍토가 정말 무슨 일류 갤러리처럼 변모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와서 개념글 쭉 내리는데 건질 글이 이거 포함 두개 밖에 없네,,,
너무 좋네요 - dc App